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유령이라는 거울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2월 16일 9:00 오전

뮤지컬, 노래의 인문학_11

 

유령은 무엇인가?

공연 뒤풀이 때 자주 불렀던 노래가 있다. ‘연극이 끝난 후’라는 노래인데 가사가 참 낭만적이다. 연극이 끝나고 난 후 혼자서 객석에 앉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 음악도 조명도 세트도 다 사라진 무대 위에 정적과 어둠만이 흐르고 있네요. 뜨거웠던 열정만큼이나 텅 비어버린 허무를 노래한 가사가 꽤 멋스럽다. 하지만 이 가사를 조금 다르게 체험하면 장르는 금세 낭만에서 호러로 바뀌어버린다. 어쩌다 보니 맨 마지막으로 극장에 혼자 남은 적이 있었더랬다. 낭만? 어림도 없다. 어스름한 객석을 보는데 갑자기 무서워지더라. 사람과 소리로 가득 찼던 공간이 조용하고 어두워지니 고즈넉하기는커녕 으스스하기 짝이 없었다. 무섭다는 기분이 드는 순간 분명 아무도 없다는 걸 아는데도 마치 누가 있는 것처럼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매일 드나들던 익숙한 공간이 갑자기 이렇게 낯설어질 줄이야. 누군가 있어야 하는 곳에 아무도 없으면 집이든, 극장이든, 놀이공원이든, 순식간에 오싹한 공간이 돼버린다. 공포영화의 공식에 비춰볼 때 이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대략 세 가지이다. 첫째, 그 공간에 실제로 누군가 있는 거다. 나는 그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그는 내가 어디 있는지 아는 불공정한 상황에서 숨바꼭질하는 경우이다. 이때 주인공은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너의 정체를 파악하겠다. 나와라, 싸우자. 대부분 주인공들이 이긴다. 두 번째는 좀 복잡한데, 공간에 얽힌 사연이 있는 경우이다. 이런저런 일들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있었으니 과거의 기억과 원한이 지금껏 여기에 남아있다는 식이다. 이때 주인공이 해야 할 일은 둘 중 하나다. 공간에서 벗어나거나 공간을 아예 없애거나. 공포는 싹 사라진다. 가장 어려운 경우는 세 번째이다. 공포의 근원이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을 때. 기억이든 욕망이든 죄책감이든 두려움이든 표면의 밑에 가라앉았던 것들이 다시금 떠올라 지금의 자아를 사로잡는다. 이때 주인공은 선택해야 한다. 이 내면의 실체를 마주할 것인지 아니면 외면할 것인지. 공포의 이유도 해결의 열쇠도 모두 주인공에게 있다. 결국 으스스함이 던지는 숙제는 바깥의 유령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유령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유령이 등장하는 이야기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인 ‘햄릿’을 보면 숙제의 의미는 확연해진다. 햄릿에게 유령과의 만남은 지금까지의 삶이 깨지는 균열의 시작이다. 유령의 이야기는 지금 여기의 현실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익숙한 형상(아버지)으로부터 두려운 이야기(살해)를 들었을 때, 눈에 보이는 현실(행복한 숙부와 어머니)은 믿기 어려운 진실(왕위 찬탈을 위한 살인)로 흔들려 버린다.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유령은 묻는다. 이제 당신은 누구로 살 것인가.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는 지금까지의 햄릿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유령의 말에 따라 복수자로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고민인 것이다. 뮤지컬 ‘레베카’에도 이런 질문이 있다. 여기에도 유령이 떠돈다.

부재의 매혹, 레베카

뮤지컬 ‘레베카’의 원작은 다프네 듀모리에가 1938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다. 고딕소설의 틀에 현대적인 서스펜스를 담아낸 이야기로, 독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로 독특하다. 이름이 제목이면 대부분 그가 주인공인데, 이 작품의 주인공은 레베카가 아니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기에 작품에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 ‘나’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나. 죽은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고 주인공에게는 이름이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중심축이 누구인지는 자명하다. 이름을 가졌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 바로 레베카이다. 작가는 어두운 심리 드라마를 전개하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당대의 독자들은 이 소설을 로맨스로 받아들였단다. 죽은 레베카의 진실에 맞서 사랑을 지키는 ‘나’에게 감정이입을 했기 때문이라나. 열광의 이유가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다. 선풍적인 인기의 비결이 작가의 의도를 전혀 다르게 읽어낸 독자들의 ‘잘못읽기’였으니 작품에도 나름의 운명이 있는 게 맞는가 보다.

©EMK뮤지컬컴퍼니

뮤지컬은 이 운명적인 오독을 따라간다. 결과는? 역시 성공이다. 200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된 뮤지컬 ‘레베카’는,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는 공연된 적 없지만,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권에서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일궈냈다. 한국에서도 2013년 초연된 이후 2019년에 다섯 번째 시즌을 맞았으니 흥행작으로서의 자리매김은 확실히 한 셈이다. 이 작품이 로맨스로 만들어지는 바탕에는 두 갈래의 계보가 깔려 있다. 첫 번째 계보는 히치콕의 영화이다. 히치콕은 원작의 서스펜스는 가져가되 심리적 어둠은 걷어내 버렸는데, 뮤지컬은 소설의 음산함이 아닌 영화의 산뜻함을 선택했다. 산뜻함의 정점은 해피엔딩이다. 소설은 모든 문제가 사라져도 불안함과 음울함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데, 뮤지컬은 이런 복합적인 의미 대신 행복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또 다른 계보는 이 작품의 창작자인 미하일 쿤체와 실베스터 르베이의 스타일이다. 이들이 만든 작품에는 여성 이름이 제목인 작품이 적잖은데, 주인공들은 대부분 사랑이라는 틀 안에서 언뜻 보면 적극적으로 보이는 낭만적 수동성을 발휘한다. 토드를 사랑하는 엘리자벳이 그렇고, 페르젠을 사랑하는 앙투아네트가 그러하듯, 막심을 사랑하는 ‘나’가 그렇다. 서사의 중심에는 운명적인 사랑이 있고, 그들은 죽음이 됐든 희생이 됐든 자기의 방식으로 사랑을 이루어낸다. 뮤지컬 ‘레베카’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일관되게 나타난다. 일관성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빈 뮤지컬’이라는 이름이 하나의 스타일로 관객에게 각인될 수 있었던 힘은 아마도 일관성일 것이다. 쿤체와 르베이의 모든 작품은 제작사 EMK가 일관되게 주관했으며, 이 모든 작품에 익숙한 배우들이 일관되게 출연했다. 빈 뮤지컬이라는 장르는 EMK의 스타일과 어우러져 현지화에 성공한 유럽뮤지컬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던 거다. 그래도 원작의 아우라는 강하다. 로맨스가 되어버린 뮤지컬에서도 소설 특유의 분위기를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즉 2막의 시작에서 저택의 집사 댄버스가 ‘나’를 세워둔 채 바다를 향해 레베카를 부르는 장면은 대표적인 예이다. 무대가 전환되면 저택 맨덜리는 어느새 불길한 먹구름과 음산한 파도 소리로 둘러싸이는데, 레베카에게 매혹된 채 발코니에 서 있는 댄버스의 모습은 레베카가 죽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음을 확신시킬 만큼 오싹하다. 하지만 레베카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댄버스만이 아니다. 죽은 레베카의 남편인 막심과 ‘나’, 맨덜리의 모든 사람은 그에게 사로잡혀 있다. 레베카는 사라지지 않는 강박이며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불안이다. 그는 부재함으로 존재하는, 맨덜리를 에워싼 ‘유령’인 것이다. 그의 존재감은 뮤지컬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유령이 보여주는 것

 

흥미로운 것은 유령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레베카가 맨덜리로 돌아오는 통로는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나’가 미세스 드윈터라는 이름을 얻는 데서 비롯된다. 돈 많은 중년부인에게 고용되어 하녀노릇을 하던 ‘나’는 막심과 사랑에 빠지고 곧이어 결혼을 하게 된다. 미세스 드윈터가 된 ‘나’는 저택 맨덜리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달달했던 분위기는 갑자기 차가워진다. 맨덜리에서 미세스 드윈터라는 이름은 이미 레베카의 것이기 때문이다. 미세스 드윈터라는 이름 안에서 ‘나’는 레베카와 포개져버린다. 이런 경험은 또다시 이어진다. 맨덜리의 파티에서 ‘나’는 조상 캐롤린 드윈터의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지만, 막심을 비롯해 파티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그 모습에서 떠올리는 사람은 레베카다. 레베카 역시 캐롤린의 드레스를 입었기 때문이다. ‘나’와 레베카는 캐롤린의 흰색 드레스로 또다시 포개진다. 물론 레베카와 ‘나’에게 흰색의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나’가 입은 캐롤린의 하얀 드레스는 맨덜리의 규범과 정신을 상징하는바, 이것은 막심의 세계이다. 막심(Maxim)이라는 이름에서 보이듯 맨덜리는 행동의 규범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이런 규범에서 아름다움이란 곧 순결함과 고상함에 불과하다. 하지만 레베카의 세계는 온전히 그 규범의 바깥에 있다. 방탕하면서 아름답고 난잡하면서 우아한 레베카. 그는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통념을 거부함으로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사악한’ 여자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이다. 결혼의 관습과 순결의 관념을 비웃는 그는 막심의 규범이나 여성의 미덕이라는 틀에 결코 포획되지 않는다. 하얀 드레스는 아름답고 순결한 여성의 상징인바, 완벽한 모습으로 드윈터 가문의 여성을 재현하는 레베카의 능숙한 연기는 그 허울을 비웃는 전적인 조롱이다. 맨덜리의 규범을 상징하는 백색의 드레스는 이제 레베카에 의해 텅 빈 껍질이 돼버렸다.

 

 

막심은 하얀 드레스를 입은 ‘나’의 모습에서 다시 돌아온 레베카를 본다. 죽는 순간까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며, 그 아이를 너의 자식으로 키울 거라며 막심의 규범을 모욕한 레베카가 과거와 똑같은 모습으로 맨덜리를 조롱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그에게 레베카는 사라지지 않는 증오이다. 그러나 댄버스에게 레베카는 사라진 적 없는 숭배의 대상이다. 댄버스가 ‘나’에게 레베카의 옷을 입힌 것은 ‘나’는 레베카가 아님을 모두에게 확인시키기 위함이다. 미세스 드윈터라는 이름은 오직 레베카의 것이니 누구도 레베카의 자리를 빼앗지 못할지니. 하지만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양상은 다르다 해도 그들 모두 레베카의 유령에 사로잡힌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과거의 시간에 붙잡혀있다. 그런데 ‘나’는 이들과 조금 다르다. ‘나’에게 레베카는 과거의 기억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때 거기엔 레베카가 된 ‘나’가 있다. 거울을 사이에 두고 ‘나’와 레베카가 마주보고 서있는 것이다.

 

되찾아야 할 거울

만일 마주보고 있는 ‘나’와 레베카의 관계를 지워버리지 않았다면, 뮤지컬은 여성성에 대한 위험하고도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 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뮤지컬은 쉬운 길을 택했다. 미세스 드윈터로서 ‘나’의 정체성을 오로지 막심에게로 집중시키니 말이다. 소설에서 ‘나’는 레베카와 자주 한 사람으로 겹쳐지지만 뮤지컬에서의 ‘나’는 오로지 남편을 지키기 위해 용감해지는 여자-막심이다. ‘나’와 레베카는 거울관계가 아닌 적대관계가 되어버린다. 그만큼 이야기도 명쾌해진다. ‘레베카는 부도덕한 악녀였으니 겉보기에는 아름답고 정숙했어도 실제로는 음탕하고 난잡한 여자였다, 그러니 막심이 그를 증오한 것은 당연하고도 정당하다, 그를 숭배했던 댄버스도 결국 배신당한 것 아닌가, 한 마디로 우리 모두 레베카에게 속은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유령이 아니라 깨뜨려야 할 환상, 폭로해야 할 거짓으로 결론지어진다. 이런 결론으로 볼 때 뮤지컬에서 레베카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인물은 ‘나’이다. ‘나’는 레베카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다. 막심은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결혼의 순결함을 비웃는 레베카에게 깊이 감춰둔 살의를 들키는데, 레베카는 그가 살의를 실행하게 유도함으로써 고상함의 허울에 가려진 그의 실체를 드러내게 만든다. 그럼 댄버스는? 자기에게 레베카가 세계의 전부이듯 레베카에게도 자신이 전부일 거라는 확신은 레베카의 죽음의 진실 앞에서 무참히 깨져버린다. 레베카는 자기가 죽어가고 있음을 댄버스에게 말하지 않았던 거다. 레베카를 통해서만 존재했던 댄버스의 허상 같은 세계는 불타는 맨덜리와 함께 무너져 내린다. 막심이든 댄버스이든 레베카의 죽음의 진실 앞에서 맨덜리의 사람들이 직면하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실체이다. 그런데 ‘나’가 직면하는 실체는 이들과 다르다.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이름으로 똑같은 억압 앞에 레베카와 ‘나’는 함께 서 있으니 말이다. 레베카와 가장 닮은 존재는, 역설적이게도 그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바로 ‘나’이다.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원래 ‘나’는 관계 안에서만 규정되는 자기개념인바, 어떤 관계에 놓이는가에 따라 ‘나’는 매번 다른 이름을 얻는다. 그 이름에 맞게 살면서도 때로는 그 이름의 틀을 넘어서는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진정한 ‘나’를 만들어가는 거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익숙한 관계의 틀을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 속에 자기를 놓는 용기이다. 그러니까 막심에 갇히지 않고 레베카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거다. 하지만 여기엔 위험이 따른다. 레베카의 자리에 가는 순간 ‘나’는 막심의 규범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불길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 두려운 자리에서 ‘햄릿’의 유령이 그랬듯 레베카의 그림자는 ‘나’에게 질문한다. ‘나’가 되기 위해 당신은 누구와 연결될 것인가. 누구로 살아갈 것인가. 어쩌면 스스로 광기를 자처한 햄릿처럼 ‘나’ 역시 그렇게 살게 될 수도 있다. 그런 ‘나’를 감당할 수 없어 뮤지컬은 ‘나’와 레베카 사이에 놓인 거울을 치워 버렸는지도 모른다.

 

정수연(뮤지컬 평론가)

문학과 연극학을 공부했다. 공연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찾으며 마음을 키워왔으며, 앞으로도 같은 꿈을 키워나갈 것이다. ‘더 뮤지컬’ 등 여러 매체에 공연과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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