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단을 달린, 기억에 남을 만한 베토벤이었다. 김선욱이 연주한 협주곡 5번은 빛의 화려함보다는 그 속에 투영된 정적과 평화의 세계임을 느끼게 했다. 이후 정명훈과 서울시향이 준비한 교향곡 ‘운명’은 100명이 넘는 4관 편성의 베토벤으로 무장한 채 후기 낭만시대 연주 스타일의 엄청난 소리 폭풍을 선사했다. 1월 1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글 유혁준(음악칼럼니스트) 사진 서울시향
지난해 3월 29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사이클의 첫 시작을 알렸던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콘서트를 보고 ‘봉장풍월(逢場風月)’을 논한 적이 있다(본지 2012년 5월호). 베토벤이라는 굳건한 성곽 안에 갇혀 있지 말고, 때로 위로 날아올라 자유와 인간미를 향유할 수도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1월 1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서울시립교향악단과 베토벤의 협주곡 5번 ‘황제’를 협연하는 김선욱을 바라보며 그 사이 무언가 변화가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우선 예술의전당에 있는 일곱 대의 스타인웨이 피아노 가운데 가장 결이 곱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것을 골랐다.
1악장 오케스트라의 투티 뒤에 바로 이어지는 독주 피아노의 강력한 드라이브가 걸린 분산화음은 무작정 내달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짜인 틀 속에서 계산된 메커니즘도 아니었다. 힘과 멋들어진 기교를 과시하기보다는 자신이 설정한 선을 넘지 않으면서 기막힌 음률의 파고를 그리며 악성 베토벤보다는 인간 베토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워낙 무표정한 김선욱의 겉모양만을 보고는 도무지 그의 일취월장한 해석을 느낄 수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이 피아니스트는 결혼이라는 정신적인 안정과 베토벤 소나타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가슴으로 사무친 작곡가의 내면을 이제 ‘김선욱 표’ 연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은은한 온기는 2악장을 높은 차원의 시정(詩情)에 젖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천상의 노래를 읊게 하는 그의 타건은 한 땀 한 땀 극도로 조탁된 음색으로 점철되었다. 여기에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은 결코 오케스트라가 피아노를 압도하는 법 없이 조력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T.S. 엘리엇의 연작시 ‘황무지’ 1부에 “빛의 가슴으로 바라보면 거기에는 정적뿐”이라는 시구가 있다. 김선욱이 일궈낸 베토벤은 이제 빛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속에 투영된 정적과 평화의 세계임을, 가슴 벅찬 감동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강인한 베토벤이 없었다고 평하는 관객은 곰곰이 되새겨보라. 그간 김선욱의 베토벤 여정이 낮은 자의 자세로 귀결되고 있음을.
후반부 서울시향이 준비한 교향곡 ‘운명’은 전반부와는 완전히 다른, 100명이 넘는 4관 편성의 베토벤으로 무장한 채 후기 낭만시대의 연주 스타일을 들고 나와 엄청난 소리 폭풍을 전개했다. 마리스 얀손스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내한에서 들었던 깔끔했던 베토벤과는 180도 다른 해석이다. 세세한 각론보다는 총론을 우선시하는 ‘정명훈 식 베토벤’의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2악장의 넉넉한 템포는 비장미를 풍겼고, 3악장에서 저현에서 고현으로 이동하는 트리오의 전개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아타카로 이어지는 4악장 초입은 그야말로 용암이 서서히 끓어올라 분출하는 듯한 다이내믹의 변화를 올곧게 보여주었다. 서울시향의 관객에 대한 새해 이벤트는 빈 신년 음악회의 틀에 박힌 인사보다 더 극적이었다. 악장의 리드 아래 비제의 ‘파랑돌’을 리드미컬하게 들려주더니, 트롬본 부수석 제이슨 크리미가 마이크를 잡고 정명훈 지휘자의 60회 생일을 유쾌한 우리말로 축하하며 청중과 하나 되었다.
양극단을 달린, 기억에 남을 만한 베토벤이었다. 콘서트홀의 음향과 녹음상의 문제로 인해 그동안 서울시향의 음반은 연주의 질에 비해 음향 때문에 과소평가된 것이 사실이다. 이번 실황 음반은 시야를 가릴 만큼 복잡하게 세팅된 마이크만큼이나 공을 들이기를 바란다. 결국 언제든 녹음이 가능한 전용 홀이 해법이다. 대한민국 대표 악단이 언제까지 집 없는 설움을 당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