COVER STORY
존 엘리엇 가디너 & 컨스텔레이션 합창단·오케스트라
땅과 성좌의 노래

존 엘리엇 가디너는 2024년 9월, 자신의 음악 인생을 집대성한 새로운 예술 공동체 스프링헤드 컨스텔레이션을 창단하며 새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그간 가디너가 원전연주를 통해 세워온 음악적 이정표는 무엇이며, 그가 새롭게 쏘아 올린 ‘성좌(星座)’는 지금 이 시대에 어떤 빛을 건넬까
총괄 홍예원 기자
INTERVIEW 존 엘리엇 가디너 _홍예원
RESEARCH 가디너의 명반 10선 _류태형
PREVIEW 창단 2년 째, 컨스텔레이션의 다음 행보 _유내리
INTERVIEW
지휘자 존 엘리엇 가디너
60년 순례 끝에 도달한 음악의 땅
‘온전한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작품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견해와 해석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전달하고자 한다. 그 느낌은 음악을 움직이는 모터와 춤곡 리듬에 연결되어 있고, 일련의 화성과 복잡한 대위법 소리망에, 그들의 공간 관계에, 만화경처럼 시시각각 바뀌는 기악과 성악의 변화에 휘말려 있다. 스노클링을 기다리며 가슴 높이까지 올라온 바닷물 속에 서 있는 기분을 상상해보라. 그다음 물안경을 쓰고 물속에 들어가보라. 바로 당신은 이 세상과 동떨어진 마법의 세상에 들어가게 된다. 무수히 많은 빛깔과 요동치는 색깔들, 미묘하게 움직이며 지나가는 물고기 떼, 물결치는 말미잘과 산호로 가득 찬 마법의 세계는 생동감이 넘치지만 현실과 완전히 다르다. 내가 바흐 음악을 연주할 때 얻는 경험과 충격은 바로 이와 흡사하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천상의 음악’ 中
1964년 3월 15일,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회당. 당시 영국에서는 생소했던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의 대작 ‘성모 마리아의 저녁기도’가 이름 없는 한 대학생의 지휘로 연주되었다. 기존 영국식 합창과는 결을 달리하는 강렬한 생동감과 확신에 찬 이 무대의 주인공은 20세의 케임브리지 대학생 존 엘리엇 가디너였다.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에서 아라비아어 고전과 중세 스페인어를 전공한 그의 학구적 배경은 자연스럽게 고음악 발굴로 이어졌다. 나디아 불랑제(1887~1979)에게 음악을 배우면서도 역사적 탐구를 멈추지 않았던 그는 당대 연주 관행을 의심하며 악보 너머의 진실을 추적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1996년 11월, 본지는 가디너를 ‘바로크, 혁명과 낭만을 넘어 현대로 향하는 거장’이라 명명했다. 당시 그는 몬테베르디 합창단과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를 이끌며 고음악의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동시에, 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ORR)를 창단해 베토벤과 슈만 해석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었다.
가디너의 이러한 성과는 세계적인 인정으로 이어졌다. 1990년 영국 정부로부터 대영제국훈장(CBE)을 받았으며, 1992년 킹스 칼리지와 왕립음악원 명예교수로 위촉되었다. 또한 1994년에는 독일 음반비평가협회 ‘올해의 클래식 아티스트’, 칸 클래식 어워드 ‘올해의 지휘자’, 영국 그라모폰지 ‘올해의 아티스트’로 동시에 선정되며 명실상부한 시대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그가 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와 함께 내놓은 베토벤 교향곡 전곡 녹음 음반은 당시 클래식 음악계에 “베토벤은 이렇게 연주해야 한다”는 거대한 충격을 안기며 고음악의 영토를 19세기 낭만주의까지 확장하는 기점이 되었다.
오랫동안 완벽주의를 지향하며 ‘음악적 독재자’로 불리기도 했던 그는 2023년 5월, 현 영국 국왕 찰스 3세의 대관식에서 공식 연주를 맡으며 영국 문화계의 최고 정점에 섰다. 그러나 그 영광의 정점으로부터 불과 몇 달 뒤, 프랑스 공연 도중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고비를 맞았다. 성악가에 대한 폭행 사건 이후, 그는 수십 년간 이끌어온 단체들을 떠나 약 1년간 치료와 상담을 받으며 자숙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2024년 9월, 가디너는 음악적 탁월함과 혁신을 향한 평생의 여정을 집약한 새로운 결실을 세상에 내놓았다. 바로 컨스텔레이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Constellation Choir&Orchestra, CCO)의 창단이다. 이들은 새로운 예술 공동체인 스프링헤드 컨스텔레이션(Springhead Constellation)의 핵심 축으로서, 개별 연주자들이 독자적인 빛을 발하면서도 거대한 하나의 화음을 이루는 유연한 연주를 지향한다.
1996년 본지 인터뷰에서 가디너는 “음악 외에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나의 작은 농장이 바쁜 음악 활동과의 밸런스를 유지하게 만든다. 나무를 심고 동물을 기르는 일 등에 빠져 휴식과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라고 답했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2026년 현재, 그는 여전히 자신의 영지인 스프링헤드에서 휴식과 평정을 유지하며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의 농장이 치열한 음악 세계로부터의 도피처였다면, 지금의 그에게 대지는 음악을 길러내는 비옥한 토양이자 새로운 예술적 공동체인 ‘성좌’를 지탱하는 뿌리가 되었다.
음악의 뿌리를 찾아서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농장에 함께 있는 반려견이 참 매력적이더군요.
‘플로스카(Flosca)’에요. 제가 정말 아끼는 친구죠. 매일 아침저녁으로 인근 숲을 함께 산책하는데, 장난기가 어찌나 많은지 꿩이나 사슴을 쫓아 달려갔다가 다시 제 발치로 돌아오며 우리를 놀리곤 합니다. 해외 투어로 집을 비울 때면 이 아이가 얼마나 보고 싶은지 모릅니다.
지휘대 아래에서의 일상은 어떤 모습인지도 궁금하네요.
요가와 세면, 아침 식사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 후에는 악보를 연구하거나 하퍼콜린스 출판사에서 집필 중인 책 원고를 수정하곤 하죠. 제가 책임지고 있는 농장과 숲을 둘러보고 관리인들과 소통하는 것도 중요한 일과입니다. 현재 농장에는 750마리의 양과 160마리 정도의 소를 키우고 있습니다. 음악가이기 이전에 저는 이 땅을 관리하는 농부이기도 하니까요.
스프링헤드 컨스텔레이션은 위계적인 조직보다 별들이 모여 빛나는 ‘성좌’를 연상시킵니다. 이러한 정신이 ‘레퀴엠’ 같은 대작의 연주 방식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나요?
핵심은 음악가들 사이의 상호 의존성입니다. 우리는 협동 프로젝트를 통해 수년간 쌓아온 끈끈한 유대감이 무대 위에서 자율적으로 발현되도록 서로에게 충분한 공간을 내어줍니다. 평생 농사와 인연을 맺어오며 저는 음악 역시 땅과 흙에서 자라나는 것이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땅과의 연결은 우리가 음악에서 찾을 수 있는 깊이의 핵심입니다. 베토벤은 일찍이 “음악은 영혼이 살고, 생각하고, 발명하는 전기(電氣)적 토양이다”라고 말했지요. 모차르트의 ‘레퀴엠’과 ‘c단조 대미사’는 모두 미완성작입니다. 이 미완의 작품들은 모차르트가 인류애와 지혜라는 가치 아래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위로하려 했는지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의 ‘성좌’는 이 미완의 공간을 함께 호흡하며 채워나가는 공동체입니다.
케임브리지에서의 ‘성모 마리아의 저녁기도’ 연주 이후 60여년이 흘렀습니다. 젊은 시절의 ‘몬테베르디 정신’이 여전히 마에스트로의 여정에 북극성이 되고 있나요?
그 정신은 바흐에 대한 사랑처럼 제 인생의 상수(常數)입니다. 어린 시절 처음 접한 몬테베르디의 음악은 그때까지 듣거나 불렀던 어떤 음악과도 다른 독창성과 자극을 주었고, 80대인 지금도 여전히 저를 황홀하게 만듭니다. 사실 지금 쓰고 있는 책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17세기 초 유럽에서 활약했던 예술가, 물리학자, 작가들로 구성된 ‘성좌’의 일원으로, 음악의 판도를 바꾼 ‘게임 체인저’ 몬테베르디에 대해 집필 중입니다.
바흐, 그 이면의 인간에 대한 탐구
가디너는 지휘봉만큼이나 펜의 힘을 지닌 음악가다. 저서 ‘바흐: 천상의 음악’(2013년 출간, 2020년 한국어판 출간)은 단순한 전기를 넘어 역사를 공부한 인문학자의 시선으로 바흐의 악보와 당대 사회상을 집요하게 파고든 결과물이다. 그는 바흐를 신격화하는 대신, 봉급 문제로 당국과 다투고 위선적인 성직자들에겐 냉소를 보내던 ‘살아있는 인간’으로 복원했다.
가디너의 음악 인생에서 ‘바흐 칸타타 순례’는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다. 1년 동안(1999~2000) 전 세계의 역사적인 교회들을 돌며 바흐의 칸타타 전곡을 연주했던 이 프로젝트는 가디너에게 지휘자 이상의 사명감을 부여했다. 당시 투어 자금 난항으로 후원이 끊기는 위기를 맞았으나, 2005년 직접 ‘SDG’ 레이블을 설립하며 투어를 완수해 냈다(‘SDG’는 ‘Soli Deo Gloria’(오직 신의 영광을 위해)의 약자다). 이번 내한 프로그램인 ‘b단조 미사’는 그 순례의 과정에서 얻은, 영성이 응축된 바흐 해석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번 내한 공연의 프로그램으로 바흐의 ‘b단조 미사’, 모차르트의 ‘레퀴엠’과 ‘c단조 대미사’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모차르트는 간접적으로 바흐에게 배웠습니다. 모차르트가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를 방문했을 때, 바흐의 모테트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라’ BWV225를 듣고 “배울 것이 많다”고 말한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모차르트는 전체 악보가 없어 각 파트별 악보를 펼쳐놓고 보았는데, 그는 이 파트에서 저 파트로 눈을 옮기며 머릿속으로 전체 대위법을 완성해 들을 수 있는 천재였죠. 이처럼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작곡가들에게 바흐는 음악적 이정표이자 창작의 배경이었습니다. 따라서, 종교음악의 정점인 바흐의 ‘b단조 미사’와 그의 정신적 후계자인 모차르트의 합창음악을 함께 무대에 올리는 것은 서양 음악사의 가장 숭고한 대화를 재현하는 일입니다.
모차르트 ‘레퀴엠’은 작곡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미완성 상태였고, 이후 제자였던 쥐스마이어가 보필하여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의 보충이 모차르트의 어법과 다르다는 비판 속에 로베르트 레빈이나 프란츠 바이어 등 현대 학자들의 다양한 수정 판본들이 연주되기도 하는데요. 그 가운데 쥐스마이어 판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번 투어에서도 쥐스마이어 판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비록 부분적으로 투박하거나 미숙한 점이 있을지라도, 모차르트 시대와 가장 가까운 판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전히 이 판본이 그의 ‘레퀴엠’을 보여주는 가장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전공한 배경이 바흐나 모차르트의 복잡한 구조를 해석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나요?
과거의 음악에 접근할 때 역사적 맥락을 연구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이 곡이 왜 탄생했는지, 무엇을 기념하려 했는지, 어떤 공간에서 연주되었고 작곡가는 어떤 규모의 연주 인원을 생각했는지 등의 요소들 말이죠. 이는 지휘자가 리허설과 공연을 준비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이며, 연주자와 관객 모두의 경험을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저서 ‘바흐: 천상의 음악’에서 바흐를 ‘범접할 수 없는 칸토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 지극히 인간적인 초상으로 그려냈습니다. 수십 년간 그의 음악과 함께해오며, 특히 공감하게 된 바흐의 면모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바흐의 음악을 알아갈수록, 그리고 그 이면의 인간을 마주할수록 그가 동료와 후배들에게 얼마나 너그러운 사람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라이프치히를 방문한 음악가들에게 환대를 베풀었고, 아들들에게는 음악적 아이디어를 나누는 세심한 아버지였죠. 특히 공감되는 부분은 권위에 대한 그의 태도입니다. 바흐는 자신의 신념과 창의적 충동이 외부의 명령과 충돌할 때 무척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또한 그는 위선을 혐오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그의 칸타타 곳곳에는 위선자들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경계하는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흐의 음악이 ‘신성한 기념비’보다 ‘인간적인 초상’처럼 느껴지는 걸까요?
둘 다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바흐는 엄청난 천재였지만, 동시에 영원한 진리와 도전에 맞서 싸운 매우 복잡하고 인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루터교에서 세례받은 그가 가톨릭 미사를 토대로 곡을 써서 드레스덴의 가톨릭 궁정에 헌정했다는 점은, 그에게 교파 간의 장벽이 큰 걸림돌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죠.
경계를 허물고, 성좌의 안내자로

컨스텔레이션 오케스트라 ©Springhead Constellation
1990년대의 가디너가 자신이 창단한 시대악기 오케스트라들을 통해 작곡가 당대의 소리를 복원하는 원전연주의 기틀을 닦는 데 집중했다면, 이후의 그는 현대 오케스트라에 ‘역사주의적 숨결’을 불어넣는 교량 역할을 자처했다. 실제로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런던 심포니 등 현대 오케스트라들을 객원 지휘하며, 현대악기 특유의 풍부한 음색을 유지하면서도 비브라토를 절제하고 바로크적 아티큘레이션을 가미하는 등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연주(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 H.I.P.)’의 방법론을 현대 오케스트라에 이식하며 고음악과 현대연주의 경계를 허물었다.
최근 겪은 성찰의 시간은 이러한 소통의 기술을 더욱 겸허하게 만들었다. 과거의 그가 자신의 엄격한 음악적 고증을 관철시키기 위해 단원들을 몰아붙이던 ‘군주’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연주자 개개인의 해석적 자율성을 존중하며 각자의 빛을 끌어내는 ‘성좌의 안내자’로 거듭나고 있다.
런던 심포니(LSO)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OPRF) 같은 현대 오케스트라와도 꾸준히 협업을 이어왔습니다. 협업 방식에서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나요?
분명히 있습니다. 지난 1월에 OPRF와 라모(‘레 보레아드’), 드뷔시(‘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모음곡)를 연주하며 확신을 얻었습니다. 200년의 시차가 있는 두 작곡가 사이에 오케스트라의 색채와 투명함이라는 ‘붉은 실’이 흐르고 있었죠. 오늘날 현대 오케스트라들은 과거보다 훨씬 유연하고 다원적인 태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덕분에 저의 방식도 과거보다 훨씬 소통 중심적으로 변했습니다. 지휘자가 스타일을 강요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함께 공유하는 시대죠.
가속화되는 디지털 시대에 원전연주가 현대 관객에게 여전히 유효한 울림을 주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무엇보다 ‘신선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원전연주가 결코 고고학적 발굴이나 골동품 수집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고악기나 역사적 정보는 활기찬 연주를 위한 ‘도구이자 경로’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박물관의 유리 박스 안에 갇힌 음악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관객의 심장을 뛰게 하는 생명력을 지녀야 합니다.
스프링헤드 컨스텔레이션에 합류한 젊은 음악가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자질은 무엇입니까?
서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타성이나 클리셰에 젖지 말고 자신의 모공을 열어 다양한 음악적 자극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연주는 미리 정해진 공식이 아니라 호기심과 혁신, 그리고 음악의 본질에 대한 충실함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내한 외에도 2027년 하반기, 서울에서 선보일 베토벤 교향곡 전곡 사이클에 대한 기대가 높습니다. 1990년대의 전설적인 녹음 이후, 다시 마주한 베토벤은 어떤 모습인가요?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에 접근하는 것은 에베레스트 같은 거대한 산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이며, 어느 하나도 확정적이지 않고 도전으로 가득하죠. 베토벤은 우리 인생의 매 순간 새로운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 제게 가장 와닿는 가치는 그의 용기입니다. 그는 “예술을 연습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 비밀 속으로 뚫고 들어가라. 지식과 예술은 인간을 신성(神聖)의 단계로 끌어올릴 수 있다”라고 썼습니다. 시대가 험난할수록, 우리는 그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 베토벤의 음악을 더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인터뷰 말미, 남기고 싶은 음악적 유산이 있냐는 질문에 가디너는 “사람들에게 낙관적인 희망을 주는 것, 그리고 위대한 음악의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통해 그들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답했다.
1964년 몬테베르디로 음악계를 뒤흔들었던 청년은, 이제 자신의 농장에서 양떼를 돌보며 바흐의 대위법을 묵상하는 노지휘자가 되었다. 그의 지휘 인생은 선명하게 반짝이는 북극성처럼 돋보이기도, 때로는 차가운 비평의 칼날 위에 서기도 했다. 그리고 오는 3월, 우리가 마주할 가디너는 그 모든 시간을 통과하며 도달한 음악을 들려줄 준비를 마쳤다.
“음악은 땅에서 자라난다”는 그의 말처럼, 이번 내한은 가디너가 평생 일구어온 예술적 토양에서 피워낸 음악의 첫 무대가 될 것이다. 흩어져 있던 별들을 모아 하나의 성좌를 완성해가는 그의 마지막 순례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스프링헤드 컨스텔레이션
Performance information
존 엘리엇 가디너/컨스텔레이션 합창단·오케스트라
3월 3·4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바흐 ‘b단조 미사’ BWV232 (3일) 모차르트 ‘레퀴엠’ K626, ‘c단조 대미사’ K427 (4일)
존 엘리엇 가디너(1943~)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1964년 몬테베르디 합창단 창단을 시작으로, 1978년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EBS), 1989년 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ORR)를 창립하며 원전연주의 발전을 이끌었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리옹 오페라 예술감독을 역임했으며,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북독일 방송교향악단(NDR) 수석지휘자로 활동했다. 2024년 컨스텔레이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CCO)를 창단했다.
RESEARCH
가디너의 명반 10선
혁명적이면서 낭만적인 원전연주, 혁신과 보편의 변증법
서스턴 다트(1921~1971)와 데이비드 먼로(1942~ 1976)의 뒤를 이어 원전연주 2세대의 꽃을 피운 4인방.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1920~2016), 크리스토퍼 호그우드(1941~2014), 트레버 피노크(1946~), 그리고 존 엘리엇 가디너는 활발한 음반 녹음과 공연으로 고음악 분야에서 ‘스타 지휘자’의 반열에 오르며 각광받았다.
가디너는 15세에 지휘를 시작해, 케임브리지에 재학 중이던 1964년에 몬테베르디 합창단을 결성했고, 1973년부터 라모의 오페라들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후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 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베토벤과 베를리오즈까지 레퍼토리를 확장했다. 특히 유명 원전연주자들이 총출동한 베토벤 교향곡 전곡의 신선함은 지금도 가시지 않는다. 이후, 1996년 내한해 바흐 ‘b단조 미사’를 연주했고, 2004년에는 퍼셀의 ‘디도와 아이네아스’를 지휘했다.
유니버설 산하 아르히프 레이블과의 재계약이 판매 부진으로 무산된 이후, 가디너는 2005년 SDG 레이블을 설립해 바흐 칸타타 녹음을 지속해 왔다. ‘마태 수난곡’에서 잘 드러나듯 탄탄한 성악 앙상블과 유려하면서도 세련된 기악 연주로 대표되는 그의 해석이 담긴 음반들을 소개한다.
바로크와 초기 고음악
몬테베르디는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대전환을 이끈 작곡가다. 케임브리지 재학 시절 ‘성모 마리아의 저녁기도’를 지휘했던 가디너는, 25년 후 작곡가의 이름을 딴 몬테베르디 합창단과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를 이끌고 몬테베르디가 악장을 지냈던 베네치아 산마르코 대성당에서 이 작품을 실황으로 녹음했다. 이 음반➊은 성당의 거대한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풍부한 잔향이 음악과 완벽히 어우러지며 듣는 이를 매료시킨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➋은 가디너의 이름을 널리 알린 필청반이다. 녹음된 지 36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신선함을 잃지 않는다. 확신을 가지고 이 작품에 접근하는 가디너의 태도는 신뢰를 준다. 앤소니 롤프 존슨(테너)의 복음사가, 안드레아스 슈미트(바리톤)의 예수 외에도 바바라 보니(소프라노), 안네 소피 폰 오터(메조소프라노), 마이클 챈스(카운터테너) 등 내로라하는 성악진이 감동을 전한다. 몬테베르디 합창단과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의 매끈하면서도 무게를 잃지 않는 연주는 바흐 해석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가디너가 의도한 순서로 재구성한 헨델의 ‘수상음악’은 생동감 넘치는 연주로 청자를 사로잡는다. 야외 음악의 박력과 실내악적 정밀함을 보여주는 ‘왕궁의 불꽃놀이’➌ 역시 원전연주만이 낳을 수 있는 상쾌함의 최대치다. 금관을 주체로, 현란하고 추진력 있는 작품의 주법과 스타일을 엄밀히 고증한 가디너는 높은 완성도의 시대악기 연주를 이뤄냈다. 원반인 필립스 녹음을 리마스터링한 에소테릭 SACD의 음질이 탁월하다.
헨델의 ‘메시아’➍는 크리스토퍼 호그우드(L’Oiseau -Lyre), 장 클로드 말구아르(Sony)에 이어 등장한 원전연주의 ‘메시아’다. 빠른 템포와 뛰어난 명료성을 강점으로 한다. ‘할렐루야’ 합창의 부드러움과 기술적 완성도, 엘리자베스 윌콕의 바이올린 오블리가토, ‘나팔 소리 울려라’의 트럼펫 연주가 특히 인상적이다.
실천으로 증명된 원전연주
바흐 칸타타는 원전연주 합창 지휘자에게 에베레스트와도 같은 존재다. 가디너는 1999년 크리스마스, 독일 바이마르에서 ‘바흐 칸타타 순례’라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바흐 서거 250주년을 기념해 전 세계의 바흐 관련 성지를 돌며 그의 발자취를 따라 크고 작은 교회들에서 공연했다.
40년에 걸쳐 작곡된 동일 날짜의 칸타타를 한 저녁에 맞추기 위해, 가디너는 전 곡에 단일 음정(A=415Hz)을 적용했다. 이로 인해 높은 오르간 음정으로 쓰인 초기 바이마르 칸타타들은 바흐가 실제로 사용했던 전조 버전으로 연주돼야 했다. 라인홀트 쿠비크(1942~2024)의 최신 원전 연구를 반영한 신판 교정을 의뢰했음에도, 악기 편성·음정·저역 구성·성부 유형 등 수많은 실무적 결정이 남아있었다.
DG에서 진행하던 이 기획은 중도에 좌절됐으나, SDG 레이블에서 28권에 걸쳐 발매됐으며➎, 기존에 DG에서 발매되던 4장의 CD를 포함한 56CD에 오리지널 내지가 들어간 데이터 CD 1매로 구성됐다. 스즈키 마사아키보다 극적이고 톤 코프만보다 따뜻한 전집은 이렇게 완성됐다.
고전과 낭만을 다시 묻다
모차르트 ‘레퀴엠’➏은 시대악기를 사용하면서도 전통적인 스타일을 유지한 해석이다. ‘아뉴스 데이’를 제외하면 템포는 빠른 편이며, ‘세쿠엔치아’의 대규모 합창은 날카로운 긴장감과 역동성을 띤다. 소프라노 바바라 보니의 우아한 음색과 안정적인 트롬본 오블리가토는 표현의 완급을 자유롭게 조절하는 가디너의 융통성을 잘 보여준다. 칼 뵘 등 전통적인 명연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오는 해석이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녹음된 베토벤 교향곡 전집➐은 아르농쿠르, 노링턴, 호그우드, 브뤼헨에 이은 대표적인 시대악기 베토벤 해석으로 자리매김했다. 선명한 음색, 의표를 찌르는 리듬, 연구에 기반한 해석과 교향곡 9번의 템포는 새로운 베토벤상의 금자탑이다. 현대악기 연주에 친숙한 청자도 위화감 없이 들을 수 있다.
베토벤 ‘장엄미사’➑는 2012년 런던 바비칸센터 실황으로, 1989년 아르히프 녹음 이후 23년 만의 재도전이다. 쾌속 템포와 개성적인 악센트는 더욱 정밀해졌으며, 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의 기교적이고 유연한 연주, 몬테베르디 합창단의 중후함과 투명한 합창이 눈에 띈다.
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의 브람스 교향곡 연작➒은 “브람스 관현악에는 작곡자 자신이 상상했던 것 이상의 무거운 음향이 입혀져 왔다”는 가디너의 지론대로 브람스 교향곡의 군살을 걷어낸, 가볍고 상쾌하고 야무진 브람스상을 구현했다. 몬테베르디 합창단을 활용한 커플링 곡들 역시 합창음악의 거장다운 완성도를 보여준다.
가디너가 20년 만에 내놓은 ‘독일 레퀴엠’의 두 번째 녹음➓은 낭만적 시대악기 연주와 몬테베르디 합창단의 깊이 있는 합창이 조화를 이룬다. 제4곡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의 부드러운 합창과 그 후의 흐르는 선율은 눈물을 자아낸다. 제6곡 ‘우리가 영구히 머물 도성은 없고’의 격렬한 관악기의 연주와 어우러지는 합창을 이끄는 가디너의 지휘 테크닉에 감탄하게 된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PREVIEW
존 엘리엇 가디너가 창단한 컨스텔레이션의 다음 행보
올해부터 동·서양을 넘나드는 행군

존 엘리엇 가디너 ©BachFest Leipzig/Gert Mothes
2024년 9월 설립된 스프링헤드 컨스텔레이션은 프로그램 안에 사유를 넣어, 확장하는 방식으로 활동했다. 멘델스존 칸타타 ‘첫 번째 발푸르기스의 밤’과 ‘한여름 밤의 꿈’을 묶어 ‘마법과 신화’라는 부제 하에 도시 투어를 진행했으며, 이어 심포지엄 ‘음악과 땅’으로 음악과 자연, 지속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연주자들과 펼쳤다. 가디너의 지휘 아래 컨스텔레이션 합창단·오케스트라는 2025/26 시즌 유럽 투어와 더불어, 오는 3월 홍콩과 서울을 순회하는 아시아 데뷔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베토벤 서거 200주년인 2027년에는 뉴욕 카네기홀에서 베토벤 교향곡 전곡 사이클을 선보일 예정이다. 시즌의 중심에는 피아니스트 언드라시 시프와 함께하는 유럽 투어가 자리 잡고 있으며, 바이올리니스트 이자벨 파우스트와 첼리스트 장 기엔 케라스가 협연하는 3중 협주곡, 그리고 교향곡 9번 ‘합창’ 등을 연주한다. 이와 함께 바흐 음악에 대한 작업도 계속된다. 주요 무대에서 바흐 ‘b단조 미사’를 선보이며, 매년 이어온 컨스텔레이션 심포지엄과 아카데미도 변함없이 이어진다.
2028년부터 2030년까지는 컨스텔레이션의 예술적 지향을 보다 폭넓게 확장한다. 아랍과 서구 전통의 공명을 탐색하는 프로젝트를 비롯해, 몬테베르디에서 프레토리우스(1560~1629), 브룬스(1665~1697) 등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통해 합창 전통의 뿌리를 되짚는다.
글 유내리 기자
2026년 공연 일정
컨스텔레이션 합창단·오케스트라
바흐 ‘b단조 미사’ BWV232, 모차르트 ‘레퀴엠’ K626, ‘c단조 대미사’ K427
3.3·4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3.6~8 홍콩, 홍콩문화센터
바흐 ‘하늘은 기뻐하며 땅은 영광으로 차네’ 칸타타 BWV31, ‘저녁이 되리니 저희와 함께 있어주소서’ 칸타타 BWV6, ‘부활절 오라토리오’ BWV249
4.3 아테네, 메가론 콘서트홀
4.5 베르사유, 베르사유 궁전 왕실 예배당
4.7 부다페스트, 뮤파 버르토크 콘서트홀
4.8 빈, 콘체르트하우스
4.10 하이델베르크, 콩그레스하우스 슈타트할레
4.11 우디네, 조반니 신극장
J.C. 아리아가 교향곡 D장조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K622 하이든 교향곡 49번 ‘수난’
5.27 스페인, 마드리드
5.28 스페인, 바르셀로나
5.29 스페인, 사라고사
5.31 독일, 아우구스부르크
바흐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가, 샛별이여’ 칸타타 BWV1, ‘깨어라, 우리를 부르는 소리여’ 칸타타 BWV140 쉬츠 ‘나는 외치는 자의 소리이다’ 요한 헤르만 샤인 ‘무엇이 너를 근심하게 하는가’ 외
6.11·12 베르사유, 베르사유 궁전 왕실 예배당
6.13 쾰른, 필하모니
6.14 룩셈부르크, 필하모니
6.16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6.17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
브람스 ‘독일 레퀴엠’ 멘델스존 교향곡 2번 ‘찬가’
8.21 스페인, 산탄데르
8.22 스페인, 산세바스티안
8.26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8.28 독일, 브레멘
8.30 이탈리아, 라벨로
8.31 이탈리아, 메라노
9.8 이탈리아, 피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