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람 홀딱 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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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2월 1일 12:00 오전

저는 새로운 걸 싫어해요. ‘남다르다’ ‘새롭다’ 이런 단어가 싫어요. 그냥 항상 똑같이 춤을 추고 있는데, 처음 저를 봤을 때는 뭔가 새로운 것처럼 이야기를 하더니, 두 번째 봤을 때는 실망을 합니다. 실망은 기대 안에 존재하지요. 뭐든 자연스러운 게 좋습니다. 작품은 어떻게 보면 자식과도 같아요. 나의 모든 에너지와 열정을 쏟아서 만들어내는 거니까요. 3년 동안 여기저기서 신작 요청을 받아 열 개의 안무를 했어요. 그런데 이러한 작품 활동은 어떻게 보면 아이만 낳아놓고 내버려두는 거죠. 그 작품마다 이야기라는 것이 있는데 말예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네 작품을 해라’라고요. 돌아보면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식들한테요. 그래서 더 이상 신작을 안 해야겠다는 다짐도 해요. 제가 누구냐고 물으셨나요? 저 스스로도 지난해부터 묻고 있어요. ‘너는 누구냐?’ 진심으로 궁금합니다.


▲ 인터뷰이 안무가 김보람
인터뷰어 정우정 기자


▲ 2013년 1월 14일 오후 8시
월간객석 사옥 갤러리 정미소

안녕하세요. 월간객석 정우정 기자입니다. 아티스트를 홀딱 벗기고, 깨고, 반하는 장이죠. 오픈인터뷰 홀딱, 오늘은 네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만나볼 아티스트는 현대무용가인데요, 우선 굉장히 독특한 외모를 갖고 있고요, 최근 무용계에서 실력파 예술가로 주목받고 있는 현대무용가이자, 안무가입니다. 바로 김보람 씨인데요, 김보람 씨를 이 자리에 모셔보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이하겠습니다.
갤러리 정미소의 설치 작품 사이로 김보람이 걸어 나온다.
그는 까만 양복 차림에 선글라스를 꼈다.
김보람 씨 안녕하세요? 인사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김보람입니다.
이 자리에서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네, 저도 반갑습니다.
여러분, 김보람 씨를 이렇게 만나니, 무섭다는 생각까지 들지 않으세요? (다시 그를 보며) 굉장히 떨다가 오셨지요?
네, 조금 그랬습니다.
이곳에 김보람 씨를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모였으니, 편안하게 이야기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먼저 김보람은 현대무용가예요. 어떻게 춤을 만나게 되었나요?
초등학교 6학년 때 텔레비전에서 가수 현진영의 춤을 봤어요. 그때 한창 유행이었는데, 다들 따라 추곤 했죠. 저도 자연스럽게 동네에서 춤추며 놀고, 모여 있는 자리가 있으면 TV에서 본 대로 춤을 췄어요. 사람들 반응이 엄청 좋았어요.(관객들이 웃는다)
그 동네라 함은, 김보람 씨가 자란 전남 완도인가요?
네, 사실 저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 못했어요. 시골에서 자랐고 공부도 좋아하지 않았으니, 그 외의 것에 계속 눈을 돌렸던 것 같아요. 그렇게 춤을 본 후부터는 뭘 하든 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다짐했어요. 그 생각이 ‘나는 춤을 추지 않으면 안 되겠다’로 바뀌었고, ‘더 이상 완도에 있으면 안 되겠다’ 하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고2때 부모님께 서울로 가겠다고 6개월 동안 이야기했는데, 부모님은 저를 서울로 보내주실 생각이 없었어요. ‘나 이번에 백댄서 팀에 합격했다. 1년만 고생하면 텔레비전에도 나올 수 있다고 했다’고 무작정 말했어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허락을 하시더라고요. 그때가 2000년인가 그랬어요. 속전속결로 고등학교 전학 절차를 밟고 무작정 서울로 왔어요. 정말 1년 안에 백업댄스팀에 들어가게 됐죠. 얼마 되지 않아 가수 채정안의 메인 댄서로 춤을 추기도 했고요. 정말 텔레비전에 나왔어요.
그 후로 7년 동안 백업댄스팀 ‘프렌즈’에서 방송 댄스를 췄죠? 그 사이 2003년 대학에 진학했고요. 학교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제가 공부를 못하고, 또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대학에 가는 것은 저한테 무의미했어요. 장사를 하고 싶었죠. 그런데 백업댄스를 추다 보니, 춤을 추고 있는데도 뭔가 답답했어요. 그래서 미국에 가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마돈나나 마이클 잭슨 뒤에서 춤을 춰봐야지. 그래야 ‘나 백댄서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미국 비자를 받으려 하는데, 백댄서가 비자에 기입이 가능한 직업은 아니었어요. 직업이 불분명하니 비자가 안 나온다고 해요. 그러다 학생 비자는 쉽게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 대학에 가야겠구나. 당시 저는 수능을 안 봤기 때문에 제가 갈 수 있는 학교는 서울예술대학 밖에 없었어요. 무용과는 갈 수 있었죠. 발레나 한국 무용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도 춤의 기본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선글라스는 계속 끼고 계실 건가요?
적응될 때까지…
네, 어디를 보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서울예대에 가서 김기인 선생님을 만났어요.
네. 선생님을 만난 건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김기인 선생님은 2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지금 돌아보면 저는 선생님 덕분에 학교에서 무용을 배운 게 아니라, 춤을 배웠죠.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어요. “방송 댄스도, 스트리트 댄스도, 살사도, 발레도 다 춤이다”. 무용을 배웠다기보다는 춤을 알려주신 분이죠.
미국행 욕망도 가라앉힌 김기인 선생님의 역할도 커보이는데요.
선생님이 추구하셨던 춤이 있어요. ‘스스로 춤’이라는 건데요. 그 덕분에 자신감을 갖게 됐죠. 다들 정해진 것을 향해 살잖아요. 가령 춤에 있어서도 다리를 더 높게 들어라, 팔을 더 길게 뻗어라… 주문을 받게 돼요. 그러나 그 춤은 너 ‘스스로 춰라’ 했어요.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그 춤을 추고 나면 사회나 스스로에게 받는 스트레스를 자신도 모르게 춤으로 떨궈내게 되요. 꼭 치료를 받는 느낌이죠. 춤에 그런 힘이 있다는 건 정말 놀라워요.
춤이랑 무용은 뭐가 다른가요?
(한참을 침묵하다) 언어적으로는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생각했을 때는 춤은 춤. 어떤 작품이라기보다 춤은 춤이죠. 움직임이요. 그런데 무용으로 넘어가면, 뭔가 춤을 작품으로 만드는 것, 예술로 만드는 것이 돼버려요. 한편으로는 어떤 공식이 생겨버릴 수도 있죠. 그러나 저는 춤 자체가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도 무용하는 사람이 아닌 나는 춤추는 사람이다 생각해요. 나는 스스로 생각하죠. ‘아, 나는 무용하는 게 아니라 춤추는 거야.’
여러분, 김보람 씨 춤, 궁금하지 않으세요? 춤을 만나보지 않고 김보람 씨를 이야기하기란 참 어렵죠. 그럼 김보람 씨 춤을 영상으로 만나볼까요?
객석에서는 영상이라는 말에 사뭇 실망한 듯했지만, 바로 반갑게 화답했다.
준비가 원활하지 않아 김보람 작업노트의 그림이 먼저 뜬다.
영상 준비에 약간 문제가 있나 본데요, 이 그림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제가 음악을 쓰는 방법인데요, 안무 전에 음악이 들리는 대로 선을 연결해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해요. 나름대로 분석하는 방법이에요.
아… 그럼 이 그림은 음악인가요? 무슨 곡이죠?
네. 라벨의 볼레로예요.
그림만 봐서는 뭔지 잘 모르겠네요.
특별한 건 없고요. 꺾이는 음들을 표현했죠.
노래로 한번 들어볼 수 있을까요?
김보람은 허밍으로 앞 소절을 노래했다.
춤을 만들 때 이 그림은 어떤 영향을 발휘하죠?
춤을 출 때 어떤 움직임을 만들어놓고,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일종의 지도로 써두는 거죠. 그럼 춤은 음악을 향해서 가게 되어 있어요. 길을 잃어도 제가 음악을 들었을 때의 느낌을 기억해서 다시 몸으로 표현해낼 수가 있죠. 하나의 언어처럼.
김보람 씨는 항상 수첩을 가지고 다닌대요. 지하철이나 어디서나 수첩에 무얼 쓰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했어요. 그때마다 음악들이 이렇게 형상화되는군요. 가까운 지인 분들도 이곡을 보면 알아볼 수가 있나요?
없죠. 어떻게 보면 이것은 저만 알아볼 수 있는 언어고, 세상에요.
춤이 더 궁금해지지 않나요? 김보람 씨 춤을 영상으로 청해볼까요?


‘바디 콘서트(Body Concert)’라는 타이틀로 시작하는 영상이 상영됐다.
이건 2012년에 있었던 ‘바디 콘서트’ 공연이죠?
네.
10분 정도 되는 영상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 있는 글은 직접 쓴 건가요?
영상 중간중간 작품마다 추상적인 의미의 짧은 글이 나온다.
홍보 영상이에요. 춤 좀 팔아보려고(김보람이 머쓱하게 말하자 객석에 앉은 관객이 웃는다).
영상이 끝난 후 이야기를 다시 이어갔다.
영상에도 잠깐 등장했지만, ‘어처구니’라는 말이 있어요. 2009년부터 ‘어처구니 시즌’ 공연을 했죠? 시즌 1, 시즌 1.5, 시즌 2, 시즌 2.5에 파이널까지요.
당시 유행하던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시즌’이라는 말을 썼어요. 그래서 나도 한 번 써볼까… ‘어처구니’라는 말은 어쩌다 보니 제가 무용이라는 세계에 들어와 춤을 추게 됐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어처구니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 말을 제목으로 삼았죠.
현대무용은 누구나 출 수 있는 장르인가요?
‘춤은 누구나 출 수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누구나 출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지금 여기에 계신 분들도 춤을 춰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내가 춤출 수 있나? 집에 가서 확인하셔도 돼요.
약간의 유쾌한 동작을 선보이자 관객이 웃었다.
자기 안에 있는 감성, 그것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춤인 거예요. 모든 것이 다 춤이고요. 작품 역시 마찬가지예요. 무언가 동작을 만들고 그것에 의미를 붙이고 이야기하면 작품이 되겠죠? 자기가 자기 작품에 자신 있으면 누가 몰라줘도 자기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누구나 다 춤을 출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죠.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확신이 있을 때 시작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업하는 과정의 확신이라든지, 하고 싶은 말에 대한 확신이라든지요. 그럴 때 작품을 하고 싶지 않나요?
사실 제가 무용계에 있으니까 ‘작품’이라고 말씀해주는 것이겠지만, 저는 괜찮은 동작을 위해 갈망할 뿐이에요. 그랬기 때문에 작금의 환경에서 아쉬움 없이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춤추고 싶었고, 내가 춤추고 싶은 음악에 춤추고 싶었고요. 사실 춤추고 싶지 않은 음악도 있거든요. 방송 댄스에서 현대무용으로 넘어오게 된 것은 어쩌면 그러한 갈망이 이끈 것이고, 추고 싶은 음악에 표현하는 것, 자유로워진 거죠. 단순한 그런 마음들이 진행되다 보니, 그게 하나의 ‘작품’이 되고, ‘작품’으로서 인정받게 되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더욱 ‘용기’가 필요한 일이에요. 그건. 저 혼자 집에서 춤추다가 심오한 뜻을 담았다고 해서 작품이다 말할 수는 없는 문제니까요. 용기를 심어주신 분이 계신가요?
제가 처음 안무를 한 것은 대학 후배들이 대학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춤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교수님이 저보고 안무를 한번 해보라 하셔서 춤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너무 좋아해줬어요. 저는 그 과정이 좋았어요. 그래서 그들을 위해 또 다른 춤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들의 졸업 작품을 안무해줬죠. 그걸 우연히 페스티벌에 출품했고요. 그 친구들과 또 추억을 만들고 싶었어요. 모두가 행복해했던 것이 큰 용기였죠.
CJ 영페스티벌 최우수상 수상은 그렇게 시작된 기회였군요?
페스티벌에 작품을 낼 의도는 전혀 없었고, 마침 지금 벨기에 무용단에 있는 무용수 김설진 선배가 “너 기왕 만든 거 대회에 출품이나 해봐” 했어요. “될까요?” 그랬죠. 그래도 한번 내봤어요. 예선 통과가 되고 점점 작품이 올라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내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거지 뭐. 했어요. 그런데 그게 결선까지 가게 되고 최우수상을 타게 되면서 저도 모르게 무용계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그 뒤로부터 어처구니 시즌을 만들기 시작하고, 안무를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지게 됐죠.
그 후로 많은 평가를 받게 됐죠. 굵직한 상들도 받아왔고요. 평가 안에 본인의 어떤 면이 인정되고 있다고 생각했나요? 질문이 이상한가요? 그럼 다시 할게요. 굉장히 많은 상을 받으셨어요. 어리둥절하지는 않았나요?
굉장히 많이…는 아닌데요. 상은 받긴 받았죠. 연고 없이 이곳에 와서 갑자기 여러 곳에 오르게 됐는데요. 사실 저에게 상은 목적은 아니었고, 함께 하는 무용수 친구들과 모여서 무언가 만드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다행히 제가 안무가라서 그 친구들에게 요구할 수가 있고, 뒹굴면서 무언가 만들어갔던 거죠. 저는 그것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건 확실해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나 열심히 한 일에 대한 보상 같은 거였죠. 저랑 함께 했던 친구들은 무용을 뛰어나게 잘했던 친구들도 아니고, 이렇게 모이지 않았더라면 무용을 그만뒀을 친구들도 많았어요. 그래서 더 모일 수가 있었죠. 절대 하나만은 지지 말자는 결의로요. 어떤 사람들보다 열정 하나만은 지지 말자 했죠. 그런 마음가짐으로 매번 작품을 만들었어요. 그랬더니 다행히 상을 계속 받더라고요. 운이 좋았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함께 한 친구들이란,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죠? 김보람 씨는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라는 무용단을 운영하고 있어요. 뜻이 ‘애매모호한’이에요. 왜 팀명을 ‘앰비규어스’로 지은 거죠?
뭐… 저희 새벽 연습이 끝나고 아마… 술을 먹었을 거예요. 학교 앞에 살고 있는 친구 집으로 모여 갔죠. 거기에 영어사전이 있더라고요. 영어사전을 쭉 보는데 그 단어가 있었어요. (모두가 웃는다)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걸로 팀을 만들자. 그래서 그냥 그렇게 쓰게 됐어요.
김보람 씨를 뵈니 거침없고, 자유분방하고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분으로 보입니다. 저희가 지난주, 그리고 방금 전까지도 만나 긴 이야기를 나눴잖아요. 그중에 인상 깊었던 건 스스로를 ‘사회 비판적이다’ 했어요.
사실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사실 낯가림도 심하고,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것도 잘 못하고요. 성격이 그래요. 그래서 아마도 어려서부터 혼자 생각을 많이 했을 거예요. 혼자 영화도 많이 보고요. 무엇을 볼 때 늘 유심히 보는 편이에요. 어렸을 땐, 조기교육을 잘 받아(멋쩍게 웃는다) 텔레비전을 많이 보면서 춤을 췄어요. 유심히 보는 것은 방송 댄스나 무용, 사람들을 잘 관찰했어요. 세상도 관찰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다들 아시겠지만, 세상… 뭐가 잘못됐다는 느낌들이 조금씩 있잖아요. 그런 것을 보다 보니, 마음 한쪽에 늘 그런 느낌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뭐가 잘못됐고, 틀렸다.’
클래식 음악에서는 ‘긍정’의 사고가 더 나은 아름다움을 끌어내곤 하죠. 발레도 마찬가지이겠고요. 알 수 없는 더 나은 아름다움을 향해 감정을 끌어간단 말이죠. 그런데 ‘사회 비판적인 시각’은 예술가를 비롯해 모든 창작가들… 학자에게까지도 ‘긍정’보다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의 시각으로 작용할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니요. 저도 처음에는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뭔가 사람들을 열 받게 하는 작품?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저는 엄청 부정적이기 때문에. 매일같이 고민했죠. 어떤 음악으로 춤을 춰야 그런 느낌이 날까. 거기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요. 2010년 바디 콘서트를 마치고 얼마 안 되어서였어요. 어떤 음악을 만났어요. 그 음악은 베토벤의 ‘비창’이었는데,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베토벤 씨(?)가 귀가 안 들리기 시작했을 때 그 음악을 썼다고 하더라고요. 음악을 듣자마자 뭔가 느껴졌어요. ‘이 사람은 음악가인데 귀가 들리지 않으니, 세상이 얼마나 뭣 같을까.’ ‘근데 어떻게, 왜 이런 음악을 만들었지?’ 오랫동안 비판적인 주제로만 표현하려고 생각을 몰두하다가 이 음악을 듣고 난 뒤, 완전히 바뀌었어요. 뭔가 저를 막은 것 같았어요. 그러지 말라고. (손바닥을 바닥으로 내리며) 춤은 그런 데 쓰는 거 아니라고… 그래서 아름답게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순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예술은…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주나 봐요?
김보람은 눈을 감고 손을 짧게 들어 올려 대답한다.
지난해 9월호 ‘객석’에 김보람 씨의 인터뷰가 나갔어요. 그때 이런 말을 했죠. “과학자와 안무가는 인류를 위해 일한다는 점에서 같다.” 좀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사실 제가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재작년에 만든 ‘플랑크 타임’이라는 작품 때문이에요. 플랑크 타임은 빅뱅이론에 사용되는 시간 단위인데요. 우주가 생겨난 시간의 단위라고 해요. 엄청나게 작은 단위더라고요. 그래서 가정을 해봤어요. 사람이 일생을 사는 게 1초라면, 우리가 오늘 만나 공연을 함께 보는 것은 1플랑크 타임이다. 이 작은 시간 안에 우주도 생겨나는데, 사람들도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 모른다. 한 다큐멘터리에서는 과학자에게 묻더라고요. 왜 과학을 하느냐고요. 그러자 그 과학자가 대답했죠.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한 문제를 풀어낸다”고요. 그리고 한 문제를 푸는 일은 다섯 문제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끝이 없다는 거죠. 저는 춤을 추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어요. 무언가를 만들어내면 거기서부터 나오는 이야기가 더 많아져요.
그런 면에 있어서 연구자라는 의미와도 같네요?
그렇죠.
춤을 어떠한 연구의 대상으로 보시나요?
그게 사실 항상 연구하지만…(말을 멈춘다).
질문이 이상한가요?
잠깐 트림이 나와서…‘홀딱’ 깬다! (다 같이 웃음) 연구하는 건 맞아요. 모르겠어요, 춤을 잘 추기 위해서 연구한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같이 살기 위한 연구를 한다는 게 맞겠네요.
춤을 가르칠 생각은 없으세요?
저 스스로가 가르치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귀찮을 수도 있고, 게으를 수도 있고요. 누구에게 가르쳐준다는 건 맞지 않는 표현 같아요. 같이 하는 거죠. 그 표현이 맞는 거죠. 가르쳐주는 것은 서로한테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와 함께 춤을 추고 싶다면 할아버지든 할머니든 함께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뭘 배우기 위해서 학원을 간다? 뭔가 부자연스러워요. 뭔가 의도적이고 계산적인 것 같아요. 그래서 싫어해요.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에서도 실상 가르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가요?
그들은 사실 4, 5년 꾸준하게 함께 작업을 지속해온 친구들이에요.
그럼, 반대로 그들은 밖에 나가 춤을 가르치지는 않나요?
아니요.
춤을 추는 사람들이 춤을 안 가르친다고요?
사실 그들도 저랑 같이 비주류예요. 돈 버는 일은 아르바이트로 따로 하죠. 춤을 추러 저한테 오는 친구들이에요. 저희가 함께 추는 이 춤이 사실 무용계에서 살아남는 춤은 아니에요. 춤을 보통 배우거나 가르친다고 하면 스트레칭, 정해진 동작 등을 가르치잖아요. 사실 저희가 추는 춤은 그건 아니거든요.
리더십이 있으신가요?
뭐… 저한테 리더십이 있는 것 같진 않고요. 그건 있겠죠. 춤을 함께 생각하는 것? 같이 무엇을 만드는지 아는 것? 아, 그런 것 같네요.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 함께 하는 것이요.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움직여도 뭔가 알고 움직이면 다르거든요. 기분 좋은 일이죠.
김보람 씨가 이끌고, 비주류에 속한다는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가 해외 페스티벌 참여도 많이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사실 엠비규어스댄스컴퍼니는 지난해 여름을 기점으로 그만두자는 결의를 했어요. 저는 그곳의 대표이고… 개인적으로는 무용계에서 상도 받고 안무가라는 이름도 불러주는데, 중요한 건, 저와 함께 한 무용수들이 4년 동안 한 명당 백만 원을 벌었나? 말도 안 되죠. 6개월 동안 매일같이 밤새서 연습하고 30만 원을 받고요. 차비도 안 되는 가격이죠. 저 스스로 잘못됐다고 생각했어요. 좋은 작품을 하고,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는 것도 좋지만, 이런 현실 속에서 춤이 좋다고 그 친구들이 온다는 게 저 스스로 용납이 가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 그만두자. 기분 좋게. 너희도 하고 싶은 것 도전해 봐.” 그래서 그만뒀죠. 그런데 저는 계속 해요. (다들 웃는다) 이 친구들한테 그런 약속을 했어요. 너희들도 너희 할 것 하면서 언제든지 같이 (선글라스를 벗는다) 하고… 나도 너희들이 없는 동안 당당하게 너희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있을게. 그래서 저는 뭔가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대표가 될 수 있을까. 같이하는 친구들이 차비·밥값·집세를 낼 수가 있을까.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저는 못 먹는다 해도, 저랑 같이 하는 사람들까지 그렇게 되면 안 되잖아요.
선글라스를 벗었어요. 편해지셨나 봅니다. 돈이랑 예술, 따로 떨어뜨려서 생각을 하면서 살죠?
저 돈 엄청 좋아하고, 부자들을 보면 부럽고 그래요. 그렇다고 제가 지금 하는 일을 돈 때문에 바꾸고 싶지는 않고요. 돈이 많은 게 부럽지, 그 사람의 삶이 부럽지는 않거든요. 그리고 딱히 돈 벌 데도 없고요.
경제 활동 안 하잖아요.
모든 걸 쏟아내도 뭘 하나 만들어내는 시간은 부족하거든요. 제 밥 먹고 작품할 시간 줄여 관객들 앞에 어떻게 당당할 수 있겠어요.
해외에서 인정받는 안무가와 국내에서 인정받는 안무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해외를 다녀오면 좀 다르겠지,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얼마 전에도 독일·스페인 다녀왔는데 좋은 결과는 없었고, 스페인에서는 관객상을 받기는 했지만 사실 많이 실망을 하고 왔어요. 외국은 관객들의 문화는 굉장히 높아요. 그런데 예술계의 흐름은 비슷한 것 같더라고요(암암리에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관객은 모두 작금의 예술계 부조리를 떠올렸다).
슬픈 이야기네요. 우리 춤, 출까요?
네, 다 같이 춤추려고 모이셨지요?
김보람 씨와 함께 활동하는 장경민 씨가 이 자리에 와계실 거예요.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의 무용수이자, 안성수 픽업그룹의 단원으로 계시는 장경민 씨를 이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모두 뒤를 돌아보자,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장경민이 등장했다)
네, 안녕하세요. 장경민입니다. 김보람 씨와는 대학 선후배 사이고요. 10년 동안 같이 춤을 춰왔습니다.
장경민과 김보람이 약 10분 동안 춤을 가르쳐줬다. 아니, 함께 했다.
김보람이 들려 준 음악은 파올로 누티니의 ‘뉴 슈즈(New Shoes)’.
두 사람이 방에서 구상해온 안무라고 했다.
갤러리 천정에는 미러볼이 돌고, 모두 춤을 췄다.
십 분 후, 장경민이 퇴장한다.
재밌네요. 이 음악에만 출 수 있는 춤인가요?
뭐, 어떤 음악에도 상관없죠.
음악이 먼저인가요, 춤이 먼저인가요?
아까 같은 경우도 춤이 있어 가사를 이해하기가 편하시잖아요. 그건 곧 음악 안에서 그 춤이 나왔다고 할 수 있겠죠. 우열을 가리기보다는 같이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평범한 저희들은 음악을 만나기도 힘들고, 고르기도 힘들어요. 음악을 듣는 취향이 있으세요?
음악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듣는 편이에요. 록·힙합·클래식 등이요. 사람은 감정에 따라 음악을 듣죠. 그건 음악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심정을 대변해줄 무언가를요.
그래도 애호가가 되기까지는 굉장히 어려운 여정이 있어요. 김보람 씨도 경험하셨나요? 가령 무용 공연이요.
졸렸죠. 졸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좋았던 작품들이었어요. 그래도 졸렸단 말이죠. 하지만 재미가 없어도 보러 다녀요. 우리가 꼭 재밌는 것만 보고 들을 필요는 없잖아요? 뭔가 찾아가는 행위가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가치를 찾고 취미 생활을 가져보는 것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뭔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어요. 집에서 TV를 보는 것보다 낫잖아요. 텔레비전은 너무 재미있어요. 허무함이 남고요. 그래서 전 안 봐요.
네… 저희 바로 앞에 KBS에서 오신 문창수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한데요.


(촬영을 하던 문감독이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로 말하길) 저도 TV 잘 안 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지금부터는 ‘홀딱’의 백미, 다시 쓰는 바이오그래피를 만들어야 할 시간이네요. 저희가 알고 있는 프로필들은 식상하죠. 다시 써라! 하고 생겨난 코너입니다.
제가 질문을 하면 짧게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김보람은 1983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났다. 대신, 김보람은 왜 태어났다.
뭐, 저희 부모님이 결혼하셔서 태어났죠.
김보람은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방송댄스팀 ‘프렌즈’에서 활동했다 대신, 무엇이 나를 춤추게 만들었다.
욕심이죠. 지기 싫어하고요. 방송에 비치는 스스로를 보면서 원망했어요. 뭐가 그렇게 신나서 웃으며 열심히 춤을 추고 있는 걸까. 잘 추자.
2008년 CJ 영페스티벌 최우수 작품상, 2009년 춤 비평가상 연기상, 2010년 평론가가 뽑은 젊은 안무가 최우수 작품상, 2010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서울 댄스 컬렉션 최우수 작품상 수상 대신, 나에게 상이 아닌 벌은 이것이었다.
작품은 어떻게 보면 자식과도 같아요. 나의 모든 에너지와 열정을 쏟아서 만들어내는 거니까요. 3년 동안 여기저기서 신작 요청을 받아 열 개의 안무를 했어요. 그런데 이러한 작품 활동은 어떻게 보면 아이만 낳아놓고 내버려두는 거죠. 그 작품마다 이야기라는 것이 있는데 말예요. 제 작품으로 알고 있지 못해요. 아무도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네 작품을 하라고요. 다들 새로운 걸 하래요. 돌아보면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식들한테요. 그래서 더 이상 신작을 안 해야겠다는 다짐도 하고요.
이 이야기… 평론가들은 귀담아 들어야겠어요.
뭐든 기대하잖아요. 기대에 부응하는 게 저는 싫어요. 그 자체만을 봐줬으면 좋겠어요.
네. 창작가의 고충이 느껴집니다.
다음 질문 할게요. 내 인생에서 최고의 칭찬은 이것이다.
전 다른 분들의 칭찬 좋아해요. 그리고 가끔 스스로도 칭찬해요. ‘난 내가 잘하고 있는 거’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나는 현대무용가, 안무가다” 이 말 대신 할 수 있는 말은요?
지난해부터 묻고 있어요. 너는 누구냐… 저도 되게 궁금해요.
이날 갤러리 정미소 바닥은 정재욱 작가의 ‘흩어진 시간’이 석고로 뿌려지고, 정주리 작가의 흙 건물이 아래로 무너지고 있었으나 우린 ‘상실’을 경험하지 않고, ‘황홀’을 느끼고야 말았다.

글 정우정 기자(wjj@) 사진 심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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