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에세이-이정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3월 2일 9:00 오전

ARTIST’S ESSAY

 

통영에서 꾸는

파리의 꿈

13년 전 가을의 어느 날, 통영에서 개최된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의 우승자로 내 이름이 불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뒤로 연주 여행을 올 때마다 이 도시는 내게 포근하고 좋은 기억만 가득한 엄마 품 같은 곳이 되어주었다. 특히 동트는 통영의 바다는 참 신비롭다. 저 멀리 섬들이 병풍처럼 바다를 두르고 있고, 구름과 안개가 섬 봉우리에 살포시 앉은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다. 작년 가을, 바로 그곳에서 첫 솔로 음반 녹음 작업을 했다.

사방이 따뜻한 나무로 감싸인 통영국제음악당 홀에 들어섰다. 객석은 텅 비었지만, 온도는 차갑지 않았다. 무대는 각종 장비와 즐비한 마이크 선으로 복잡했지만, 마치 원래 제자리인 듯 어지러워 보이지 않았다. 조율사는 한창 마지막 튜닝 중이었다. 음향 밸런스를 찾느라 테스트를 몇 번 해보고는 바로 풀랑크(1899~1963)의 첼로 소나타 FP143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숨을 고르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태중의 아기가 따뜻한 양수에 둘러싸여 바깥세상의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리는 느낌, 우주인이 달에 착륙해 첫발을 내디디며 경험할 법한 고요의 순간이 기적처럼 다가왔다. 손은 열심히 음표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더 이상 나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어느새 눈앞에는 숨이 멎을 것같이 아름다운 모네의 ‘수련’이 펼쳐졌다. 다양한 파스텔 톤 물감으로 그려진 수련이 마치 잔잔한 연못에 바람이 일으킨 물결을 따라 춤추는 것 같았다.

 

그 시절 나의 파리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는 모네의 수련관은 한동안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영원할 것 같던 공사가 끝난 뒤 설레는 가슴을 안고 처음으로 방문한 그곳은 천국이었다! 천국은 분명 그런 모습일 것이다. 그 몽롱함과 아름다움에 취해 몇 시간이고 나는 그 방 한가운데 놓인 둥그런 의자에 앉아 있다 오곤 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내 귓가를 맴도는 곡이 바로 이 풀랑크의 첼로 소나타 중 2악장 ‘카바티나’였다.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는 날이면 나는 언제나 마지막으로 퇴장하는 관람객이었다.

미술관을 등지고 나오면 보이는 콩코드 광장에는 아름다운 분수의 가로등이 하나둘 켜진다. 광장과 맞닿아 있는 튈르리 정원의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센강과 에펠탑에 걸린 노을은 조금 전까지 나를 황홀하게 한 모네의 작품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첫날 녹음이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다. 4악장 중 기교적으로 어려운 구간은 마음에 들 때까지 반복하다, 첫날부터 팔을 혹사할 수 없어 결국 다음날을 기약해야 했다.

소리마저 어둠이 삼킨 새벽 두 시,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테라스로 나와 달과 그 달을 담은 바다를 바라보며 밤바람을 쐬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파리에서도 그랬다. 20대 초반, 자아가 막 형성되기 시작한 질풍노도의 시기, 가슴이 답답할 때면 무작정 나와 걸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지붕 사이로 휘영청 뜬 보름달이 센강을 비추는데 이게 가로등인지 달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밝았다.

 

음악, 그 비밀스러운 연결 통로

그 시절의 나를 힘들게 했던 고민거리는 그날 흘러가는 강물을 따라 같이 흘러갔는지, 강처럼 흐르는 세월을 따라 흘러갔는지 이제는 웃으며 회상할 수 있는 추억거리가 되었다. 그날도 달은 외로이, 하지만 고귀하게 구석구석 밝혀주며 내게 충분한 위로를 안겨주었다.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하는 동안 통영에는 비가 내렸다. 한껏 차분하고 정결해진 마음으로 연주에 임했다. 언젠가 나의 첼로 소리가 그 옛날 방황하던 나를 비춘 달빛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기를 바라본다.

포레의 ‘나비’는 5월의 싱그러운 뤽상부르그 정원으로 인도한다. 공원 잔디에 앉아 바게트와 치즈, 와인과 함께 피크닉을 즐기는 파리의 젊은이들 머리 위로 나비들이 날고 있다. 형형색색 피어난 꽃에도 앉았다가, 햇살을 머금어 반짝이는 호수에도 앉았다가, 이내 공원의 높은 철재 담을 넘어 저 멀리 팡테옹 지붕을 향해 날아간다. 연주하는 내내 5월 파리의 공기가 그리웠다. 신선하고 설렘 가득한 온도에 해방감이 깃든 공기. 바로 그것을 소리에 담고 싶었다.

3일간의 치열했던 녹음을 끝마쳤다. 순수하고 열정적이어서 아름다웠던 20대의 모습을 비밀 일기장처럼 앨범 곳곳에 녹여 보고 싶었다.

나는 통영에 있었지만 파리에도 있었다. 관객은 없었지만 파리에서의 소중한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어 행복했다. 마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2011)의 주인공처럼….

“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 주어서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당신 곁에 머무를 것이다. 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충분한 행운’이 따른 사람이었고 파리는 내게도 ‘움직이는 축제’가 되어 늘 내 곁에 머무른다. 헤밍웨이가 책으로 아름다운 시절을 회상한 것처럼 나는 앨범으로 아름다운 시절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

 

“Rendez-vous á Paris?” 랑데부 인 파리(Rendez-vous á Paris) 첼리스트 이정란의 첫 솔로 음반(SONY)이다. 그를 음악가로 성장시킨 도시, 파리에서의 추억과 감성을 오롯이 담았다. 아름답고도 변화무쌍한 19~20세기 프랑스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생상스·포레·드뷔시·풀랑크의 작품으로 구성했다. 피아노는 일리야 라쉬코프스키. 음반 발매를 기념하는 리사이틀이 3월 3일 대구콘서트하우스 챔버홀, 5일 광주 유·스퀘어문화관 금호아트홀, 7일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다.

 

글 이정란 첼리스트

이정란(1983~)은 예원학교·서울예고·서울대 음대를 거쳐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필립 뮬러를 사사했다. 2000년 파블로 카잘스 콩쿠르에서 최고유망연주가상을 수상하며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했다.

 

일러스트 임주희

피아니스트 임주희(2000~)는 장형준·신수정·강충모를 사사하고, 발레리 게르기예프/마린스키와 협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취미로 그린 그림을 자신의 SNS에 올리는 등 대중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인 젊은 연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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