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무용가 안은미

니체 변용의 춤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3월 1일 12:00 오전

인간 몸의 경계에서 표독스럽고, 때로는 잔인한. 그것도 모자라 일상에 녹아있는 움직임을 직시하는 한 무용가가 있다. 혹자는 예술을 끊임없는 자아도취 끝에 나오는 하나의 산물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끝도 없는 자기 성찰과 비판, 성화의 올가미가 존재한다. 작가의 의식이 닿는 시선을 따라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예술’로서의 가치가 발현되는 시점이자 ‘예술가’로서의 온전한 노동을 감내한 셈이다. 니체는 말했다. “하루라도 춤추지 않은 날은 헛된 날이다.” 그가 말하는 ‘춤’은 어떤 의미의 춤이었을까. 안은미의 눈동자를 바라보는데 왜 하필 이 문장이 빛나고 있었을까.
삶의 여정을 한 편씩의 작품으로 담아내고 있는 현대무용가 안은미는 ‘신 춘향’에서는 고전의 담론 속에 잠들어 있는 인간을 떠올려 시대에 맞는 여성으로 재해석했고, ‘바리’를 통해 생의 의미를 고찰시켰으며, ‘let me Change Your Name’ ‘하얀 달’ ‘Please, Catch Me’ ‘Mucus & Angeles’…. “모든 게 나의 대표작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만난 인간들의 몸의 순화를 이제 만나게 된다. 그의 고민의 흔적은 여실하게 작품으로 남아 있고, 그가 생각하고, 말하고, 덧입혀지는 모든 것을 우리는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왜 춤을 추는가. 스스로를 사회적이지 않은 인간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이렇게도 치열하게 사회적일 수가 있을까.
허공 아닌 현실에 직시하고 있는 한 예술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오늘도 우리는 춤을 춘다. “하루라도 춤추지 않은 날은 헛된 날이다.”
니체여, 보고 있는가.

 

어렸을 때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가만히 있지를 않았습니다. 잠도 잘 안 자고, 늘 뛰어다녔죠. 걸어 다닌 기억도 별로 없습니다. 산이고 들이고 온 동네를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는 나를 어머니 아버지는 지켜만 보셨지요. 그것이 우리 시대의 교육법 아니었겠습니까. 나는 시대를 잘 타고나서 ‘방목’ 당하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선하고 바른 분들이셨기 때문에 나의 네 형제들의 행동은 늘 정당했고, 모두 각자의 성격에 맞게 알아서 클 수 있었습니다. 나는 생각의 전개가 빠르고, 스스로의 장점과 한계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어릴 적 한국무용이란 걸 처음 봤는데 옷이 얼마나 화려한지, 그날로 저 춤을 추겠다고 했습니다. 아, 그런데 춤을 춰보니 이건 동작이 차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다 맨발로 추는 춤을 만났죠. ‘저거 나의 길이다’ ‘나를 위한 길이다’ ‘내가 가야 할 길이다.’ 돌아보면 내가 가진 주체못할 에너지가 어디로 가야 하는 게 맞는가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열두 살이었나, 열세 살이었나. 어머니가 한국무용 학원에 가보라며, 월사금 사천 원을 주셨지요. 여섯 달 만에 그 월사금은 영어 과외비로 들어갔지마는… 나는 그렇게 무용을 처음 보고 만났습니다.
이 사회에서 춤은 어디로 갔습니까?
요즘 아이들은 전자 기기와 친숙합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기기에서 나오는 전파들에는 오만 가지 음악과 춤이 있습니다. 내 시선으로 그들은 참 못할 게 없습니다. 많은 춤과 흥이 그 안에 들어 있는데, 어찌 보면 하나같이 천편일률적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춤추게 만드는지 고민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원시로 돌아가 보면 지금 이시대는 춤이 없어져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인류의 탄생 이래 이렇게 춤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왜 그랬겠습니까. 잘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영역의 분화를 인정하는 것 등이 만연한 문화 속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놓여 버렸습니다. 춤은 몸의 역사이자, 삶의 역사입니다. 사람은 타고난 대로 움직입니다. 한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도 팔이 긴 사람이 있고, 허리가 긴 사람이 있고요. 힘이 장사인 사람이 있고, 가냘픈 사람이 있습니다. 유쾌하거나 대범한, 혹은 소심한 사람들이 있지요. 이 모든 것은 생긴 대로 살다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그 사이에 지금의 나는 춤꾼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합니다. 결론은 하나입니다. 그들을 기록해보자. 때마침 함께 작업하는 극장과 손을 잡고 ‘리서칭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리서칭? 그거 좋다.” 이시대 사람들의 춤의 역사라고 하면 너무 거창합니까?
뜬금없지만, ‘안은미의 이십대’가 궁금합니다.
나의 20대를 돌아보면, 그때도 평범하지는 않았습니다. 일 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색 옷을 입고 다녔던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스타일이라며 한여름에 땀을 흘리고 다녔지요. 누가 보든 말든 나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고,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선택했습니다. 당시에는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난 그것만 입으면 살 것 같았습니다. 정말로 사서 입고 나니, 기운이 생동하더만요. 내가 머리를 깎고 산 지 2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머리를 왜 깎았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지금도 이것이 주목받을 일입니까? 세상이 그만큼 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지요.
돌아가겠습니다. 최근 찾은 ‘문제 설정’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다들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입니다. 나는 3년 전부터 카메라 어깨에 둘러메고, 차에 자전거 몇 대, 버선 200켤레 사서 싣고 팔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들이 울다가 웃다가 하십니다. 춤 한번 추시겠냐 하니 동네잔치에서 추던 춤사위가 나옵니다. 아들·며느리 이야기 다 나옵니다. 올해도 준비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3년 전 할머니들을 만나러 다닌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이름은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였지요. 근·현대를 살아낸 우리나라 여인들, 그들의 오마주에 주목하고 싶었습니다. 그네들이 산 세월은 웃을 수만은 없는 재미가 있습니다. 타국의 강점기를 겪었지요, 전쟁을 겪었지요, 그리고 산업시대가 갑자기 도래해 IT문화까지 봐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과연 어떤 동작을 가지고 있나. 무작정 리서칭했지요. 이듬해인 2012년에는 10대들을 만나러 돌아다녔습니다. 이 사람들은 고민이 많습니다. 학교도 가야겠고, 다음 학교(대학)도 가야겠고, 여자 친구도 만나야겠고, 또 동시에 두 사람이 좋아지기도 한답니다. 빨간 바지에 귀마개를 끼고 희한한 사람이 교실 문을 열고 가면 일단 아이들은 흥분을 합니다. 몇십 분 동안 사심 없는 이야기를 하고, 단원들과 함께 한판 걸지게 춤을 추고 나면 그들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뇌가 한 번 흔들리는 거거든요. 어디 가서 춤을 추겠습니까. 학교에 앉아 공부나 하지요. 뇌세포가 한쪽 방향으로 흐르다가, 반대로도 가고 하지요. 우리는 그 춤을 “사심 없는 땐쓰”라 불렀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자라나는 감성에서 또 다른 것들을 발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춤은 춤입니다. 춤으로써 대화하고 춤으로 치유하면 됩니다.
할머니, 청소년에 이어 이번에는 아저씨라고 들었습니다.
올해는 아저씨들을 만났습니다. 한국의 지형을 걸어보셨습니까? 재미있는 곳이 많습니다. 시골의 뒷골목을 돌자 한 아저씨가 배추를 나르고 있습니다. 중국집 앞에서 아저씨 행색을 한 한 젊은 남성을 만났습니다. “아저씨 춤 좀 추십니까?” 묻자 배추통을 옆에 두고 춤을 춥니다. 얼굴은 30대인데, 나이는 40이 넘었다고 해요. 우리가 그때 40대가 넘은 아저씨들을 찾았거든요. 카메라 앞에서 춤이라니, 급기야 자장면 한 그릇을 들고 나와 ‘자장면 먹는 춤’을 춥니다. 세상에 재밌는 사람 참 많습니다. ‘아저씨들을 위한 무책임한 땐쓰’(3월 1일~3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를 춰볼까 합니다. 사회에서 ‘책임’이라는 무게만 지며 살고 있는 우리나라 40대에서 60대 사이의 아저씨들의 춤 말입니다. 그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저씨가 되어 있더라”라고요. 이시대 ‘아저씨’들에게 ‘춤’이라는 주제는 실로 음란한 문화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문화와도 관련이 있겠지요. 그러나 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노동요나 농악 등 삶과 연계한 음악 속에 춤은 남아 있고, 늘 있어왔습니다. 농경의 세대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죠. 단절되거나 희소되고 있는 현상들 때문에 갈수록 생(生)에 활기를 주던 춤이 없어집니다. 나는 웃으며 말을 합니다. “움직여보세요.” 그 속에 가정 문화·직장 문화·지역 문화 다 들어 있습니다. (언어 없는) 춤의 인류학. 그것을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알려주고 싶었지요. 아저씨, 이제 그만 무장해제하세요.
‘춤의 인류학’이란 용어가 참 재밌고, 맞는 말입니다. 예술가가 대중을 만나는 게 쉽습니까?
대중이 어려워하지 예술가가 어려울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틀을 깨고 나가지 않으면 삶에서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술이 어느 순간 고급의 문화라는 자리로 올라 나와는 상관없는 어떤 것이라는 관념으로 다가와 버렸습니다. 우리와 많이 멀어졌지요. 다가오는 4월, ‘피나’ 관련 작업도 같은 선상입니다. 좋은 예술가를 발견했다면 그것을 바라본 대중과 만나게 하는 것도 나의 역할인 것 같습니다. 좋은 작품이 사라지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 ‘피나’ 영화를 본 일반 사람들 150명이 오디션을 보러 모였습니다. 굉장히 재미있는 예술의 재생산을 기대해봅니다. 내가 나의 춤의 주인이고 싶은 만큼, 내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컨템퍼러리의 작업은 늘 인상적입니다. 인생의 협업자는 누굽니까?
나에게 춤출 수 있는 음악이 없었을 때, 나는 우리 동네 레코드 가게 오빠와 친해졌어야 했습니다. 수시로 드나들며, “새로 나온 음악 좋은 거 없어요?” 물어보면 친절하게 대답해줍니다. 이 동네 정보가 신통치 않으면, 옆 동네 가서 물어봅니다. 들려달라고 하면 신이 나 들려줍니다. 그럼 나는 머릿속으로 끊임없는 공상을 합니다. 춤도 만들고, 이야기도 만들어내고요. 내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작곡가 장영규는 나를 위해 태어났다고 내가 말했습니다. 나는 그를 그가 20대 후반일 때 처음 만났습니다. 그의 음악을 참 좋아합니다. ‘비빙’의 음악이나 그가 참여한 영화의 음악들을 들어보셨습니까? 좋습니다. 이제는 레코드 가게 안 가도 됩니다.
나는 평론가 박용구 선생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정말 내 친구의 아버지이신데, 어려서 박용구 ‘아버지’를 봤을 때, 그분은 눈빛이 달랐습니다. 희한하다 생각했지요. 보통의 아버지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후로 나는 그분의 혜안(慧眼)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못합니다. “솟아오르는 에너지가 너의 근원이다.” 아버지가 부여한 나의 정체성은 정말로 명징합니다.
작가정신이 뭡니까?
자기가 자신의 작업에 정당한 주인이 되지 못하면 그것은 작가가 아닙니다. 마지못해 영감의 끄트머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짓이겨 무언가 만들어내는 것을 작품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애초에 사회적 동물이 아니어서 빈둥빈둥 생각하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나의 뇌는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작품으로 연결됩니다.
안은미 씨의 삶과 작품은 밀착이 되어 있습니까?
당연합니다. 나는 늘 내가 있는 시기와 위치에서 고민합니다. 학교 다닐 때는 학교 문제, 사회를 살 때에는 사회를 살아가는 한 여성으로서의 위상, 인간이 그 속에 있을 때에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 그런 것들과 직시하는 그 순간이 내 발화의 시점입니다.

글 정우정 기자(wjj@) 사진 박진호(Studio B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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