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4~29일 백성희장민호극장
이윤택의 신작 ‘혜경궁 홍씨’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무대에 올랐다. 개막 전부터 전회 매진 소식이 들려온다. 지난가을 “저승 가는 길목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던” ‘개구리’ 이후 예술감독의 공석이 방치된 채 뒤숭숭한 국립극단이다. 그런가 하면 동일한 시기에 올라간 김재엽의 ‘알리바이 연대기’가 새로운 정치극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지난해 연말 온갖 상을 휩쓸었다. 최근 작가들의 목소리가 살아나고 있다. 공연된 작품이 사회면에 오르내리는가 하면, 전혀 다른 방향에서 돌파구가 뚫리기도 한다.
이윤택도 마찬가지다. 지난여름 게릴라극장에 올라간 이윤택 각색의 오레스테스 3부작에서 ‘피의 여왕’ 클리템네스트라와 ‘정의의 여신’ 아테네를 대결 구도로 작품의 중심축을 오레스테스가 아니라 클리템네스트라로 확실하게 이동시키며 이윤택 특유의 날카로운 정치 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이제는 ‘피의 복수’를 멈추고 정의와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회 통합이 절실함을 각인시켰다.
처음 ‘혜경궁 홍씨’의 공연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의아했다. ‘문제적 인간, 연산’ ‘시골선비 조남명’ 그리고 장영실을 다룬 ‘궁리’의 전작들을 돌아봤을 때 ‘혜경궁 홍씨’와의 거리는 멀어보였다. 그러나 공연을 보고 난 후 생각이 달라졌다. 역시 이윤택이구나! 작가가 다시 살아나고 있구나! 확연히 느꼈다. 혜경궁 홍씨는 클리템네스트라의 뒤를 이어 이윤택에게 ‘문제적 인물’이 되었다. ‘오레스테스 3부작’ ‘혜경궁 홍씨’ 모두 배우 김소희가 함께 했다. 그래서 더욱 강조의 효과가 높아졌다.
공연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느낀 것은 이윤택이 쉽고 깊어졌다는 것이다. ‘인간’의 주제가 깊어졌다. ‘궁리’에서 장영실은 세종의 등에 난 등창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준다. ‘혜경궁 홍씨’에서는 평생 몸에 열이 많아 등이 가려운 부인에게 죽은 남편이 다가와 귀신의 서늘한 기운으로 등의 열을 내려준다. 등이 가려운 부인은 혜경궁 홍씨고, 죽은 남편은 사도세자다. 조작된 여론몰이로 뒤주 속에 갇혀 죽어간 사도세자의 끔찍한 이야기는 지금 우리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로 정확히 읽힌다. 그렇다 해서 공연이 날선 칼날만 번뜩이는 것은 또 아니다.
공연은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을 토대로, 혜경궁 홍씨의 하룻밤 사나운 꿈자리로 풀어갔다. 전적으로 혜경궁 홍씨의 관점에서 때로는 악몽처럼, 때로는 서늘한 바람 한 줄기처럼 시원하게 진행된다. 궁궐 창호지 문짝 이곳저곳에서 귀신이 튀어나오고, 심지어 우물물에 몸을 던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우물귀신이 토해내듯 다시 무대로 던져놓기도 한다. 배우 김소희는 열 살 여자 아이부터 젊은 시절을 거쳐 노년까지 혜경궁 홍씨를 혼자 도맡아 하지만 전혀 이질감이 없다. 오히려 중국의 변검술처럼 자유자재로 얼굴을 바꿔 쓴다. 노망든 노인네처럼 짐짓 역정도 냈다가, 천진한 아이의 표정도 됐다가, 귀신 서방이 등을 긁어주면 천연덕스럽게 시원한 숨을 토해내기도 한다.
‘한중록’을 둘러싼 역사논란 따위는 잊게 된다. 대신 혜경궁 홍씨라는 한 인물이 ‘승정원일기’나 공식 역사 기록과는 다른 관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말하고자’ 하는 지점이 분명히 전달된다. 간밤에 천둥치고 비바람 불던 미친 꿈자리가 우물물의 차가운 찬물 한 바가지 끼얹어지며 끝나고, 마지막 장면에서 혜경궁 홍씨는 책상에 앉아 조용히 글을 쓰기 시작한다. 마지막 문장은 결연하다. “사실을 사실이라 적으니, 내 한 터럭만큼도 거짓이 있으면 하늘의 죽이심을 당하리라.” 이윤택만큼 관객들의 가려운 등 확실히 긁어주는 작가가 또 있을까. 이윤택의 작가적 메시지는 단호하고 분명하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 한마디 한마디처럼 시적 은유이되 생생하고 분명한 울림을 갖는다.
글 김옥란(연극평론가) 사진 국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