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젤의 ‘미국식 밝음’은 모차르트 교향곡 ‘주피터’를 고루한 모차르트의 재현에 머물게 했다. 청중의 귀는 마냥 행복했으되 가슴을 울컥하게 하는 풍운아 모차르트의 광기는 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관악기가 이토록 아름다우면서도 폭발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브람스의 교향곡 2번에서 맛보았다. 모차르트를 생각하면 절반의 성공이었다. 2월 6~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6일 관람).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현대카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창단 123년 만의 첫 내한 공연이 열린 2월 6일 저녁. 음향을 중시하는 운영진의 의지는 드넓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를 그들에 맞게 최적화시켜, 단을 쌓지 않고 모든 악기를 수평으로 펼쳐놓는 파격을 보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1930년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에 의해 만들어진, 바이올린과 첼로가 좌우로 갈리는 편성으로 ‘미국 사운드’를 고집하고 있었다.
2004년 라 스칼라 필하모닉의 내한에서도 리카르도 무티는 자신의 지휘대를 들고 왔었다. 이는 시카고 심포니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로린 마젤로 지휘자가 교체되었음에도 무티 체제하에서 익숙한, 시카고 심포니홀에 있는 2단 높이의 지휘대를 공수해오고야 말았다. 이 모든 것이 내한공연 무대에서 최대한 시카고 현지에 근접한 음악을 들려주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진정한 프로였다.
시카고 심포니의 휘황찬란한 금관을 마음껏 즐기기에는 무티가 선곡한 스트라빈스키의 ‘요정의 키스 디베르티멘토’가 제격이었다. 이에 반해 마젤은 모차르트를 들고 나왔다. 교향곡 41번 ‘주피터’ 1악장의 강력한 포르테의 제1주제가 객석으로 전해졌다.
현악기는 참으로 기름졌다. 좌우 밸런스는 컴퓨터처럼 정확했고 은은하게 솟구치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적어도 사운드에 관한 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세계 최고의 경지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뿐이었다. 느린 템포로 일관하며 낭만주의풍으로 해석한 마젤의 ‘미국식 밝음’은 고루한 모차르트의 재현에 머물고 말았다.
시대악기 연주를 무작정 경쾌하고 빠른 것으로 가두어버린다면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기 쉽다. ‘궁정사회의 시민음악가’ 1호인 혁명가 모차르트의 진정한 면모는 베토벤보다 더 광폭한 에너지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다이내믹의 간극을 보여줄 때 가능하다.
200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열렸던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축하 공연에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빈 필을 지휘하며 보여주었던, 필자를 극도의 긴장감으로 몰고 갔던 연주가 떠올랐다. 2차 대전 후 모차르트 음악을 아름답게, 또 아름답게만 다듬었던 오류를 마젤은 여전히 반복하고 있었다. 그건 마젤의 한계이기도 했다. 3악장 미뉴에트는 그저 춤곡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청중의 귀는 마냥 행복했으되 가슴을 울컥하게 하는 풍운아 모차르트의 광기는 들을 수 없었다.
이러한 마젤의 지휘봉은 브람스의 교향곡 2번에서 대단한 효과를 보았다. 1악장 도입부, 저현군의 움직임은 거대한 파도와도 같이 앞으로 밀려왔다. 스타카토의 둔중함은 천근의 무게감을 싣고 있었고, 특히 호른 섹션의 농익은 소리는 절로 감탄을 유발하게 했다.
2악장, 하강하는 첼로의 노래는 사유하는 브람스가 추구하는 이데아의 세계에 다름 아니었다. 4악장 재현부 이후에 포효하는 금관이 어우러질 때 시카고 사운드는 극점에 이르렀다. 이것은 두 번째 앙코르로 들려준 ‘로엔그린’ 3막 전주곡에서 더욱 활활 타올랐다. 우리는 관악기가 이토록 아름다우면서도 폭발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실연으로 맛볼 수 있었다. 모차르트를 생각하면 절반의 성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