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서울 강남의 한 사진 스튜디오에서 이듬해 신년 호에 발표될 본지 선정 ‘차세대 젊은 예술가 10인’의 촬영이 진행됐다. 당시 예원학교 2학년이었던 조성진, 같은 학교 입학을 앞둔 김한을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만날 수 있었다. 성진 군은 수줍은 호빵맨, 한 군은 설국의 뽀로로를 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만 4년이 흘렀다. 그곳에 모였던 어른들에겐 적어도 겉으로는 큰 변화가 없지만, 소년들은 그 외모부터 커리어까지 몰라보게 성장했다. 그중 2월 21일 금호아트홀 리사이틀을 앞둔 클라리네티스트 김한과 이메일로 대화를 나눴다. 답변 한 문장 한 문장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소년의 행복이 묻어난다. 마지막 질문 “김한 군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어요?”, 돌아온 대답에 2008년 겨울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때도 한 군은 “멋있는” 뽀로로였으니까!
요즘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나요?
영국은 3학기로 되어 있어 이미 1월 초에 개학을 했습니다. 겨울 방학 기간 중인 지난 12월 보름간 서울에 머물렀는데, 화음체임버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국제교류재단 송년음악회, ‘손열음과 친구들’ 등 크고 작은 연주로 조금 바쁘게 보냈어요. 지난해 말부터 약 2주간은 플루티스트 조성현 형ㆍ오보이스트 함경 형과 독일에서 함께 지내면서 구경도 많이 하고, 현지 제야음악회에서 목관 앙상블 연주도 하고…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1월 중순 현재) 개학한 지 2주 정도 됐는데요, 올해 대학 입시를 준비해야 돼서 학교 수업과 시험 준비로 무척 바쁘게 보내고 있어요. 그래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악기 연습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지금 재학 중인 이턴 칼리지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학과 수업과 실기를 어떻게 병행하나요?
이턴 칼리지는 예술학교가 아닌 인문계 학교이기 때문에 음악 전공을 목표로 입학하는 학생은 거의 없는 듯해요. 일반 고등학생들과 똑같은 학과 수업을 받아야 하고, 저희 학교가 전통적으로 음악교육을 워낙 중시해서 굳이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학생들 대부분이 각자 수준에 맞는 악기 레슨을 외부 강사님들께 일주일 한 시간 정도 받고 있습니다. 저도 여느 학생들과 똑같은 빈도로 레슨을 받고, 학과 수업 및 숙제를 해가며 그 나머지 시간에 틈틈이 개인 연습을 병행합니다. 음악 전공 학생을 위해 별도의 연습 시간을 내준다든지, 외부 연주를 위한 결석을 허락해준다든지 하는 배려가 없어 힘든 점도 있지만 다양한 친구들을 사귈 수 있고 여러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지금의 학교 생활에 무척 만족하고 있어요. 음악 전공을 염두에 두지 않음에도 음악적인 재능이 무척 뛰어난 친구들이 간혹 있어서 자극이 됩니다.
지금은 어떤 선생님께 배우고 있나요?
영국에 있을 때는, 길드홀 스쿨에서 가르치시는 앤드루 웹스터 선생님께서 일주일에 한 번씩 학교로 오셔서 개인 레슨을 해주세요. 젊고 에너지가 풍부한 분이라 저와는 궁합도 잘 맞고, 경험도 많으시고 굉장히 재미있게 가르쳐주셔서 즐겁게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학을 맞아 한국에 올 때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지도해주신 이용근 선생님을 꼭 찾아 뵙고 레슨을 받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7년 이상 많은 가르침을 주셨기에 저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세요. 제가 일반 학교에 있으면서 연습을 게을리하진 않는지, 나쁜 습관이 생긴 건 아닌지 항상 챙겨주시고 많은 조언을 해주십니다.
닐센 콩쿠르, 그리고 ARD 콩쿠르(목관 5중주 부문)를 준비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준비는 잘 되가나요?
앗, 비밀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아직 어리고 배울 것도 많은데다 부모님께서도 입시 공부와 병행하는 게 힘들 거라 만류하셔서 이번 닐센 콩쿠르에 나갈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 자신에게 새로운 자극과 도전이 필요한 것 같아 도전해보기로, 지난 연말에서야 결심했습니다. 4년 전 베이징 콩쿠르를 준비할 때, 진짜 열심히 연습하고 공부도 많이 했던 기억이 나거든요. 물론 입상을 하면 정말 좋겠지만, 콩쿠르를 준비하며 연습에 보다 더 집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지금보다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고요. 콩쿠르 지정곡들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되도록 자주 연주하려고 노력하는데, 특히 이번 콩쿠르를 위해 새롭게 배운 몇몇 곡들은 리사이틀과 협연을 통해 관객 분들께 먼저 선보일 예정입니다. 이번 ‘금호아트홀 라이징 스타’ 무대는 많은 레퍼토리를 연주할 때 어떻게 체력 안배를 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합니다. ARD 콩쿠르는,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다기 보다 지난해 디토 페스티벌을 계기로 많이 친해진 오보이스트 함경 형, 플루티스트 조성현 형 등과 함께 연주도 하고 실내악 공부도 하며 자연스럽게 생긴 목표입니다. 현재는 방학 기간 독일에 모여 현지의 바순ㆍ호른 주자 등과 함께 재미있게 연주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정도입니다. 아직 준비 기간이 많이 남아 있어 구체적인 계획은 없습니다. 하지만 콩쿠르 참여 여부를 떠나 지금처럼 계속 목관 앙상블 활동을 병행했으면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김한 군이 우리 나이로 벌써 18세가 됐습니다. 대입을 준비할 나이예요.
대입 시험은 지난해부터 진행되고 있고, 우리나라로 치면 수능 시험이 과목별로 여러 번에 걸쳐 올해 내내 진행될 예정입니다. 영국의 경우 에이레벨(A-
level)이라는 대학 입학 전 2년간의 고등교육과정에서 시험 교과목 3~4과목을 택해야 하는데 저는 그중 하나를 음악 과목으로 선택했어요. 그래서 화성학ㆍ음악사 등 보다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대학교를 목표로 할지 확실히 정해진 것은 없지만 지금 배우고 있는 과목들이 제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김한 군 어린 시절 연주 동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때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연주들이 워낙 미숙하고 보기 민망한 것이 많아서 저는 잘 찾아보지 않는 편이에요. 어쩌다 보게 되면 ‘아, 그래도 이때보다 조금 나아지긴 했구나’라는 위안을 합니다. 전 세계에서 남겨주신 다양한 댓글들이 살짝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극제가 됩니다.
이번 금호아트홀 리사이틀 프로그램을 소개해주세요.
제가 금호아트홀에서 갖는 세 번째의 리사이틀입니다. 돌이켜보면 2008년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올랐던 금호 영재 콘서트의 프로그램은 “내가 이 나이에, 기술적으로 이렇게 어려운 곡들을 이렇게 틀리지 않고 잘 할 수 있어요!”라고 테크닉을 자랑하는 데 초점을 맞췄던 것 같고, 2010년 금호 영재 신년음악회 때는 “내가 이 나이에, 이런 곡들을 어른 못지않게 잘 연주할 수 있어요!”라고, 흔히 말하는 기성 연주자 흉내를 내는 프로그램들을 선보인 듯해요. 그에 반해 이번엔 저만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는, 깊은 음악적 해석을 요하는 각기 다른 세 가지 형식의 클라리넷 고전들을 전반부와 후반부의 메인으로 배치하고, 한국적인 면과 현대적인 면이 대비를 이루는 두 개의 독주곡을 1ㆍ2부 한 곡씩 준비했습니다. 관객들께 저의 성장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데 초점을 맞춘 셈이지요. 슈만이나 브람스, 드뷔시의 곡은 클라리넷 연주곡으로는 최고의 명곡으로 손꼽히기에 다른 연주자들과 차별되는 연주를 보여주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하고 있고요. 제가 무척 좋아하는, 이건용 선생님의 독주곡 ‘저녁노래’에서는 서양음악과 다른 한국적 감성을 클라리넷 음색으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현대 클라리넷 독주곡인 비트만의 판타지는 클라리넷으로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소리를 경험할 수 있는 곡으로, 기술적으로 무척 까다롭고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신선하고 재미있는 곡이니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관객 분들의 호응이 있을 때를 대비해 재미있는 앙코르도 준비 중이고요!
(슈만 ‘세 개의 로망스’ Op.94, 이건용 독주 클라리넷을 위한 ‘저녁노래’, 드뷔시 ‘첫 번째 랩소디’, 비트만 ‘독주 클라리넷을 위한 판타지’, 브람스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번 Op.120-1)
드뷔시의 ‘첫 번째 랩소디’는 2010년 1월 리사이틀에서도 선보였습니다. 지난 3년, 이 곡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3년 전 이 곡을 연주했을 때는 각 부분의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하지 않고 연주하는 게 목표였던 것 같아요. 음악의 흐름이나 작곡자의 의도 같은 것들은 생각할 여유도 없었고요. 그 후로 다양한 음악 공부를 하면서 기술적인 부분보다, 프레이즈를 넓게 보고 곡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특히 드뷔시의 곡은 전체적인 흐름을 잡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발전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시 리사이틀 2부에서 스키니진에 하이탑 운동화 차림으로 등장했습니다. 야광 스틱을 양 발목과 벨에 붙이고 슈토크하우젠의 ‘우정’을 연주했지요. 소리의 운동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준 무대였습니다. 누구의 아이디어였나요?
이 곡은 제가 사사 중인 이용근 선생님께서 리사이틀 앙코르로 연주하셨던 곡입니다. 선생님께서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주셨고, 그 아이디어를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야광 스틱을 구했습니다. 빛의 반사를 최소화하면서도 움직이기 편한 옷차림 등에 대해서는 부모님께서 많이 도움을 주셨어요.
‘우정’ 연주에서도 그렇고, 유키 구라모토 크리스마스 콘서트 때는 캐럴을 연주하며 무대로 걸어 들어오기도 했지요. 김한 군이 생각하는 ‘클래식 음악가’는 얼만큼 점잖아야 합니까? 혹은 얼만큼 점잖지 않아도 되나요? 꽤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은 점잖고 이런 ‘대중적인’ 시도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려서부터 남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고 남들 웃기는 것도 좋아하는 성격인지라, 저 자신이 ‘클래식 음악가’기에 점잖아야 한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고정관념과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을 다른 음악만큼 편하게 대하지 못하고, 그래서 조금 거리를 두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많은 경험과 공부를 하면서, 대중이 클래식 음악을 친근하게 생각하고 좋아할 수 있도록 돕는 여러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습니다.
‘디토’ 얘기를 해볼까요. 지난해 디토 페스티벌에 참여해 스트라빈스키 ‘병사 이야기’, 메시앙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 프로코피예프 5중주 등을 연주했는데 얼마나 연습을 했나요? 짧은 시간 안에 맞추기 어려운 곡들이지만, 김한 군이 무척 잘해주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디토’와의 시간은 즐거웠나요?
연주에 참여하셨던 분들이 워낙 바빠 함께 모여 연습할 시간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악보를 우편으로 전달받고 훑어본 후, 연주 시작 이틀 전에 한국으로 들어와 형들과 맞추기 시작했으니까요.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의 경우 투어 앞 부분에 연주해야 했고 클라리넷 솔로가 있어 따로 연습을 조금 해두었지만, 나머지 곡들은 모여서 두세 번 연습하고 바로 무대에 섰습니다. 형들이 워낙 잘 이끌어주셔서 큰 어려움은 없었고, 여러 번 같은 프로그램으로 공연하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훨씬 잘 맞는 느낌이 들어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부족한 저를 데리고 함께 연주해준 형들한테 굉장히 고마웠습니다. 한 달 정도 전국을 함께 돌아다니면서 연주했는데 배운 것도 정말 많고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실내악 연주 기회가 많으면 좋겠습니다.
미치게 놀고 싶을 때는 없나요? 클라리넷 두어 달 불지 않고 말이죠.
왜요, 많죠. 클라리넷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 클라리넷을 2~3일만이라도 손에서 놓아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7년 정도 되었네요. 클라리넷이라는 악기가 단 하루라도 연습을 안 하면 기본기가 흐트러진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클라리넷 연습도 적당히 하면서 놀 때는 미치게 놀려고 늘 노력합니다. 사실 주변 친구들보다 적게 노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 허허.
존경하는 음악가가 있습니까?
사실 딱 꼽아서 “이 사람이다”라며 존경하는 음악가는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종류의 많은 음악을 접하다 보니, 이 사람은 이래서 좋고, 저 사람은 저래서 좋고… 그런 식이죠.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많은 음악을 듣고 모든 음악가로부터 좋은 점을 찾아내 최대한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김한 군이 생각하는 ‘음악가’는 어떤 사람이죠?
음… 할머니(박노경 서울음대 명예교수)ㆍ큰 아빠(김승근 서울음대 교수)처럼 주변에 ‘음악가’ 분들이 많아서인지 오히려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데요. 지금 문득 든 생각인데, ‘음악을 사랑하는 누구나’ 음악가가 될 자격이 있지 않을까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습니까?
사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분에 넘치게 많은 관심을 받는 이유도 아직 어려서인 것 같고, 주변의 형ㆍ누나들이 하도 어린 게 좋은 거라 말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나이는 항상 만 나이로 얘기한답니다, 허허. 지금 생각엔, 늘 공부하는 마음으로 다른 이들에게서 배울 점을 찾는, 저 자신을 낮추는, 어디를 가나 환영 받는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글 박용완 기자(spirate@) 사진 이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