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수 홍신자

춤의 개혁을 이끈 순례의 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6월 26일 12:00 오전

홍신자에게는 ‘1세대 전위 무용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지난 4월 9일, 서울 원서동의 옛 공간 사옥 지하 공간 소극장에서 무용수 홍신자의 공연이 있었다. 홍신자의 춤을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이 공간 소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공연 티켓은 매진됐다. 한 달 뒤, 우면산의 푸른 초목으로 둘러싸인 예술의전당에서 홍신자를 만났다.

나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춤추듯 순간을 살았다.

– 홍신자의 ‘자유를 위한 변명’ 중

우연은 운명이 되다

홍신자는 1940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났다. 보수적인 시골 양반집에서 ‘여자’로 태어난 그녀는 행동거지를 억압받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집과 동네, 나라를 떠나면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집안 어른들의 뜻과는 반대로 방랑의 싹을 키운 것이다.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에 영어를 배웠다. 숙명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1966년에 드디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실컷 살고 싶던” 그녀에게 미국은 자신의 열망을 불태울 수 있는 희망의 나라였다. 미국에서는 그 당시 생소했던 호텔경영학을 공부했는데, 노골적일 만큼 세속적인 전공명에 호기심을 느꼈다고 한다.

춤은 숙명적으로 다가왔다. 현대무용을 구경조차 못해본 홍신자가 우연히 알윈 니콜라이(Alwin Nikolais)의 전위무용을 본 것이다. 무대, 조명, 리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끌어안은 춤이었다. 전율에 사로잡힌 홍신자는 자신이 지금껏 자유롭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표현하지 못한 욕망 때문이었다. 온몸으로 모든 것을 분출하는 알윈 니콜라이의 춤을 본 순간, 앞으로 자신도 고통의 파편을 춤으로 표출하리라 결심했다. 홍신자가 미국으로 건너간 지 1년 만에 생긴 일이다.

‘어려운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다르다. 홍신자에게 스물일곱의 나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하기엔 그녀의 열정이 젊었기 때문이다. 홍신자는 호텔경영학을 관두고 알윈 니콜라이 문하로 들어갔다.

8년 동안 운동선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육체적 고통을 감내했다. 춤을 위해 굳어 있는 근육을 찢었고,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홍신자는 무용에만 집중했으며,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무용과 석사와 유니언 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를 취득했다.

개념을 깨부순 춤

홍신자는 1973년 3월에 첫 안무작 ‘제례’를 무대에 올렸다. ‘제례’는 전통적 곡소리를 내는 것으로 시작해, 장사를 지낼 때 일련의 의식을 변형시켜 구성한 무용이다. 인생의 3분의 1을 병석에서 지낸 친언니의 한스러운 생애를 무용으로 풀고 싶어 만든 작품이었다. 깊은 한이 밴 몸짓에 많은 사람이 울었다. ‘뉴욕타임스’지와 ‘댄스 매거진’에 호평이 올라왔고, 홍신자는 무용수로 화려한 데뷔를 했다. 뉴욕에서만 ‘제례’로 스무 차례 이상을 공연했다. 그해 9월, 국악인 황병기의 주선으로 ‘제례’는 국립극장에서 공연했다. 한국 관객은 기존과 다른 춤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평론가 조동화와 박용구는 홍신자의 춤을 극찬했다. 새로운 역사는 기존의 관념을 깨부술 때 탄생한다. 홍신자는 한국무용사에 새로운 길표를 제시했다. 그녀는 한국에서의 ‘제례’ 공연 이후 다시는 그 작품을 공연하지 않았다. 절규와 죽음을 강렬히 쏟아낸 탓에 그 감정을 다시 꺼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 떠난 순례의 길

성공은 갑작스럽게 찾아왔지만, 작품 활동을 이어갈수록 춤에 구멍이 생긴 느낌이었다. 인정받으려는 목표 때문에 맹렬히 질주했다. 그러자 춤이 오히려 자신을 구속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홍신자는 1976년 인도로 떠났다. 라즈니시 만디르(Rajneesh Mandir)의 제자가 되어 세속과 담쌓으며 명상을 했다. 춤은 순수한 상태로 흐름에 몸을 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3년간의 인도 생활은 다시 춤을 출 수 있는 용기와 인생에 관한 해답을 알려줬다. 홍신자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고, 존 케이지와 백남준 같은 현대 예술가들과 협업했다. 고국의 흙냄새가 그리웠던 그녀는 한국을 다시 찾았고, 웃는돌 무용단을 설립했다. 이후 죽산에 머물며 저서 ‘자유를 위한 변명(1993)’을 발간했는데,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홍신자를 만나기 위해 죽산을 찾는 사람이 늘었고, 홍신자는 웃는돌 무용단과 함께 ‘죽산국제예술제’를 개최했다.

70세의 나이가 되던 2011년, 그녀는 독일인 한국학 학자 베르너 자세(Werner Sasse)와 재혼했다. 제주도에서 혼례를 올린 두 사람은 사람들의 걸음이 뜸하고 흙내 가득한 안성에서 명상하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홍신자는 자서전 ‘자유를 위한 변명’에서 인생의 마지막 스승은 자연이라고 했다.

그저 하루 종일을 하늘이나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만 보고 있어도 완전한 깨달음이 오는 것 같다. 자연이야말로 스승이요, 구루요, 자신을 정확히 비쳐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스승은 필요하지 않다. 자신이 비록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 할지라도 그 스승의 넉넉한 품 속에 남아 있을 수 있으니까. 지상의 모든 스승은 떠날 수 있지만, 그리고 떠나야 하지만, 자연이란 절대적인 스승은 결코 떠날 수 없다.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야 한다.

– 홍신자의 ‘자유를 위한 변명’ 중

선각자의 길을 걸어온 홍신자. 그녀가 원하는 것은 존경과 탄성이 아니었다. 순수한 춤과 자유를 향한 갈망이었다. 홍신자는 처음 뉴욕에 갔을 때 소극장 공연을 보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 초심을 회고하며, 작은 공간에서 춤을 추며 여생을 보낼 것이다.

홍신자가 천천히 발을 옮기면 움직임이 흐른다. 이윽고 춤이라는 발자국이 아름답게 남는다. 그녀의 춤은 궁극적으로 자유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몸짓이다.


▲ 4월 9일 공간소극장에서 공연한 홍신자의 ‘벽’(2000)

무용수 홍신자와 평론가 이순열

춤추는 자와 보는 자, 그 사이에 흐르는 감동

이순열(1935~)과 홍신자(1940~)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온 우리 예술계의 살아 있는 역사다. 홍신자의 춤, 더불어 우리 시대 예술에 대한 두 사람의 이야기

홍신자의 안무작을 처음 봤을 때, 어떤 인상을 받으셨나요.

이순열 예술은 흔히 접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즉 우리네 일상과 다른 가공과 창조의 세계라고 할 수 있어요. 새로움이 없고 틀에 박힌 예술 때문에 늘 안타까웠는데, 1990년대 초 홍신자의 ‘네 개의 벽’을 보고는 우리가 생각하는 무용의 일상적 관념과는 다른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공연이었죠. 그때 처음으로 리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청탁 없이 그런 충동을 받은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마쓰오 바쇼의 시 중 이끼 낀 연못에 개구리가 뛰어들어 첨벙 빠지는 소리, 그 울림이 주는 여운을 표현한 시가 있어요. ‘네 개의 벽’이 그런 느낌이었죠. 스쳐 지나가는 춤이 아니라 되새김질해보고 싶은 작품이었습니다.

홍신자 ‘네 개의 벽’은 1944년에 발표한 존 케이지 동명의 곡을 안무로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1985년 뉴욕에서 초연했고, 공연마다 내용과 피아니스트가 달라졌어요. 전체적 흐름은 유지하지만, 동작은 계속 변했죠. 늘 똑같은 춤을 추면 신선하지가 않거든요. 춤을 추다가 새로운 동작이 나오면 ‘진짜 춤’을 추는 것 같아요.

미국으로 유학을 갔을 시기에 우리나라 문화와 예술 현장은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홍신자 1966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당시에는 무용을 안 했으니 우리나라 예술 환경은 잘 모르겠어요. 다만 이 땅에는 여성에 대한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미국을 비롯한 서부 대륙에는 여성에게도 자유가 있었죠. 탈출하고 싶어 미국행을 결심한 겁니다.

이순열 1960~1970년대를 ‘잡초 시대’라고 합니다. 황지에서 잡초들이 조금씩 솟아나고 있었어요. 잡초가 쓸모없다고 생각하지만, 식물학자들은 잡초가 우거지면 땅이 비옥해지고 식목이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숲이 되는 거죠. ‘잡초 시대’가 분명 우리나라 예술에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에 곧은 나무로 성장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식목을 했는가에 대해선 항상 회의적이죠.

한국의 안무가들이나 무용수들이 해외 활동을 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입니까.

홍신자 걸림돌은 없어요. 예술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말하는 겁니다. 뉴욕에서 활동했던 1960~1970년대는 동양인이 적어서 지금보다 대중의 관심을 쉽게 받을 수는 있었겠죠. 오히려 지금은 서양과 동양을 따지지 않으니 작품으로만 승부하면 됩니다.

뉴욕에서 활동할 때 힘든 점은 없었나요.

홍신자 재정적인 문제가 컸어요. 경제적으로 도움 받을 곳이 없었습니다. 창고만 한 소극장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영감을 받았어요. 큰 무대에서 공연하는 사람들보다 소극장에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춤추는 모습이 훨씬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외국에서 활동하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대중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홍신자 박용구 평론가가 많은 힘을 줬습니다. 주요 매스컴에 ‘하나의 핵이 떨어졌다’며 좋은 평을 해주셨죠. 그 영향으로 대중의 열광적 반응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무용계의 반응은 싸늘했어요. 제가 한국무용계에 뿌리를 둔 사람이 아니라서 스승과 동료, 제자가 없었습니다. 서로 간에 동료 의식이 없었던 거죠. 게다가 제 춤은 당시 한국무용계 동향과 굉장히 달라서 찬반 대립이 있었습니다. 찬반 논란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그 계기로 더 자극받고 에너지가 생겼거든요.

지금의 예술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홍신자 보편적으로 무용은 30대면 수명이 끝난다고들 합니다. 저는 70대가 돼서야 무대 위에서 성숙함을 느꼈습니다. 이전까지는 무대에 올라가서 이것저것 다 시도해봤죠. 저처럼 무용을 늦게 시작하더라도 몸 트레이닝은 10년이면 완성할 수 있어요. 몸이 훈련된 후에 5년에서 10년 정도 지나야 하고 싶은 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때 기능적 부분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죠. 그러려면 예술과 생활이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순열 예술은 연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찮은 것에서 새로운 세계를 꽃피우는 것이 바로 예술입니다. 화학에서의 연금술처럼 무수히 많은 열을 가하고 여러 과정을 거쳐 마침내 도달하는 것이 예술이죠. 생감을 따서 주무르면 물러서 터져버리잖아요. 익을 수는 있지만 맛은 없죠. 세월, 바람, 온도가 어울려서 새로운 차원으로 변성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당장 주물러서 억지로 예술을 만들려고 하니까 어설픈 거죠.

한 우물을 파라고 흔히들 이야기하는데, 물이 없는 곳을 100년 동안 파봤자 물이 나오나요. 고인 것이 있어야지 물이 솟죠. 작품을 만들겠다며 물줄기가 없는 곳을 박박 긁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슴속에 받아들이고, 고이고 고여서 마침내 그 물줄기가 터져 나와야 합니다. 스쳐 지나가는 소리, 개울물 흐르는 소리, 달빛 쏟아지는 고요한 밤… 이런 것들을 가슴속에 전부 스며들게 해야 돼요. 감각세포를 예민하게 하는 ‘수용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예술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테크닉만 부각되는 것이죠. 테크닉은 수단일 뿐인데, ‘테크닉 전시회’로 예술이 변질되고 있습니다. 흔히 외국어를 배울 때 문법은 배우고 나서 잊어버리라고 하잖아요. 테크닉도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야 합니다. 테크닉만 부각하면 예술이 아니라 서커스죠.

홍신자 맞습니다. 테크닉은 보이지 않아야 돼요.

우리나라 예술계에서 홍신자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홍신자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생각하고 싶지도, 내세우고 싶지도 않고요. 하고 싶은 것과 해야 되는 것을 그저 충실히 하면 저절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이순열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시게티(Joseph Szigeti)는 말년에 수전증이 생겨 매끄러운 연주를 못했어요. 연주가 끊기고 이어지고 그랬는데, 그 연주가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멈춤과 느림, 침묵 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제프 시게티의 연주를 ‘늘주’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무용에도 ‘늘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늘무’를 보여준 사람이 홍신자죠.

우리 시대는 ‘배설 시대’입니다. 온갖 곳에 배설물이 걸러지지 않고 쏟아져서 난무하는 시대예요. 정화된 맑은 샘이 없을까 생각하던 중에 오랜만에 홍신자의 춤을 다시 봤습니다. 형태를 초월한 것에 가장 접근한 춤이었죠. 목욕을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배설물과 요설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맑은 흐름이 있는 홍신자 춤에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침묵’ 속에서 위대함이 탄생한 거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묵욕(默浴)’입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묵욕’을 통해 가능하지 않을까요.

사공도(司空圖)의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에 ‘부저일자(不著一字)’ ‘진득풍류(盡得風流)’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글자도 쓰지 않았는데, 풍류가 가득 넘쳤다는 뜻이에요. 아직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았는데, 풍류가 넘쳐흐르는 것이 바로 홍신자의 춤입니다.

사진 심규태

평론가 이순열

1935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난 이순열은 라디오 방송과 여러 공개강좌를 통해 40년 이상 음악 해설자로 활동했다. ‘객석’ ‘조이 클래식’ ‘월간 오디오’ ‘그라모폰’ 등 국내 음악 잡지와 신문에 꾸준히 음악과 음반 평론을 기고해왔으며, 한국예술평론가협회장과 ‘음악동아’ 편집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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