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키호러쇼

상스러움과 성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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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0월 14일 9:00 오전

뮤지컬, 노래의 인문학_9

 

 

태초의 상스러움

공연을 처음 공부하던 시절을 돌아보면 책을 읽었던 기억보다 술을 마셨던 기억이 더 많다. 수업이 끝나서 한 잔, 연습을 마쳐서 한 잔, 도서관에서 만났으니 한 잔, 공연을 본 김에 한 잔. 그때마다 자리를 주도했던 선배의 말은 이랬다. 우리는 디오니소스의 후예야. 잔을 기울이는 건 우리의 기원을 잊지 않기 위해서지. 자, 건배. 그 선배가 졸업할 때까지 연극사의 첫 단락(‘연극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시작되었다!’)은 언제나 체험학습(?)으로 이어졌더랬다. 디오니소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면 철학의 패기로 이어졌으련만 술이 더 좋았던 청춘들에게는 언제나 개똥의 객기가 우세했다. 얼마 전 그 선배를 만나서 그때 했던 말 기억 나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그랬냐고 되묻더라. 확실히 철학은 아니었던 거다. 공연의 시작점에 디오니소스가 있다는 사실은 공연이 어떤 세계를 지향하는 예술인지를 잘 보여준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半神半人)이다. 이 말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라는 뜻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라는 말과 같다. 디오니소스는 반신반인(反神反人)의 존재인 거다. 그는 신을 향해서는 아폴론에 대항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프로메테우스에 맞선다. 이성의 규칙과 질서의 합리라는 아폴론의 세계와는 달리 도취와 열정, 혼돈과 광기로 가득한 황홀경의 세계를 펼쳐놓고, 프로메테우스가 훔쳐다 준 불을 통해 과학으로 생산하고 예술로 창조하는 인간의 문명에 맞서서는 오로지 쾌락의 즐거움에 모든 것을 소비하는 무.위.도.식을 실천한다. 문명의 일에 매이지 않고(無爲) 오로지 본능(食)을 따르리라(徒)! 디오니소스의 세계는 마땅한 신적 가치와 마땅한 인간의 도덕을 배반하는 이교도의 자리에 서 있다. 신이어야 할 때 신이 아니고 인간이어야 할 때 인간이 아닌 반(反)존재가 바로 디오니소스인 것이다. 이런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축제에서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공연의 본질은, 비극으로 정돈되기 훨씬 이전에, 태초부터 불량했던 거다. 고상함과 숭고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디오니소스의 토양에서 공연의 뿌리가 뻗어 나갔다면 공연의 동력은 의미나 가치가 아닌 본능과 열정이었을 터. 그렇다면 천박하고 상스러운 데서 공연다움의 가치가 빛난다는 역설은 가장 오래된 기원으로부터 증명된 명제인 셈이다. 진지한 무게감을 시원하게 벗어버린 작품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오니소스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는 공연일수록 공연의 본질과 미덕을 품고 있을 테니 말이다. 뮤지컬 ‘록키호러쇼’는 이런 가설을 증명하기에 딱 맞는 작품이다.

상스러운 뮤지컬

‘록키호러(픽처)쇼’는 뮤지컬로나 영화로나 장르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1973년 런던의 조그마한 극장에서 초연된 뮤지컬 ‘록키호러쇼’는 기괴한 B급의 상상력으로 취향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했고, 1975년에 제작된 영화 ‘록키호러픽처쇼’는 말 그대로 컬트무비의 시작을 열었으니 이만하면 장르를 섭렵하며 개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라 자타가 공인할 만하다. 4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의 취향으로 봐도 이 작품은 여전히 희한하다. 호러와 멜로, 괴기와 코믹에 SF까지 뒤섞인 이 작품의 장르는 무엇일까? 길을 잃은 신혼부부가 기이한 성에서 경험하는 타임 슬립은 황당하기 짝이 없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김새나 옷차림은 기이하기 그지없다. 지구인과 외계인의 경계가 없고,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없으며, 윤리와 도덕은 엿 바꿔 먹은 지 오래다. 홀랑 벗은 인조인간이 등장하질 않나, 섹스가 횡행하고 살인이 난무하며 식인은 미식의 메뉴이다. 그런데 웃긴다. 이게 도대체 뭐람. 이 작품의 독특한 정체성은 기존의 장르 개념에 포착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뮤지컬이라면서 뮤지컬의 방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만듦새부터 그렇다. 뮤지컬로 볼 때 이 작품은 결함투성이다. 뮤지컬의 음악은 말이자 이야기이건만 난데없는 시점에 시끄러운 록음악이 요란스레 터져 나오는 식이다. 서사에 맥락이 없는 작품이니 음악에 맥락이 있을 리 없다. 이야기로 보나 음악의 기능으로 보나 이 작품은 장르의 이단에 가깝다. 리처드 오브라이언이 기성의 뮤지컬 작가였다면 이런 작품은 절대로 나올 수 없었을 거다. 대본과 가사, 음악까지 모두 만들어낸 그는 원래 작가가 아니라 배우였으니, 이 작품이 그의 유일한 창작물인 것을 보면 ‘록키호러쇼’는 리처드 오브라이언의 작가 선언이 아니라 당돌한 아마추어의 이벤트성 놀이판이었던 셈이다. 만약 그가 진지하게 창작자가 되기를 원했다면 같은 때에(1970년대 런던!) 같은 재료와(록!) 같은 방식으로(올라운드 플레이어!) 활동한 앤드루 로이드 웨버처럼 성장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 하나를 남기고 리처드 오브라이언은 배우로 복귀했다. 영화도 뭔가 이상한 건 마찬가지다. 완성도로 볼 때 이 영화는 솔직히 엉망진창이다. 해설자가 등장하질 않나, 판타지 호러물이라면서 영화적 기술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데다가, 기괴한 등장인물들은 싼티가 줄줄 흐르는 세트에서 등퇴장을 반복하니, 영화의 속도감이나 스펙터클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욕을 내뱉는 게 당연하다. 영화의 옷은 입었지만 영화라고 말하기에는 전혀 영화적이지 않다고나 할까. 이 영화를 연출한 짐 셔먼은 영화감독이 아닌 공연연출가였다. 영화적 기술력이나 리얼리티 따위는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미덕이었던 거다. 혹시 이런 허술하고 어이없는 완성도가 일부러 의도한 전략은 아니었을까? 이 작품 이후에 짐 셔먼이 만든 영화는 거의 없을뿐더러 그나마 두어 개 만든 것도 결과가 영 신통치 않은 걸 보면, 이런 음모론은 어불성설이다. 리처드 오브라이언과 짐 셔먼에게 이 작품은 의도적으로 망가지려는 실험이기보다는 최대한 잘 만들기 위한 능력 발휘였던 셈이다. 이들이 만들어낸 ‘작품’이 단지 이 ‘콘텐츠’였다면 ‘록키호러(픽처)쇼’는 분명히 단명하고 말았을 거다.

즐거운 사람들

초년에 단명할 운명에서 무병장수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력은 다름 아닌 관객의 힘이다. 관객은 이 작품이 만들어낸 진짜 ‘작품’이다. 모든 공연에는 관객이 있게 마련이지만, 이 작품의 관객은 많이 특별하다. 이들은 이 작품에 생명을 부여한 ‘진짜 창작자’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공연과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런던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공연은 두 달 만에 시들하게 막을 내렸고, 야심차게 제작한 영화는 황당함과 지루함 때문에 일찌감치 뒷골목 변두리 극장으로 내쫓겼더랬다. 이 작품의 창의성이 발휘되기 시작한 순간은 모두가 망했다고 생각한 바로 이때부터였다. 변두리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소수의 관객이 황당함과 지루함을 참지 못해 객석에서 일어나 자기네들끼리 낄낄거리며 놀이를 만들기 시작한 거다. 영화의 해설자가 설명하는 대로 춤도 추고, 주인공들의 대사와 노래도 큰소리로 따라하면서, 마치 선술집의 공연을 보는 사람들처럼 관객들은 영화를 즐겼다. 영화가 반복될수록 개별의 일탈은 집단의 놀이가 됐고, 등장인물과 똑같은 옷을 입고 극장에 오는 등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관극이 시작되는 시간의 역전이 일어났다. 공연 같은 영화를 공연처럼 즐기는 관객들을 통해 이 작품은 불세출의 B급이요 컬트의 시작을 열었다는 명예를 얻게 되었던 거다. 영화를 즐기는 방식은 공연의 관습이 되었고 관객은 점점 더 재미있어졌다. ‘록키호러(픽처)쇼’의 관객참여가 독특한 까닭은 이것이 전적으로 관객들의 자발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관객참여를 연출의 전략이자 공연의 목표로 삼는 여타의 공연들은 진즉에 관객의 반응을 예측하고 그에 따라 참여할 포인트를 제시함으로써 최종적인 공연을 완성한다. 하지만 ‘록키호러쇼’는 그런 계획 자체가 없는 공연이었다. 공연의 관습 따위에 매이지 않고 영화건 소설이건 재미있을 만한 재료를 한데 모아 비틀면서 놀아대는 작가의 재기발랄한 농담이었을 뿐 관객의 반응에 공간을 비워놓은 공연은 아니었던 거다. 그런데 관객들은 자기네가 끼어들 틈을 스스로 찾아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스며들어 놀면서 이 작품을 완전히 다른 공연으로 탈바꿈시켜버렸다. 아무도 기획하지 않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작품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관객은 ‘록키호러(픽처)쇼’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로 발전시켰다. 이런 문화는 아방가르드 예술도 미처 이루지 못한 성과이다. 모더니즘 이후 공연의 화두는 관객을 수동적인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무대 중심의 일방적인 공연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관객이 극장이라는 완고한 공간의 관습을 깨뜨릴 수 있다면, 대중은 극장 밖의 보수적인 사회의 구조를 깨뜨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감은 과격한 시도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미래주의자들은 자기들의 공연에 찾아온 관객을 자극하기 위해서 한 좌석에 티켓을 여러 장 팔아서 공연을 보기도 전에 관객끼리 실랑이를 벌이게 한다든지, 가장 좋은 자리와 가장 나쁜 자리의 가격을 반대로 매긴다든지, 의도적으로 지루한 공연을 만들어놓고 막이 바뀔 때마다 단장이 나와 극의 내용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서 관객의 화를 돋운다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을 자극했다. 관객의 반응은 뜨거웠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공연하는 도중에 무대를 향해 토마토나 썩은 달걀을 던져댔으니 말이다. 나중에는 공연을 보기보다 토마토를 던지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져 공연이 중단되었으니 관객을 능동적인 존재로 만들겠다는 애초의 기획은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남은 것은? 토마토로 범벅이 된 텅 빈 극장뿐이다.

 

새로운 공동체

미래주의의 관객과 ‘록키호러(픽처)쇼’의 관객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미래주의의 관객은 눈앞의 공연을 파괴했지만, ‘록키호러(픽처)쇼’의 관객은 관극의 관습을 깨뜨렸다는 사실. 객석에 앉아 공연을 관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안다. 아무리 공연이 어이없어도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관극은 조용히 하고 박수는 열심히 치고 생각은 혼자서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의 관객들은 이런 관습을 시원하게 깨뜨려버렸다. 황당하면 큰 소리로 조롱하고 지루하면 일어나 놀아대면서 공연을 처음 보는 어린아이처럼 극장의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들의 재미에 맞게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나갔던 거다. 혼자서도 놀고(코스프레!) 어울려서도 놀고(타임워프 댄스!). 이들의 존재방식이 폭력이 아니라 놀이인 것은 극장 안에서 소외되지 않은 채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법을 관객들 스스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의 기발함과 과격함으로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바로 이런 관객이다. ‘록키호러(픽처)쇼’에서 비로소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창조적인 관객이 완성된 셈이다. 20세기 공연의 가장 큰 화두는 이렇게 풀려버렸다. 이런 관객현상을 일컫기에 컬트라는 단어는 의미의 폭이 좁다. 컬트. 소수의 집단이 광적일 정도로 작품을 예찬하는 모양새가 마치 사이비 종교와도 같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단어 하나로 이 작품을 휘어잡는 객석의 기운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종교성은, 컬트라는 이교도적 취향을 훨씬 넘어서, 타인과 내가 관객이라는 집단에 함께 소속되어 있다는 공동체적 교감에 있기 때문이다. 그 교감의 색채는 어둡고 칙칙하기보다는 밝고 명랑하다. 너무나도 다양하고 이질적인 각각의 관객이 모여 별것도 아닌 것에 같이 흥겨워하다가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다시 연결하기(relier)’라는 어원으로부터 종교(religion)라는 단어가 생겨났음을 생각하자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은 종교성의 핵심이다. 이들 관객이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사회에서의 관계 맺기에 필요한 ‘세속적인’ 연결 고리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함께 야유하고 조롱하며 춤추는 흥겨움만으로 촘촘하게 연결되니,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다. 나는 신나게 놀 것이다! 극장 밖 현실의 논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전혀 다른 경험이 쏟아지는 가운데 극장 안의 사람들은 어느새 흔쾌히 어우러져 있다. 공연이 꿈꾸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요 공연이 이루어야 할 최고의 이상이다. ‘놀이하는 인간’들이 바꿀 수 있는 것이 단지 극장 안의 세계일까. 극장 밖의 세계도 그들에 의해 바뀔 수 있음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더랬다. 축구공 하나로 뭉친 몇만의 붉은 악마들은 사건·사고 하나 없이 깨끗한 공간으로 광장을 지켰고, 촛불 하나로 뭉친 몇만의 시민들은 축제를 즐기듯 자기의 생각을 말하고 노래했으니, 초겨울에 물대포를 쏘는 경찰을 향해 ‘온수! 온수!’를 외치던 놀이적 상상력은 마침내 정치 권력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갔다. ‘사람’이 ‘사람들’이 될 때 극장이라는 가상의 세계뿐 아니라 사회라는 실제의 세계 또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바꾸는 신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천박한 상상과 저속한 표현으로 가득한 공연의 핵심에 다른 차원의 세계를 경험하고 전망하며 기대하게 만드는 성스러움이 있었다니. 외모로만 볼 것이 아니요 중심을 보아야 할 것은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격언이 아니었다.

 

정수연(뮤지컬 평론가)

문학과 연극학을 공부했다. 공연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찾으며 마음을 키워왔으며, 앞으로도 같은 꿈을 키워나갈 것이다. ‘더 뮤지컬’ 등 여러 매체에 공연과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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