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다’

기시감과 같은 삶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2월 1일 12:00 오전

의미심장한 제목처럼 작품에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슬픔이 배경으로 깔려있다. 하지만 너무 다양한 서사와 상징 때문에 경계에 대한 의미는 약화되고 모호해졌다. 다양한 층위의 현실적 경계에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그리고 시공간에 대한 인식과 존재에 대한 성찰로 인해 오히려 작품의 초점이 흐려져 무엇을 말하는지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2012년 12월 29일~2013년 1월 20일, 남산예술센터.
글 이은경(연극평론가) 사진 남산예술센터

‘사라지다’를 쓰고 연출한 이해성은 이 작품을 ‘경계’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동성애자인 신정, 전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상강, 우울증이 심한 청명, 유부남과 연애하는 동지, 트렌스젠더 말복 그리고 죽은 윤주 모두 경계에 놓인 인물이다. 하지만 다른 인물들에 비해 윤주가 놓인 삶과 죽음의 경계가 가장 극단적이다. 내레이션으로 존재하다 마지막 순간에서야 등장하기 때문에 시청각적 이미지도 강하다. 경계보다 ‘나는 누구인가’를 반복적으로 되뇌는 윤주의 존재론적 질문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사실과 상징이 혼재하는 무대에서 먼저 눈에 띈 것은 나란히 걸린 두 개의 벽시계였다. 펠릭스 곤살레스 토레스의 설치미술 ‘무제(완벽한 연인들)’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지만 원작과 달리 완전하게 다른 시간을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이 몰입해서 보던 프랑스 영화는 시공간의 어긋남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을 그린다. 서브텍스트인 무대, 영화에는 시공간에 대한 인식이 담겨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제목처럼 작품 전반에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슬픔이 배경으로 깔려있다. 이처럼 너무 다양한 서사와 상징 때문에 경계에 대한 의미는 약화되고, 모호해졌다. 다양한 층위의 현실적 경계에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그리고 시공간에 대한 인식과 존재에 대한 성찰까지 담아내려는 의욕과잉으로 초점이 흐려져 무엇을 말하는지 혼란스럽다. 과유불급이 아닐 수 없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자연의 절기에 기대 명명되었지만 인물의 특징에 따라 구분된다. 24절기에 속한 청명·상강·동지와 이에서 벗어난 말복과 신정, 그리고 확연히 구별되는 윤주라는 이름에는 인물 각각의 상황이 내포되어 있다. 말복과 신정은 성정체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윤주는 이미 죽은 자여서 나머지 인물들과 다른 시공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는 매우 치밀한 전략으로 등장인물의 삶을 구축했다.
이번 공연에서 인상적인 것은 젊은 여배우들인 황세원·박윤정·우수정·김원정의 조화를 이룬 연기였다. 물론 편차는 있었지만 일상성이 살아있는 자연스러움으로 인물의 성격을 확실하게 표현했다. 특히 동지를 연기한 황세원이 돋보였다. 통념적으로 사회적 금기를 넘어선 인물들이지만 관객이 편견이나 거부감 없이 인물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배우들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말복 역의 박용수는 너무 파격적인 연기변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인지 기대에 못 미쳤다. 특유의 느릿한 저음의 남성적 화법이 인물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데 방해가 되었다.
이번 공연에서 아쉬웠던 점은 양식적으로 연출된 내레이션을 과도하게 삽입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윤주와 애인을 실제로 등장시킨 것이다. 영상과 함께 공연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고, 등장인물의 대화 속에 개입하는 내레이션은 은유와 상징이 넘치는 모노톤의 장광설이어서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의식적으로 강조한 연출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관객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윤주와 그녀의 애인이 등장하는 순간 현실과 환상의 괴리를 체감하게 된다. 관객은 더 이상 극 속에 개입할 최소한의 상상 공간도 갖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이번 공연은 너무 산만하고 설명적이었다. ‘사라지다’는 공연보다 희곡으로 만났을 때가 더 흥미로웠다. 디테일한 감정표현으로 살아나는 인물의 성격, 일상적이지만 문학적 향취를 담고 있는 절묘한 대사, 30대 여성심리의 생생한 현실적인 재현이 참으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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