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가곡의 명가수들

백 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독일가곡 연주의 역사를 장식한 대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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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0월 9일 11:5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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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도이치 그라모폰 음반사는 레코딩 역사 한 세기를 기념하는 컬렉션의 일환으로 ‘초기 시대의 위대한 목소리들’이란 5장 분량의 CD 선집을 발매했다. 그중 한 장이 리트(독일가곡)에 할당되어 있다. 1927년부터 1941년에 이르는 리트 녹음 중에서 발췌되었는데, 여기 수록된 아홉 명의 가수를 살펴보면 오페라 쪽에서 유명한 이름도 있지만 역사적 리트 가수로 오래도록 남을 이는 바리톤 하인리히 슐루스누스 뿐일 듯싶다. 왜 그러한가? 몇 년 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리트 연주사를 빛낸 엄청난 성악가가 출현했고, 리트 가창법의 완벽한 규범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독일가곡의 규범’이 된 피셔디스카우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그 압도적인 주인공은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Dietrich Fischer-Dieskau, 1925~2012)다. 마리아 칼라스의 경우는 거의 모든 오페라 팬이 사랑하는 소프라노인데도 ‘소프라노의 교과서’라고 불리지 않는다. 워낙 독특했고, 상식을 뛰어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피셔디스카우는 그렇지 않다. “리트는 이러저러하게 불러야 바람직할 것이다”하는 이상을 그대로 들려준 존재다. 피셔디스카우를 잣대로 그 이전과 이후의 모든 리트 가수들을 평가할 수 있을 정도다. 그는 베를린 태생의 뼛속 깊은 독일인이다. 11세에 지휘 콩쿠르에 입상하고 15세에 바흐 칸타타에 대한 논문을 쓴 음악 영재이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다방면의 경지에서 전문적 경지에 도달했고, 음악학자로서 10여 권의 전문서적을 집필했으며, 지휘자와 반주자, 심지어 화가로도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 독일어 가사를 내면까지 깊이 이해하고, 독일 음악다운 지성과 격조를 불어 넣기에 최적화된 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목소리 자체도 리트에 맞았다. 본인 스스로도 “나는 머리, 몸통, 가슴 세 부분의 소리를 혼합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신중하게 제어함으로써 세 부분을 각기 사용하는 가수보다 노래에 색채감을 더할 수 있었다”고 자부했다. 바리톤이면서도 고음에 능한 미성이었다는 점 또한 장점이다. 성량이 큰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페라처럼 목소리를 자랑하듯 부르는 법은 없었고, 정교하게 계산된 바에 따라 독일어 특유의 파열음조차도 아름답게 들리도록 만드는 신비로운 힘이 있었다. 전문 성악가의 길을 걸은 것은 23세인 1948년부터인데, 마침 LP가 등장하는 시점이었다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하지만 ‘리트의 제왕’처럼 여겨졌던 피셔디스카우도 절대적인 사랑만 받은 것은 아니다. 반세기 가까이 너무 오랫동안 리트 연주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바람에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식상한 매너리즘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너무 음반이 많고 방송을 많이 탄 결과, 피셔디스카우의 노래는 몇 소절만 들어도 누가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미덕으로 꼽혀온 드높은 지성, 잘 통제된 미성, 천변만화하는 표현력, 그러면서도 한결 같은 절제력, 작은 오차조차 허용하지 않는 리듬과 음정의 정확성 등등이 오히려 너무 기계적이라는 말까지 듣게 된 것이다. 피셔디스카우 입장에서는 억울한 부분이지만 그렇다고 ‘리트 가창의 교과서’로서 그의 위상까지 흔들린 것은 아니다.

제라르 수제

피셔디스카우보다 윗세대로서 녹음을 남긴 바리톤 중에는 하인리히 슐루스누스(Heinrich Schlusnus, 1888~1952)와 게르하르트 휘슈(Gerhard Husch, 1901~1984)가 중요한데, 이중 현대적 관점으로는 휘슈 쪽이 더 독일 정통파의 원조에 해당한다. 미성의 바리톤이었고, 그런데도 무척 엄격한 해석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제자도 많이 길러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 개인적으로는 프랑스 바리톤인 제라르 수제(Gerard Souzay, 1918~2004) 쪽에 더 손이 많이 간다. 활동 시기가 피셔디스카우와 겹치는 부분이 많은 수제는 노래하는 방식에 있어서 독일 가수들과 크게 다르다. 독일어 발음이 명료하게 들리지 않고 우물거리는 듯싶지만, 그러면서 오히려 우아한 향취가 담겨 있다. 그래서 마치 프랑스화된 독일 음악을 듣는 기분이 된다.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한편 리트는 여성보다는 남성 성악가를 위한 장르로 여겨져 왔으므로 여성 리트 가수에 대한 평가는 박한 편이다. 그래도 늘 애호가들이 놓으려고 하지 않는 추억의 옛 가수는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Elisabeth Schwarzkopf, 1915~2006)다. 사실 슈바르츠코프는 지성과 정확성보다는 나른한 감성이 두드러지는 가수다. 하지만 ‘오페라계의 백작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알 수 있듯이 리트조차도 굉장한 우아함으로 포장할 줄 알았고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슈바르츠코프가 돋보이는 부분은 슈베르트, 슈만보다는 후기 낭만파의 후고 볼프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쪽인데, 어쩌면 세기말의 암울한 정서가 슈바르츠코프를 통해 독특한 미감으로 변형되어 나타나기 때문인 것 같다.

 

독일가곡의 황금기를 장식한 명가수들

헤르만 프라이

피셔디스카우의 등장 이후 리트 연주 역사상 최고 황금기가 펼쳐진다. 피셔디스카우와 같은 베를린 태생인 바리톤 헤르만 프라이(Hermann Prey, 1929~1998)도 이에 일조했다. 지극히 지성적인 장르로 리트를 받아들이는 애호가라면 낙천가처럼 보이는 프라이가 이 세계에서 거둔 성공은 불가사의에 가깝다. 하지만 슈베르트가 그의 노래를 들었다면 어떨까? 이지적이라기보다는 순수했고, 우울하지만 기분파이기도 했던 슈베르트는 프라이의 천진난만하고 숨김없는 스타일을 더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리트는 독일 민요와도 일맥상통하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프라이의 표현 방식은 놀랍다. 이웃집 총각의 순진함을 사랑에 고뇌하는 젊은이의 연민으로 바꿔버리고, 그 연민을 길 떠나는 겨울나그네의 슬픔으로 단번에 승화시킬 수 있는 감각은 프라이 아니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슈베르트가 친구들과 진행한 ‘슈베르티아데’의 이름을 딴 일련의 프로그램을 창설하고 슈베르트의 노래를 더욱 널리 알리고자 분투한 프라이의 행보도 높이 사야 한다.

프리츠 분덜리히

바리톤이 아닌 테너 중에도 굉장한 리트 대가가 등장한다. 프리츠 분덜리히(Fritz Wunderlich, 1930~1966)는 그중에서도 엄청났다. 오페라 가수로 크게 성공하고 그 외에는 종교음악을 가끔 부르던 분덜리히는 뒤늦게 31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콘서트에서 리트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페라처럼 리트를 부른다는 악평이 쏟아졌다. 이때 빛나는 음성의 분덜리히는 리트를 위해 자신의 장점을 희생시키지 않았다. 피아니스트 후베르트 기젠의 조언을 받아 엄숙주의가 아닌 그야말로 아름다운 미성을 십분 살린 전혀 다른 스타일의 리트를 노래한 것이다. 물론 분덜리히의 해석은 지금 들어도 정통파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노래에는 분분한 지적을 모두 덮어버리고도 남을 감동이 있다. 해석의 감동이 아니라 인간 음성이 안겨주는 원초적인 감동이다. 리트의 처음과 끝은 시의 해석에 있다는 관점은 분덜리히 앞에서만큼은 조금 희미해진다.

사고로 요절한 바람에 많은 녹음을 남지 못한 분덜리히에 대한 아쉬움을 풀어준 테너로는 동독 출신의 페터 슈라이어(Peter Schreier, 1935~)를 꼽아야 한다. 슈라이어의 특징은 명확하다. 엄청난 미성인데도 모든 음악적 표현력을 정교하게 통제하는 점에서 경이로운 지성미까지 느껴진다는 점이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수준도 완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라이어의 리트에서의 평판이 그 성과에 상응하는 만큼의 주목은 받지 못하는 듯 보여서 아쉽다.

 

우리 시대의 리트 가수들

이안 보스트리지

좋은 리트 가수들은 이후로도 계속 출현해 왔지만 지면상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고, 현재 현역에 준하는 가수 중에서 몇 명을 꼽아보고자 한다. 영국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Ian Bostridge, 1964~)는 혜성과 같이 나타나더니 지금도 여전히 가장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리트가 게르만 민족의 예술가곡이란 것에 집착하는 애호가 계층에서는 보스트리지의 독일어 발음이 어색하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그는 역대 어느 성악가보다도 세심하게 가사에 집중한다. 다만 지나치게 예민한 성격이 노래에도 드러나는 바람에 너무 날카롭거나 신경질적으로 들릴 때도 있다.

게르만 민족처럼 학구적인 면이 강한 영국인들이 리트에 강점이 있다는 사실이 보스트리지를 통해 확인되면서 동년배의 영국 테너 존 마크 에인슬리(John Mark Ainsley, 1963~)의 존재감도 크게 부각되었다. 하지만 보스트리지의 아성을 위협하는 듯했던 에인슬리는 충분한 녹음을 남기지 못한 상태에서 백혈병 진단을 받아 아쉽게도 지금은 무대를 떠난 상태다.

마티아스 괴르네

본고장 독일에서는 연이어 등장한 혜성 같은 리트 가수 중에서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Matthias Goerne, 1967~)가 가장 오랫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피셔디스카우와 슈바르츠코프의 제자로서 리트 계보의 적자로 취급받는 괴르네는 그러나 스승들의 스타일과 많이 다르다. 베이스에 가까운 무거운 음색이며, 가사를 소화하는 방식도 마치 입안에서 읊조리는 듯 어둡게 들린다. 그런데 이렇게 노래하는 방식이 음침한 독일의 기후와 검은 숲으로 대표되는 자연, 그리고 리트 가사를 쓴 19세기 독일 시인들의 정서와 잘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 가수 중에서는 누구를 꼽아야 할까? 스스로 무대를 내려간 지 10년도 넘었지만 아직도 현역처럼 음반이 잘 팔리는 소프라노 바바라 보니(Barbara Bonney, 1956~)야말로 출중한 여성 리트 가수였다. 보니는 너무 무겁지 않은 노래에서 실력을 발휘했다. 짧은 찰나에 핵심을 짚어내면서 밝게 빛나는 보니의 노래에서는 중요한 소절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감각이 살아있었다.

글 유형종(음악 칼럼니스트)

 

피아니스트, 가곡을 완성하는 파트너

제럴드 무어

가수에게 종속되는 존재가 아니라 대등한 동료 관계로 불리는 피아노 반주자 중에도 전설적인 이름이 있다. 우선 제럴드 무어(Gerald Moore, 1899~1987)가 떠오른다. 그는 독일인이 아니라 전형적인 영국인이다. 리트는 독일인이 불러야 제격이라는 편견(?)에 의하면 피아노 반주도 독일계가 가장 잘 이해하지 않을까? 하지만 무어는 성악가와 곡 해석의 문제를 갖고 다투는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사의 의미를 고민하고, 그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로 잔뜩 신경이 곤두선 성악가를 편안하게 이끌어주는 존재였다. 피아노 반주가 리트의 일부인 것은 맞지만 노래와는 다른 역할이 있는 것이며, 반주자는 성악가가 과도한 고민을 하지 않도록 편안하게 돕는다는 것이 무어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자신의 단독 리사이틀은 해본 적이 없는데도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목록에서 무어의 이름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가수가 사랑하는 피아니스트라는 정말 독특한 위상을 확립한 것이다.

그레이엄 존슨

그밖에도 위대한 반주자가 많았지만 한 사람만 더 거론한다면 역시 영국인인 그레이엄 존슨(Graham Johnson, 1950~)을 꼽아야 한다. 존슨은 하이페리온 음반사를 통해 슈베르트 리트 전집을 무려 37장의 CD에 녹음했다. 가수 중심이 아닌 피아니스트 중심의 전집이 완성된 것이고, 곡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가수를 섭외해서 녹음했다. 이안 보스트리지와 마티아스 괴르네도 이 시리즈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경우다. 게다가 존슨은 모든 곡의 해설을 직접 집필했다. 그 해설 책자의 분량만도 400페이지가 넘는다. 또한 피아니스트가 쓴 해설답게 시의 내용 중심을 넘어서 음악 본연의 뉘앙스와 인문학적 식견을 풍부하게 짚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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