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0일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김다솔의 독주회에서 나는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여인의 모습은 무서우리만큼 생생합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여인에게…
글 박용완 기자(spirate@)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그 공연에서 당신을 발견한 것은, 물론 처음부터는 아닙니다. 당신은 공연 중반까지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죠.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0번 A장조 D959, 이 곡에서 당신 같은 여자를 떠올리긴 쉽지 않을 겁니다. 1악장의 모든 음들이 포르테로 향하는, 포르테를 갈구하는 느낌이었지만, 피아니스트의 의지에 비해 그 섬세함은 덜했습니다. 피아노(p)의 질감들이 포르테만큼 다양하지 못했고 내성이 뭉쳐 들린 점도 아쉬움의 요인이었습니다. 짐작 가능한 지점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조금은 올드한 루바토가 매력을 반감시키기도 했습니다. C장조로의 전조 직전 도돌이표는 지켜지지 않고 반복 없이 이어졌는데, 전조 시 ‘환기’를 위한 장치가 좀 더 확실했으면 어땠을까 싶고요. 왼손 붓점 스타카토들은 충실히 지켜지지 않아 그 ‘잔재미’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쓸쓸하고 여백이 많은 노래로 시작된 2악장에서부터 피아니스트는 ‘뭔가’를 비치더군요. 후반으로 갈수록 극적인 페달링이 폭발하며 고통의 감성은 점점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론도 악장에서 ‘승리의 순간’이 노래 되는데, 곡 전반에 흩뿌려놓은 감성이 너무 무거운지라 그 승리는 지금의 것이라기보다 과거의 회상처럼 쓸쓸하게 들렸습니다.
김다솔을 ‘테크니션’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연주자 스스로도 원하지 않겠죠. 피아니스트에게 요구되는 신체적 기술을 ‘손가락의 것’과 ‘몸의 것’으로 나눈다면, 김다솔은 민첩함ㆍ섬세함 같은, 손가락 근육의 탄력을 요하는 기술보다 전신을 사용하는 ‘힘’의 측면에서 탁월함을 지닌 듯했습니다.
중간 휴식 없이 이어진 프로그램, 슈베르트 후 스크랴빈의 짧은 네 곡이 연주됐습니다. 첫 곡 프렐류드 Bb단조에서 음향적인 면에 방점을 찍는 연주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김다솔은 이 짧은 곡에서조차 내러티브를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스크랴빈 중 마지막인 ‘시곡’을 듣고 나서야 이들 네 작품으로 하나의 거대한 다리가 세워졌다는 걸 알았습니다. 김다솔은 스크랴빈을 슈베르트와 라흐마니노프 사이에 두고, 그 다리에서 내가 당신을 만나게 했습니다. ‘시곡’이 연주되는 중에야 공기는 진한 향수이고, 물은 크리미한 독주(毒酒)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짙은 향수 냄새 풍기는 당신과 독주를 나눠 마십니다. 슈베르트 론도에서 들었던 ‘승리의 노래’는 과거의 것이었음이 확실해집니다. 어느 패망한 왕국, 왕비의 기억처럼 말이죠.
이제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2번이 이어집니다. 피아니스트는 더 느리고 무거워집니다. 꾸역꾸역, 그렇게 어디론가 향합니다. 사실 이 연주를 두고 각 악구마다 터치가 어땠고, 프레이징이 어땠고, 감성이 어땠고… 식의 리뷰는 할 수 없습니다. 굳이 하자면 1악장에서 “취하고 쓰러져라”라는 명령을 받았고, 2악장에서는 거친 거리로 나선 당신의 고백을 들은 듯 나는 그저 너무 슬펐습니다. 3악장은 한마디로 광기의 춤. 결국 독주에 취해, 향기에 취해… 우리는 그렇게 쓰러져버렸습니다. 거짓말처럼, 이 연주를 들은 다음 날 위경련을 일으켜 회사에 병가 신청을 내야만 했습니다!
당신은 곁에 두고 매일 만나고픈 연인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내 기억에서 지울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아직도 눈에 선해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울며 춤추는 당신,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3악장을 연주하는 김다솔의 모습….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당신과 이 피아니스트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겠죠. 나는 또 당신에게 홀릴 것이 분명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