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더러 트리오의 맑고 깨끗한 현대적 울림, 신선한 템포 감각과 빈틈없는 디테일로 빚어진 유려한 외관은 이번 내한 공연에서도 오롯이 드러났다. 더불어 피아노 트리오로서 넘어야 할 경험의 7부 능선 정도를 오른 그들이 보여준 것은 수많은 디스코그래피 속에서 발견할 수 없는 또 다른 아우라였다. 5월 10일,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
글 김주영(피아니스트ㆍ서울종합예술학교 교수) 사진 고양문화재단
반더러 트리오에 대한 높은 평가들은 분명 단단한 팀워크 이상의 특별한 매력에서 기인할 것이다. 정확한 인토네이션과 리듬으로 작품의 얼개를 깔끔하게 조형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장 마르크 필리프 바르자베디앙, 시종 넉넉한 저음으로 연주 전체를 감싸면서도 분명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첼로의 라파엘 피두, 실내악을 위해 세팅된 듯한 부드러운 음색과 날렵한 손가락을 겸비한 피아니스트 뱅상 코크 세 사람의 연주를 듣노라면 피아노 트리오를 위해 ‘최적화’된 연주자들의 절묘한 만남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40대 중반의 나이지만 이미 트리오 팀으로서 넘어야 할 경험의 7부 능선 정도를 오른 이들에게 앙상블 자체의 완성도를 논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음악성을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결국 실황 연주에서의 또 다른 아우라에 대해 논하는 편이 흥미로운 관찰 방법일 것이다.
맑고 깨끗한 현대적 울림, 신선한 템포 감각과 빈틈없는 디테일로 빚어진 유려한 외관 등이 ‘반더러 스타일’이라 할 수 있겠는데, 첫 곡으로 연주된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Op.70-1 ‘유령’부터 그 특색은 오롯이 드러났다. 다만 베토벤의 실내악에서 누구든 가질 수 있는 호불호의 문제나 선호하는 해석의 방향 등에서 그들의 연주는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제공했다. 스피디한 템포로 밀어붙이듯 연주하는 텍스트의 진행은 짙은 뉘앙스를 자아내기에 부족했고, 특히 다성부적인 아기자기함이 하이라이트인 1악장의 전개부는 단조로움을 연출했다. 다소 미온적으로 표현된 2악장의 분위기는 오히려 이색적으로 다가왔고, 명랑함 속의 에너지가 표출된 3악장도 호연이었으나 세 사람이 지나치게 ‘붙어 있는’ 듯한 음상은 잔향이 풍부한 아람누리 하이든 홀 안에서 조금 부담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이어진 슈베르트의 ‘노투르노’ D897은 트리오 문헌을 통째로 탐구해낸 ‘반더러’ 같은 트리오만이 보일 수 있는 해석이었다. 너무나 슈베르트적인 이 곡의 문제점은 무엇보다 세 사람 간의 음향적ㆍ구조적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세 사람이 들려준 타이트한 느낌의 루바토와 가벼운 느낌의 멜로디 전개, 과감한 다이내믹 연출은 지금껏 여타 피아노 트리오들의 메인 요리로 선정되기에 이런저런 이유로 부족하다고 여겨졌던 작품의 모범답안을 내놓은 듯 여겨졌다.
후반부 레퍼토리는 2007년에 이어 또다시 생상스의 피아노 트리오 2번으로 채워졌다. 같은 레퍼토리를 듣는다는 아쉬움도 있었으나, 어쩌면 이 곡이 그들의 대표 레퍼토리이자 프랑스적인 정서의 이상적인 뽐내기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필자의 기대대로 6년 전의 모습과 비교해 음악적 메시지와 아이디어 전개에서 훨씬 구체적인 입체감과 악장간의 굴곡 있는 연출이 두드러진 호연이었다. 비르투오소적인 풍모가 프랑스적인 색채와 여유로움 안에서 넉넉히 그려진 1ㆍ5악장도 훌륭했지만, 각각의 미세한 색채를 군더더기 없이 표현한 중간 악장들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단순함으로 시작된 악상을 한 순간의 열광으로 탈바꿈시키는 2악장 알레그레토, 감상적인 가락을 우아함으로 승화시키는 3악장 안단테 콘 모토, 귀족적 정서와 품위가 강하게 묻어 나오는 4악장 그라지오소 등은 반더러 트리오가 어디서 무엇을 연주하든 프랑스의 트리오이고 그 자부심을 프랑스인 특유의 높은 콧대 위에 늘 올려놓고 있는 멋진 팀이라는 사실을 자각시켰다. 아무쪼록 ‘셋이 하나 되기’에 온전히 성공한 반더러 트리오가 더 큰 하나가 되길 바라며, 또한 그 창의적인 음악적 방랑을 영원히 멈추지 않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