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막스 리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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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9월 28일 9:00 오전

Max Richter
Photo by Mike Terry

이 시대의 목소리

작곡가 막스 리히터

막스 리히터가 세계인권선언문을 바탕으로 작곡한 신보 ‘VOICES’를 발매했다. 잔잔한 현의 선율 위로 흐르는 세계 각국 70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머릿속에 음표들이 떠다닌다. 이를 포착하기 위해 손가락이 분주해진다. 그는 지금 상상 속 피아노를 두드려보는 중이다. 어릴 때나, 어느덧 50대가 된 지금이나 음악에 대한 그의 상상력과 열정은 여전하다.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음악은 나의 첫 번째 모국어”라고. 이 시대의 대표 미니멀리즘 작곡가인 막스 리히터(1966~)는 영국 왕립음악원을 졸업하고 이탈리아에서 작곡가 루치아노 베리오(1925~2003)를 사사하며 클래식 음악과 전자 음악을 익혔다. 2000년 초반부터 둘을 결합한 음악을 꾸준히 발표해왔고, 그 예술성을 인정받아 2014년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었다. 그에게 음악은 생각을 표현하는 가장 주된 수단이다. ‘Sleep’(2015/DG)은 수면 부족이 일상이 된 오늘날의 현실을 일깨웠고, ‘리컴포즈드: 비발디 사계’(2014/DG)는 잊고 지낸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말했다. 2003년 영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던 그는 ‘더 블루 노트북’(2004/130701)으로 반전(反戰)의 뜻에 쐐기를 박았다.

수많은 질문이 던져진 2020년,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 질문들에 대해 막스 리히터는 ‘VOICES’(Decca)를 내어놓았다. 첫 곡의 타이틀은 ‘모든 사람(All Human Beings).’ 1948년 UN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문 제1조의 첫 단어이기도 하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증식한 갈등과 불안에 맞서, 70여 년 전 쓰인 세계인권선언문(이하 선언문)을 다시 펼쳤다. 과거의 텍스트가 오늘의 음악이 된 일대기를 막스 리히터에 물었다.

뒤집힌 세상, 뒤집힌 소리

오랜 준비 끝에 신보 ‘VOICES’가 발매됐습니다. 작곡할 때 ‘네거티브 오케스트라’라는 독특한 구성의 앙상블을 염두에 두었다고 들었는데요.

보통 현악 앙상블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순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해요. 그런데 이번 음반에서는 정반대(네거티브)로 구성했습니다. 낮은 음역의 첼로와 베이스가 주를 이루는 거죠. 이렇게 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지금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앙상블의 악기 구성도 ‘뒤집어’ 놓은 거죠.

기존과는 전혀 다른 악기 구성이라… 작곡과 연주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어두운 음색들의 팔레트가 주어진 느낌이었어요. 이를 은유적으로 활용해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어두운 음색으로도 희망차고, 정신을 고양시키는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요. 이게 도전이 되었어요. 마치 ‘이 어두운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맞닥뜨린 것 같았거든요.

영국엔 오랫동안 이동제한령이 시행되었죠. 이 제약 안에서 리코딩 작업을 진행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첼로와 더블베이스의 비율을 높이니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더라고요. 이에 적합한 환경의 스튜디오를 런던에서 찾는 것도 중요했어요. 다행히 연주와 녹음은 영국의 이동제한령 조치가 내려지기 전에 마무리됐습니다. 이후의 믹싱 과정은 이 제약 안에서도 가능했어요. 공간에 한두 명만 있으면 되거든요. 그런데 그 공간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사뭇 달랐어요. 이 시대에만 느낄 수 있는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고나 할까요.

이야기되어야 하는 이유

음반 첫 곡인 ‘모든 사람(All Human Beings)’은 선언문 제정위원회 회장이었던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의 선언문 낭독으로 시작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동시대 활동하고 있는 배우 키키 레인(1991~)의 목소리로 이어진다. 선언문에 관해 리히터는 “변호사와 외교관들에 의해 쓰였지만, 굉장히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읽는 것 같다. 정치와 문화를 뛰어넘는 인류의 근본적인 무언가를 건드리는 글”이라고 말한다. 이 ‘시’를 읽어 내려가는 목소리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

‘VOICES’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 10년 전이었죠.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2010년 즈음에 미국이 운영하던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인권 침해가 자행된 사실을 접했어요. 음반의 마지막 트랙인 ‘Mercy’를 작곡한 계기였습니다. 그때 사회적 목소리를 담은 작업을 엮어 음반으로 만들겠다는 아이디어가 뿌리를 내렸어요. 음반의 큰 키워드는 ‘세계인권선언문’이에요.

선언문이 음반 전체를 관통하도록 한 걸 보면, 크게 감명 받았나 봅니다.

지난 몇 해 동안 세상은 점점 시끄러워졌습니다. 많은 이가 소리쳤지만,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죠. 이 세상의 데시벨에 음량을 더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음악으로 나지막한 희망이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어요. 이를 위해 여러 음악적 재료를 실험했고, 그러던 중 선언문을 발견했습니다. 이 선언문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쓰였어요. 암흑의 시대에 쓰였음에도 희망을 품고 있었죠. 그래서 이 텍스트를 음악 속에 녹여 넣기로 한 거예요.

잔잔한 현의 선율을 타고 선언문이 ‘낭독’되고 있어요. 노래되도록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가장 직관적이고 쉽게 내용이 전달되길 바랐어요. 노래되면 가사 전달력에 대한 의문이 들거든요. 또, 노래를 선택하면 그 방식에 대한 고민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클래식 음악의 콜로라투라로 노래할 것인가, 아니면 대중가요의 노래 방식을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요. 이렇게 되면, 특정 문화권을 대변하게 될 위험이 있었어요. 제가 원했던 게 아니었어요. 중립적인 게 필요했죠.

루스벨트와 키키 레인의 목소리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음반에 젊은이의 목소리를 담고 싶었어요. 선언문과 ‘VOICES’는 잠재성에 관해 이야기하거든요. 지금까지 만들어진 세상을 반영하면서도,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를 담고자 했습니다. 루스벨트의 목소리가 전자라면, 키키 레인의 목소리는 그 미래를 향해 있는 거예요. 키키를 섭외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그가 주연한 영화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2018)을 통해서였어요. 아름다운 영화예요. 아직 안 봤다면 꼭 한 번 보길 추천해요. 첫 번째 수록곡을 넘어가면 세계 각국 70인이 각자의 언어로 선언문을 낭독해요. 가능한 모든 커뮤니티의 목소리가 담기길 바랐어요. 그래서 SNS를 통해 전 세계인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각자의 언어로 선언문을 읽고 녹음해 우리에게 보내 달라고요. 수백 개의 녹음을 받았어요. 이를 음악적 재료로 활용했습니다. 각 언어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들의 목소리로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었어요. 그게 중요한 거였죠.

선언문의 내용을 살짝 수정해 넣기도 했던데요.

선언문은 1948년 쓰였고,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합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변화가 필요해 보였어요. 예를 들면, 제1조에 이런 표현이 있어요. “모든 사람은 서로에게 ‘형제애(Brotherhood)’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형제애’라는 단어는 남성을 기준으로 해요. 2020년이잖아요, 우리의 공동체는 훨씬 폭넓어졌죠. 그래서 ‘공동체(Community)’로 대체했어요. 16조는 결혼의 자유를 이야기해요. “모든 남성과 여성은”이라는 구절로 시작하죠. 이건 ‘누구나’로 바꿨어요. 사실 간단한 거예요.

유튜브를 통해 뮤직비디오도 선보이고 있어요.

제 파트너인 율리아 마르의 작품이에요. 음악에 대한 본인의 감상을 표현하면서도 지금의 세상을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영상엔 성별, 인종, 출신국가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이따금 등장해요. 이 인물은 ‘모두’를 상징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정체성을 암시하는 힌트가 전혀 없는 거죠. 각자가 상상하는 그 누구도 될 수 있는 거예요. 영상의 끝에 이 인물은 해방됨을 만끽하고 있는 듯하죠.

그럼에도, 예술

막스 리히터에게는 ‘독일에서 출생하고 영국에서 성장한 작곡가’란 수식어가 종종 따라 붙는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유럽인’이라 부른다. 이탈리아에서도 오래 머물렀던 그는 여러 나라를 아우르는 균형 속에서 살고 있다. “독일에서는 여전히 문화가 국민의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해요. 안타깝게도 오늘날 영국에서는 아니죠. 학교에서 더 이상 음악을 가르치지 않아요. 예술을 위한 지원도 끊겼어요. 국가 정책과는 다르게 개별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아티스트들도 많긴 하지만요.” 그 또한 회의적인 상황 속에 꾸준히 곡을 써나간다. 예술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술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니나 시몬(1933~2003)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아티스트의 의무는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경제·정치·사회·환경적으로 수많은 질문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행동을 취해야 해요. 예술이 어떤 행동을 결정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고요. 예술을 통해 전달되는 생각을 거울삼아 스스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죠.

그렇다면 음악의 사회적 영향력을 체감한 적이 있나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한 달 뒤, 레너드 번스타인은 세계 각국 출신의 단원들로 구성된 악단과 함께 콘체르트하우스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연주했어요. 여기에 동서독의 시민들이 어우러져, 통일의 뜻에 힘을 보탰죠. 아직 제 작품으로는 느껴본 적 없는 것 같네요.

너무 겸손한 거 아닌가요.(웃음) 이번 신보 ‘VOICES’를 작업하며 당신과 같은 뜻을 지닌 전 세계인들로부터 행동을 이끌어냈잖아요. 이 또한 하나의 사례일 것 같은데요.

많은 분이 참여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사실 선언문에는 문화권에 따라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조항도 있어요. 그런 지역에서는 이 선언문이 환영받지 못하죠. 특히, 선언문에 적힌 인권의 기본조차 위험에 빠져 있는 지역문화권이 있어요. 그런 지역에서도 인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준 이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있었기에 ‘VOICES’가 완성된 거예요.

글 박찬미 기자 사진 유니버설뮤직


RECORDINGS

 

SLEEP
DG 179 5682 (8CD)
막스 리히터(작곡·피아노·오르간·신디사이저), 브라이언 스노우·클레리스 젠슨(첼로), 크리스티안 바주라·율리아 마르(프로듀싱) 외

 

RECOMPOSED BY MAX RICHTER: VIVALDI-FOUR SEASONS
DG 4793229
막스 리히터(편곡), 다니엘 호프(바이올린), 앙드레 드 리더(지휘), 베를린 콘세르트하우스 캄머오케스트라

 

 

THE BLUE NOTEBOOKS
DG 483 5259
막스 리히터(작곡·피아노), 크리스 워시·필립 셰퍼드(첼로) 외

 

 

Voices
Decca 0898651
막스 리히터(작곡·피아노), 엘리너 루스벨트·키키 레인(내레이션), 마리 사무엘슨(바이올린), 로버트 지클러(지휘), 네거티브 오케스트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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