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제나는 래틀과 만난 뒤 부와 명성뿐 아니라 음악적인 도약의 기회까지 함께 얻었다. 스캔들과 여론의 질타가 오히려 그녀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이 정도면 ‘위험한 사랑’이라도 한 번쯤은 해봄 직한 모험이 아닐까. ‘클래식 음악계 퍼스트레이디’ 막달레나 코제나의 첫 이야기를 그녀의 삶과 사랑으로 시작해본다.
“사랑하는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위로와 은혜를 내려주소서! 나의 죄가 뼈 속의 고름처럼 나를 괴롭게 합니다. 주의 어린 양,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나는 수렁에 깊이 빠져갑니다!”
바흐의 칸타타 179번 ‘주에 대한 그대의 경외심은 헛되지 않도다’ 가운데 5곡 소프라노 아리아는, 마치 ‘마태수난곡’ 38곡의 알토 아리아에서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참회의 눈물을 흘리듯 가장 비통한 심정을 고백한다. 그녀는 시대악기 연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담백하고 깔끔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비브라토를 적당히 섞어가며 미간의 정중앙에서 발산하는 기막힌 공명점은 슬픔을 자제하지 않고 오히려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성량의 한계는 과연 어디일까? 칸타타를 연주하며 부르짖는 어마어마한 음의 파고는 실로 엄청났다.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간의 신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이토록 강렬하게 표현하는 그녀에게서 소름 끼치는 전율이 전해져왔다. 성(聖)과 속(俗)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인간과 신의 경계를 허물어 끝내 천국에 이르게 하는 바흐 음악의 정수를 꿰뚫는 절창이었다. 더구나 진한 금발에 늘씬한 키, 그리고 슬픈 얼굴 표정만으로도 이미 객석은 속으로 울며 흐느끼고 있었을 터이다. 그녀는 이름마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에서 따온 막달레나 코제나였다. 태생부터 그녀의 근원은 운명처럼 교회음악과 옛 음악의 굴레가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막달레나 코제나를 처음 만난 것은 2001년이었다. 바흐 서거 250주년이 되는 2000년에 세계 각국을 돌며 작업한 존 엘리엇 가드너 경의 ‘순례 여행’의 결과물로 제작된 영상물을 통해서였다. 영국 웨일스 지방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펨브룩셔 해안가에 자리 잡은 성 데이비드 대성당. 589년에 순교한 웨일스의 수호성인 데이비드를 기리기 위해 12세기 말부터 시작된 엄청난 위용의 건축물은 한적한 시골 마을을 지키는 정신적인 지주다. 이 역사적인 공간에서 가드너의 수족과도 같은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와 몬테베르디 합창단이 연출하는 바흐의 칸타타 연주에 코제나가 출연한 것이다. 그런데 DVD 내지에 코제나는 소프라노로 소개되어 있었다. 조바꿈하지 않고 원본 악보 그대로 부르는 소프라노 아리아는 너무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그녀가 메조소프라노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녀가 성부의 한계를 모르는 팔색조 같은 가수라는 것은 음반을 더 섭렵하고 나서야 알았다. 소프라노 솔로 칸타타로 잘 알려진 ‘나의 마음은 죄로 인해 피로 물들었노라’에서 그녀의 진가는 더욱 빛났다. 이렇게 코제나와의 첫 만남은 소프라노보다 더 고음이 자연스러운 메조소프라노로 각인되었다. DVD, BBC Opus Arte OA 0816 D
1973년 체코 제2의 도시 브르노에서 태어난 막달레나 코제나.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전인 1992년 호암아트홀에서 동구권 성악가 초청 콘서트에서 19세의 앳된 나이로 당당히 초청돼 기염을 토했던 그녀가 11월 19일 내한한다. 21년 만의 귀환은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체칠리아 바르톨리ㆍ엘리나 가랑차와 함께 세계 최정상의 메조소프라노로 입지를 굳힌 코제나이기에 그 무게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지금은 오페라와 예술가곡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끝을 모르게 확장된 레퍼토리를 자랑하고 있지만 1997년에 발매된 그녀의 데뷔 앨범은 당연히 바흐의 교회음악으로 꾸며졌다. 1996년 7월 체코의 크로메르지시 콘서트홀에서 녹음된 처녀작은 생동감으로 날아오른다. ‘마니피카트’ 중 ‘내 영혼이 기뻐하며’로 문을 여는 코제나의 음성은 어두운 저음가수가 아니라 밝디밝은 긍정의 에너지를 가득 담고 있다. 유명한 ‘양떼는 편히 풀을 뜯고’에서는 유연한 템포로 내추럴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B단조 미사’의 ‘주를 찬송합니다’로 갈무리하는 코제나의 성악 테크닉은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르러 특히 바로크 음악 연주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멜리스마 처리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DG Archiv 457 3672
한편 오는 11월 내한 공연을 앞두고 재발매된 ‘사랑의 편지’(2010)는 어린 시절의 추억 속으로 돌아간다. 여섯 살에 브르노 필하모닉 어린이 합창단에 들어간 코제나가 즐겨 불렀던 옛 노래 모음집인 셈이다. 몬테베르디ㆍ카치니ㆍ비탈리ㆍ딘디아 등 이탈리아의 초기 바로크 작곡가들의 사랑 이야기를 청아하고 신비로운 창법으로 구현했다.
“오 아름다운 눈이여, 오 황금빛 머리여. 경이로운 불길과 사랑스런 족쇄 속에서 내게 죽음을 가져다주는구나.”
야릇하게 모자이크화처럼 점점이 번져오는 류트 반주를 타고 코제나의 음성이 처연하게 틀려오는 비탈리의 마드리갈에서부터 타임머신을 타고 수백 년을 순식간에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100명이 넘는 연주자가 무대 위로 올라가 굉음을 내는 후기 낭만주의 오케스트라 음악에 길들여진 애호가라면 프리바테 무지케가 선사하는 시대악기가 싱거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 음악이 아닌 소리에 매몰될 수 있으랴. 옛 것을 노래하는 코제나 덕분에 어쩌면 우리의 옛 것도 함께 떠올려지는 행복을 누릴지도 모른다. DG 477 8764
여기서 코제나 하면 연상되는 한 남성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사이먼 래틀, 그는 버밍엄 시향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리고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장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도대체 이 영국인 지휘자와 체코인 성악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03년 글라인드본에서 운명의 짝을 만나다
앙드레 프레빈이 33년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2002년 안네 조피 무터를 다섯 번째 부인으로 맞이한 것이나, 레너드 슬래트킨도 세 번 결혼했으니 지휘자들의 여성 편력은 유달랐다. 래틀은 어떨까? 그는 1980년 미국인 소프라노 엘리제 로스와 결혼해 두 아들 사샤와 엘리엇을 두고 있었다. 래틀의 자식들은 각각 클라리넷 연주자와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첫 부인과는 15년 뒤 파경을 맞았다. 빈자리를 대신한 여인은 5년 연상의 캔디스 앨런. 보스턴 출신으로 하버드 대학을 나온 그녀는 유능한 할리우드 영화 작가이자 소설가였다.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미국 영화감독 조합의 회원으로 추대되는 영광을 누린 그녀였지만 2004년, 8년을 채우지 못하고 래틀에게 결별 통보를 받았다. 젊고 예쁜 새로운 여인이 혜성과도 같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래틀의 친구와 동료들은 두 번째 이혼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1959년 7월 22일 마리아 칼라스가 오나시스의 호화 요트 크리스티나 호에 올라 3주 동안 지중해를 돌며 불륜의 정점을 찍었을 때 기자들은 열광했다. 진지하고 조용한 클래식 음악계에 이보다 더한 뉴스거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칼라스는 거리낌없이 ‘조강지부(糟糠之夫)’ 메네기니와의 11년 결혼 생활을 정리했다. 그리고 45년 뒤, 칼라스와 오나시스와의 세기의 스캔들에 버금가는 사건이 전형적인 ‘영국 신사’ 래틀에게 터진 것이다. 1999년부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라는 엄청난 직함을 짊어지고, 더구나 영국 왕실로부터 작위까지 받은 위대한 영웅이었기에 그 충격파는 대단했다. 사실 래틀은 두 번째 부인 앨런과도 1980년에 LA에서 처음 만나 절친으로 지내오다 1996년에 결혼에 골인했다. 이쯤 되면 존경받는 마에스트로는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에 맞먹는 바람기를 타고난 것이 아닐까.
2003년 서른 살의 코제나는 유럽에서 가장 잘 나가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가수였다. 그 해 6월 그녀는 영국 남부 이스트석세스 주의 한적한 글라인드본의 오페라 축제에서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의 ‘바지역할’ 이다멘테로 열연하고 있었다. 평론가들은 코제나의 완벽한 음성과 수려한 외모를 칭찬하며 띄워주기에 바빴다. 이때 지휘를 맡았던 래틀과 코제나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코제나는 래틀과 만들어가는 작업이 꿈만 같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책과 악보에 겉으로 나타나 있는 의미에 얽매이지 않고 모차르트의 참모습을 알고 있었어요. 모차르트 당대와는 상관없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하지만 그것들은 살아 움직여요. 그와 같이 일하는 건 천국에 있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이렇게 래틀의 음악에 푹 빠진 코제나는 이성적인 사랑에도 동시에 감전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프랑스인 바리톤 뱅상 르 텍시에와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혼의 몸이었다. 그래서 현지 언론에서는 래틀과 코제나를 “스파이크가 장착된 하이힐 구두처럼 섹시함과 위태로움을 겸비한 사랑&rdq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