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광음을 잘게 쪼갠다. 크고 작게 나뉜 시간 속에 가치를 불어넣는다. 순간은 동작이 되고, 춤이 된다. 진정성이 샘솟는 감동이 된다.
피아노 소리, 거친 숨소리, 리듬을 맞추는 발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재공연을 앞둔 뮤지컬 ‘엘리자벳’ 연습실을 채우는 소리는 단순했다. 뮤지컬 넘버로 기억되는 ‘레미제라블’이나 춤의 비중이 상당한 ‘페임’과 달리, ‘엘리자벳’은 극 안에서 노래·드라마·춤이 각각 대등한 비중을 두고 유기적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음악과 대본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국내 창작진에 의해 새롭게 구성되다 보니, 지난해 초연 당시에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전까지 끊임없이 상의하고 다듬는 과정이 계속됐다. 올해 무대에서는 디테일한 부분을 보강하고 춤적인 요소가 돋보이는 안무들을 선보일 계획이다. 그래서인지 춤이 탄생하고 훈련되는 현장에 다른 말은 필요치 않았다. 연습실 안에는 눈빛과 호흡만이 안무가와 앙상블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뮤지컬에서 춤은 그 자체로 존재할 뿐 아니라 캐릭터를 설명해주고, 드라마 플롯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해요. 캐릭터의 감정을 연기로 표현하다가 그것이 배가 되면 노래를 부르고, 노래만으로 더 표현이 안 될 때 춤을 추게 되죠. ‘엘리자벳’에는 드라마틱한 춤, 은유적이면서 상징적인 춤, 볼거리를 위한 화려한 춤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어요. 노래와 안무가 긴밀하게 관계를 맺으면서 기승전결을 만들어가는 것이 매력적인 작품이죠.”
뮤지컬 안무가로 데뷔한 지 올해로 28년째. 그간 장르를 불문하고 2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맡으며 배우도 무대의 모습도 달라졌지만, 서병구의 안무에서 ‘진정성’이라는 키워드는 언제나 변함없다.
“껍데기 같은 춤은 사양합니다. 몸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 중요해요. 배우들에게 춤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고 그것을 100퍼센트 이상 다 끄집어낼 것을 항상 요구해요. 손 하나를 펼치더라도 거기에 담긴 것을 표현해야죠.” 춤에서 테크닉과 표현력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요소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완벽히 충족시킬 수 없다면 서병구는 진심을 담아 표현하는 편을 택한다. 조금 어긋난 동작이더라도, 진정성이 담겨 있다면 관객에게는 감동으로 느껴진다는 믿음에서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심의 본질은 결국 사람 안에 있기 마련. 그는 일상에서 마주하고 스치는 낯선 이들에게서 작품의 영감을 자주 얻는다. “평소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녀요. 멍하니 서 있거나 게임에 열중하는 사람들, 아니면 구부정하게 웅크리고 있는 노인, 피곤에 지친 회사원의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안무를 떠올릴 때가 많아요.” 지금까지 해온 것이 춤밖에 없어서, 춤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춤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그에게 일상은 곧 춤이다.
내 안에 춤이 있었다
서병구가 처음 춤을 만난 것은 세 살 무렵이었다. 창을 하는 큰어머니를 따라 교습소에 갔던 것이 그의 인생을 지금으로 이끈 시발점이 됐다. 어른들 기억에 의하면, 그는 교습소에서 장구춤과 살풀이춤를 추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집에 돌아와 눈으로 익힌 춤을 곧잘 따라 추는 아이였다. 젓가락을 두드리면서 장구춤을 따라했고, 휴지를 허공에 흔들며 살풀이춤을 췄다. 귀엽다고 생각하고 넘어갈 법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느낌’을 살려 춤을 추는 아들을 교습소에 보냈다. 그때부터 열세 살까지 한국무용을 배웠다. 중학생 시절 춤선생은 주한미군방송(AFKN)이었다. 그는 텔레비전에서 뮤지컬 배우이자 영화 배우인 라이자 미넬리가 출연하는 쇼에 자주 등장했던 춤에 열중하며 자연스럽게 재즈댄스에 대한 감을 익혔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한때 미대 진학을 고민했지만, 결국 경희대 무용과에 유일한 남학생으로 입학해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정작 그가 열중한 것은 디스코 춤이었다. 친구들과 제대로 디스코 춤을 추기 위해 결성한 대학생디스코연합동아리가 유명해지면서 졸업과 동시에 MBC무용단 상임 안무가로 발탁됐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해 현대무용을 전공하고 미국과 영국에서 연수 과정을 통해 재즈댄스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어린 시절 라이자 미넬리 쇼에서 보았던 춤을 만든 장본인이자, 뮤지컬 ‘시카고’ ‘카바레’의 안무가인 밥 포시를 롤모델로 삼아 그의 춤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990년, ‘캣츠’에서 마술사 고양이 역을 맡고 이듬해 재공연 안무를 맡게 되면서 뮤지컬 안무가로서 커리어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1993년 서병구는 ‘동숭동 연가’로 당시 파격적인 안무를 선보였다는 평을 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뮤지컬계에 각인시켰다. 이후 ‘명성황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아가씨와 건달들’ ‘아킬라’ ‘삼총사’ ‘잭더리퍼’ 외에도 지난해 ‘엘리자벳’ ‘황태자 루돌프’ ‘라카지’에 이르기까지 독창적인 안무 스타일을 선보이며 독보적인 길을 걸어왔다.
“서로 다른 다양한 춤을 습득하고 훈련해왔어요. 예를 들어 한국무용과 재즈댄스는 호흡법이나 박자, 힘의 완급이 완전히 다른데, 저는 그것들을 하나의 춤 안에 녹여 독창적인 안무로 발전시켰죠.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어요.” 그에게 뮤지컬 안무가에게 필요한 자질에 관해 물으니 선천성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뮤지컬 안무가를 꿈꾸며 지금까지 그를 찾아온 젊은이들을 보며 떠올랐던 생각인 듯싶다.
“뮤지컬 안무가에게는 창조적인 감각, 그에 수반되는 예술적인 오감, 심미안적인 성향, 박자에 대한 리드미컬한 감각, 음악을 디테일하게 분석할 수 있는 능력들이 필요해요. 또 재즈댄스·현대무용·한국무용·스포츠댄스·비보이춤에 리듬체조까지, 다양한 춤들에 훈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가르칠 수 있어야 하고, 변형과 재창조를 할 수 있어야 하죠. 후천적인 연습과 훈련을 통해 습득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타고나야 가능한 것들이 상당수예요.”
“누구나 춤 출 수는 있지만, 창조하는 것은 다른 영역”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더불어 춤의 성향이나 스타일이 다를지라도 어떤 춤에서든 유일무이한 정체성을 계속 드러내야 하고, 드러내고 싶다는 바람이다. 이러한 맥락은 교육철학으로도 이어진다. 그는 학생들에게 스스로 자유롭게 창조할 수 있는 예술가가 될 것을 강조한다. 자신이 무엇을, 왜 표현하고자 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그가 학생들에게 하는 이야기는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안무가로서 인생의 절반 이상을 성공 가운데 살아왔지만, 앞으로 더 오래, 더 많이 이뤄내고 싶은 일들이 아직 많아서다. 지난 2010년 창작뮤지컬 ‘올댓재즈’에서 연출 겸 안무를 함께 맡아 밥 포시 스타일을 새롭게 국내 관객에게 소개했던 그는, 요즘 내년 초 막을 올릴 ‘마이 뮤즈’를 위한 구상 중에 있다. 이번 작품에서도 연출과 안무를 동시에 맡은 그는 패션 디자이너 세계의 빛과 그림자를 음악과 춤으로 무대 위에 새롭게 조명할 계획이다.
그가 처음 춤을 만났을 때, 춤은 삶이 되었고 세월은 춤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이제 그는 춤이 되었다. “무언가를 창조하기 원한다면 먼저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라고 외친 괴테의 말처럼.
뮤지컬 안무가 서병구
‘캣츠’ ‘동숭동연가’ ‘명성황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아가씨와 건달들’ ‘아킬라’ ‘삼총사’ ‘잭더리퍼’ ‘황태자 루돌프’ ‘엘리자벳’ ‘라카지’ 등 다수 뮤지컬에 참여하여 안무를 맡았고, ‘올댓재즈’에서 연출·안무를 담당했다. 제1·16·18회 한국뮤지컬대상 안무상, 제7회 더뮤지컬어워즈 안무상을 수상했다.
글 김선영(sykim@) 사진 박진호(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