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요가 리허설 때 강조하는 “배우가 되어라, 댄스로 말하라”의 지침을 김지영은 에너지를 응축했다가 로미오를 자극하는 장면에서 한꺼번에 분출하는 방식으로 체화했다. 이동훈은 줄리엣에게 비중이 역전되어 있는 로미오의 천진함을 수줍은 소년의 인상으로 노출했다.
글 한정호(무용 칼럼니스트) 사진 국립발레단
2000년 이후 국내에서 가장 각광받는 발레 안무가는 장 크리스토프 마요이다. 몬테카를로 발레의 내한 공연과 국립발레단의 정기 공연을 통해 ‘신데렐라’ ‘라 벨’ ‘달은 어디에’ 등 마요의 다양한 작품이 국내 관객과 만났다.
국립발레단은 2000ㆍ2002ㆍ2011년에 이어 장 크리스토프 마요 버전 ‘로미오와 줄리엣’의 네 번째 전막 공연을 가졌다(2월 14~1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필자는 16일 관람). 2000년 초연으로 관객의 눈높이를 한껏 끌어올리고 2년 전 정명훈 지휘로 클래식 음악 팬들까지 한데 모았던 화제작이다.
5회 공연은 단일한 주역 캐스트로 진행됐다. 2년 전처럼 김지영·이동훈·이영철이 각각 줄리엣·로미오·로렌스를 맡았고 스페인 국립무용단 소속의 김세연이 캐퓰릿 부인 역에 이름을 올렸다.
줄리엣 역의 김지영은 장신의 근육질 댄서, 베르니스 코피에테르를 감안하고 만든 마요 발레의 뮤즈상을 지운 대신, 여성성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아로새겼다. 멀리 서 있기만 해도 저 여체는 코피에테르임을 확연히 알 수 있는 원전과 비교해 김지영은 천변만화의 표정과 어깨에서 손끝까지 흘러내리는 근육의 섬세한 떨림으로 객석의 관음 욕구에 부응했다. 2011년 아시엘 우리아게레카(몬테카를로 발레)와의 파트너십에서는 쉽사리 보이지 않던 관능미는 유모 앞에서 상반신을 벗으며 성인임을 드러내는 극 초반부터 드러났다. 장 크리스토프 마요가 리허설 때 강조하는 “배우가 되어라, 댄스로 말하라”의 지침을 김지영은 에너지를 응축했다가 로미오를 자극하는 장면에서 한꺼번에 분출하는 방식으로 체화했다. 전통적인 마임이 없는 마요 발레에서 감정의 조울을 표정 연기로 때우지 않는 적극적인 해석은 추상과 구체를 동시에 담아내려는 안무가의 고민을 돌아보게 한다.
로미오 역의 이동훈은 시종일관 속도감이 넘쳤다. 8박자 비트를 타고 진행되는 주요 패시지에서 이동훈은 줄리엣에게 비중이 역전되어 있는 로미오의 천진함을 수줍은 소년의 인상으로 노출했다. 그러나 “무대 위 무용수를 날아다니게 해주겠다”는 2년 전 정명훈식 서포트와는 달리, 계산된 동작에 의미를 더하는 지휘가 따르지 않을 때 이동훈의 순발력은 제한적이었다. 무대 밑에서 무용수의 스텝워크를 확인하며 약속된 장단을 주는 데 있어 코리안심포니를 이끈 마르치오 콘티는 발레 지휘자의 미덕을 보여주지 않았다.
조역의 연기와 기교는 무르익었다. 줄리엣의 어머니, 캐퓰릿 부인으로 분한 김세연은 이야기 흐름이 이완될 때, 절제된 교태로 분위기를 끌어왔다. 미끈한 선으로 조카 티볼트를 자극하고, 티볼트를 잃고 절규하는 장면은 김세연이 기존에 국내에서 보였던 민첩한 테크니션의 면모와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다만, 고전과는 이질적인 캐퓰릿 부인의 캐릭터가 줄리엣 아버지의 부재를 대신해 부성마저 포용하는 인물임을 드러내는 연기에는 보강이 필요하다.
중요한 국면마다 등장인물을 응시하는 로렌스 신부 역의 이영철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을 만들어냈다. 오랜 경험을 통해 마요식 존재감을 정확히 읽은 이영철의 습득력은 국립발레단의 든든한 자산이다.
훌륭한 무대는 발전적인 아쉬움을 낳는 게 당연하다. 2013년 국립발레단의 라인업은 신작을 내세우기보다 기존 버전의 명품화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클래식을 벗어나면 전막 캐스팅을 몇 개 내놓지 못하는 현실은 명품화 선언을 공허하게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