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인터뷰는 2011년 2월, 인디애나 블루밍턴에 위치한 야노스 스타커의 자택에서 사흘에 걸쳐 진행됐다. 스타커의 오랜 제자 양성원이 인터뷰를 했고, 사진 또한 직접 찍었으며, 그해 5월 ‘객석’ 커버 스토리에 글과 사진이 담겼다. 거장의 시대 마지막 별이자 우리시대의 큰 스승, 야노스 스타커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그의 마지막 인터뷰 전문을 게재한다.
가르치시는 모습을 보니 무척 건강해 보이십니다.
사실 지금 건강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회복해가고 있는 중이지요. 그래서 요즘은 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전 세계를 여행하는 연주자의 삶에서 은퇴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전환점이었을 거라고 상상해봅니다.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물론 좋은 점들도 많았죠. 하지만 여행 다니며 짐 가방을 잃어버리던 일들은 전혀 아쉽지가 않네요(인터뷰를 위해 유럽에서 인디애나 주의 블루밍턴 시로 오는 여정에서 가방이 이틀이나 늦게 도착했는데, 이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나도 예전에 미클로시 로저 협주곡을 베를린에서 초연한 후 베르나르트 하이덴 협주곡 초연을 위해 파리에 도착했을 때, 여행 가방이 도착하지 않았죠. 그래서 급하게 새로 산 셔츠와 입고 있던 캐주얼 재킷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야 했습니다. 결국 불편해서 재킷을 벗어버렸죠. 이런 것들은 전혀 그립지 않아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제자들을 만나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 일들은 참으로 그립죠. 내게 있어 휴가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지, 다른 곳으로는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2005년 일본 고베 페스티벌에서 연주한 후 무대에서 내려와 “이것이 대중 앞에서의 마지막 연주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말을 지키고 있지요.
학생들을 가르치실 때 보니 지금도 연주가 훌륭합니다. 연습의 준비 과정(warm up)은 어떻게 진행하시나요?
나는 준비 과정(warm up)이라기보다는 긴장을 푸는 과정(cool off)이라고 말합니다. 일단 근육들이 경직돼 있지 않은지 확인해야죠. 그 다음에는 음정을 가다듬기 위해 더블스톱(화음)을 주로 연습합니다. 이러한 연습으로 음정들을 화음 속에서 들을 수 있지요. 그러고 나서 몇 분간은 활을 길게 쓰며 소리가 방해 받지 않고 깨끗하게 나오는지 확인합니다. 개방현에서 시작해서 한 음씩 연주해보고, 그 다음은 비브라토를 더하고…. 이러한 방식으로 연습을 시작하죠. 머리를 식히기 위해 매년 4주 정도 휴식을 취하곤 했는데, 휴식에서 돌아오면 주로 다비트 포페르의 에튀드나 알프레도 피아티의 카프리치오, 혹은 한스 보터문트의 변주곡들을 연습했습니다. 나는 항상 말하지요. “음들은 항상 제자리에 있다. 그저 우리가 찾아야 할 뿐.”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아직도 그 음들을 찾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미소)
선생님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헝가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많은 음악가들을 배출해냈지요. 이러한 배경을 뒷받침하는 헝가리 음악교육의 기본은 무엇입니까?
음악의 대가들이 가르쳐준 수업들에 그 답이 있습니다. 프란츠 리스트는 리스트 음악원을 설립하고 첼리스트 다비트 포페르, 작곡가 한스 폰 쾨슬러 등을 초빙했죠. 한스 폰 쾨슬러는 코다이·버르토크·도흐나니·바이너 등의 스승입니다. 그의 제자인 레오 바이너는 실내악 교수가 되었는데, 현재 유명한 헝가리 음악가들은 모두 그의 실내악 수업을 들었다고 할 수 있지요. 바이너는 코다이와 버르토크를 제치고 콩쿠르에서 입상할 만큼 19세기에는 유명한 작곡가였습니다. 뛰어난 연주자는 아니었지만, 타고난 귀와 음악적 감각을 가졌고, 모든 시대의 음악을 연구한 사람이었지요. 그는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가르쳤습니다. 바로 귀로 음악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스타카토 점이 있는 음표와 없는 음표들의 차이점을 잘 구별하는 방법, 문장을 잘 끝맺듯 프레이징 만드는 방법 등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바이너는 피아노를 잘 치진 못했는데, 여러 번 시도 끝에 정확한 소리를 알려주었지요. 우리는 그런 기본적인 요소들을 귀 기울여 듣는 법을 배웠습니다. 청각을 발달시키는 법, 그리고 음악을 듣고 이해하는 법을 배운 것이지요.
마치 언어를 가르치듯 음악을 가르치셨군요.
맞아요. 음악은 언어와 같지요. 따라서 작품을 배울 때는 작곡가가 어떤 음악적인 언어를 구사하는지 배우기 위해 그 작품뿐 아니라 작곡가의 다른 곡들도 같이 공부해야죠.
레오 바이너 선생님의 음악 수업은 어땠나요?
바이너의 수업 시간에는 주로 피아노 실내악곡을 배웠지요. 물론 개인 레슨 시간에는 현악 4중주곡들도 배우곤 했지만요. 바이너는 부다페스트 현악 4중주단이나 헝가리 현악 4중주단 같은 20세기의 유명한 현악 4중주단을 가르쳤습니다. 그와의 첫 수업이 아직까지 기억에 선명하네요. 내가 열두 살 때였는데, 베토벤 소나타 G단조를 연주했습니다. 바이너가 연주를 듣다가 “거긴 D선에서 해봐”라고 말했는데, 나는 순진하게도 “그러면 너무 어려운 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께서 “그럼 집에 가서 더 연습해오거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때 무언가가 어려울 땐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지요.
저도 선생님과의 잊을 수 없는 첫 레슨이 기억나는군요. 제가 17세 때 스위스 로잔에서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 1악장을 처음으로 선생님 앞에서 연주했습니다. 선생님은 제 연주를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리며 “브라보!”를 외치셨어요. 그러고는 제 옆을 지나쳐 피아니스트를 안아주시면서 “이렇게 자기 맘대로 하는 첼리스트를 반주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실력이네!”라고 얘기하셨어요(웃음).
그랬나요? 사람들이 예전엔 내가 좀 고약했다고 하더군요(웃음). 내가 바이너에게서 배운 것처럼, 그렇게 음악에 대한 겸손함을 배운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다비트 포페르의 제자이자 선생님의 스승인 아돌프 시페르는 어떠한 방식으로 테크닉을 가르치셨나요?
시페르는 내게 테크닉을 많이 가르치진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선 내가 어린 나이에 새로운 곡들을 짧은 시간에 외워서 연주하는 것에 매우 놀라셨거든요. 테크닉적인 면이나 핑거링에 있어서 더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자들입니다. 시페르는 한 곡을 이해하려면, 우선 작곡가의 여러 작품들을 통해 언어 자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지요.
제가 인터뷰를 할 때마다 수없이 듣게 되는 질문은 바로 “스타커 선생님께서 무엇을 가르쳐 주셨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제 기억에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선생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음악가의 인생은 오름길 아니면 내림길이다.”
다른 것들도 많이 가르쳤기를 바라는데!(웃음) 그 말은 음악과도 흡사한 점이 많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곡을 배우는 단계에 있거나, 또는 적정 레벨에 올라가지 못했을 때 단지 음표들만을 연주하려고 하죠. 그러나 음악은 ‘말하기’와 비슷한 거예요. 점점 올라가서 클라이맥스에 이르고, 좀 이따가 두 번째 클라이맥스를 맞이하고, 또 세 번째로 향하고…. 맞아요. 그렇게 오르내리는 게 음악이죠.
10대 나이에 전쟁을 겪었고, 유대인의 후손으로서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게다가 부모님이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까닭에 헝가리 국적도 없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헝가리에서는 부모님 두 분 모두 헝가리 출신이 아니면 시민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시민권 없이 제2차 세계대전을 치렀고, 이후 부다페스트 오페라의 수석 첼리스트가 되고 나서야 여권을 받을 수가 있었죠.
어린 나이에 전쟁 중 두 형제를 잃으신 후,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 텐데요. 어떻게 그러한 시간들을 이겨내셨나요?
그때는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중요한 시절이었습니다. 난 아주 어린 나이에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지만, 헝가리의 법이나 당시 상황들 때문에 더 이상 성공하기 힘들었지요. 그때 음악이 나를 살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음악가라는 이유로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요. 음악을 하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는, 언제나 음악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살기 위한 본능이었습니다.
인생에서의 비극이 선생님의 음악적 깊이를 더했다고 생각하시나요?
딱히 짚어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일단 난 어려서부터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있었지요. 아마도 내가 성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은 머리(brain)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항상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했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내 음악을 높이 평가하고 좋아해줄 때도, 나는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나를 이끄는 가장 큰 동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책(‘The World Of Music According To Starker’, Indiana University Press, 2004)에서 전쟁 이후 몇 년 동안이나 생계를 위해 연주하셨다는 내용을 보며, 이 시대에 음악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살인과 혁명 같은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시대 현실에 대해 불평했죠. 결국 상황은 늘 같은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이 시대에는 먼 곳에서 발생하는 일까지 즉시 알 수 있다는 점이지요. 우리가 자랄 때는 아침에 신문을 읽으면 몇 주 전쯤 어느 다른 나라에 지진이 일어난 기사를 접했지만, 이제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중계해서 볼 수 있습니다. 기술적인 발전이 낳은 차이죠.
부다페스트 오페라 오케스트라·댈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 그리고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수석 첼리스트를 지내면서 언털 도라티·프리츠 라이너 등 수많은 지휘자들과 함께 연주를 했습니다.
도라티와는 댈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오직 한 시즌만을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후에 여러 콘서트들을 함께 했고, 음반도 여러 개 함께 녹음했죠. 또 나를 위해 첼로 협주곡을 작곡하기도 했고요. 프리츠 라이너와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4년, 그 후 시카고 심포니에서 5년간 함께 했습니다. 9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하며 그는 나의 멘토가 되었죠. 라이너는 음악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가이드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는 음악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어떤 음악을 하는가”라고 말했지요. 라이너가 무척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음악에만 전념했던 ‘훌륭한 음악가’였음은 분명합니다. 그는 지휘법은 가르칠 수 없을지라도, 음악은 가르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라이너는 집념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어요. 음악을 잘할 수 있는 비결은 연구, 연구, 그리고 또 연구라고 늘 말했죠. 그의 경우에 있어서 연구란 스코어를 공부하는 일이었는데, 나는 라이너처럼 스코어의 음 하나하나까지 모두 꿰뚫고 있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한 면이 음악에 대한 정의를 확립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내가 음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4원소는 꾸밈이 없는 단순함(simplicity), 순수함(purity), 음악적 감각(taste), 그리고 균형(balance)입니다.
라이너가 해준 이야기들 중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는 것들이 있나요?
라이너가 운명을 달리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지요. “그와 함께 했던 9년이라는 세월은 위대한 하나의 긴 음악과 같았다”라고…. 나는 프리츠 라이너가 최고의 연주자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대중에 영합하는 지휘자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음악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한을 추구하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성향 때문이었는지 무대 리허설에서 그 최대한에 도달했을 때엔 때로는 실제 공연에서 좋은 연주를 보여주지 못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미 준비된 것에 만족한 상태였으니까요. 이에 반해 리허설이 충분치 못했을 땐 놀랍도록 훌륭한 음악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라이너는 그의 내면이 들은 음악을 실제로 살아나게 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은 음악가였죠.
그분들의 세대와 요즘 세대 음악가들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지난 시절의 훌륭한 음악가들은 대체 다 어디로 간 거야?”라고 말했죠.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어느 시대에나 진정한 음악가들은 소수였어요.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이올린·피아노·첼로·플루트 등 모든 악기에서 연주자들의 수준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사람들은 모두들 빠르고 격렬하게만 연주하려고 하지요. 요즘 시대에는 음정과 박자를 정확하게 연주할 수 있는 수백 명의 연주자가 있지만, 그들 모두를 뛰어난 예술가라고 할 수는 없어요. 좋은 ‘악기 연주자’라고 할 수 있죠. 그렇지만 소수의 뛰어난 예술가들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프리츠 라이너·유진 오르먼디·게오르크 숄티 등 지성적인 지휘자들과 함께 연주하는데요. 이들 헝가리 음악가들이 가졌던 근본 원칙은 무엇이었나요?
오르먼디는 지적인 연주자가 아닙니다. 사운드마스터였죠.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로부터 훌륭한 소리를 끄집어낸 사람이지요. 물론 좋은 음악가이자 좋은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그는 굉장히 본능적인 음악가였지, 지적인 음악가는 아니었습니다. 라이너 또한 완벽주의적인 치밀한 음악가였고, 지성적인 음악가는 아니었고요. 숄티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는데, 대단한 쇼맨십도 겸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이 가졌던 근본 원칙이라면, 음악의 모든 것들이라 말할 수 있겠네요. 음의 길이·악상·클라이맥스, 그리고 오케스트라에서 악기들 간의 균형 같은 것 등이죠.
선생님께서 오케스트라를 그만두고 솔로 연주자의 길로 전념하려 했을 때, 라이너는 뭐라고 말했나요?
라이너에게 그만둔다고 말하니 매우 화를 내더군요. “왜 콘서트 투어를 하려고 하지? 어차피 번 돈을 모두 세금으로 내게 될 텐데”라고 말하면서요. 그래서 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문제는 선생님만큼 제가 금전적으로 풍요로워진 다음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요.”(웃음)
수백 장의 음반을 녹음하면서 SP·모노·스테레오·CD, 그리고 요즈음의 온라인 음원까지, 기술상의 여러 변화들을 모두 경험하셨습니다. 이러한 기술의 변화를 어떻게 인식하셨고, 또 이것이 예술에 미친 변화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기술의 발전은 악기 연주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똑같은 실수가 계속 반복해서 들리는 것은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니까요(웃음). 1948년 코다이 첼로 소나타를 파리에서 처음 녹음했는데(이 코다이 녹음은 발매 직후 그랑프리 디스크가 되었고, 이후 전설적인 녹음이 되었다), 그때 방식으로는 녹음을 하다가 3분마다 멈춰야 했습니다. 또한 곡이 하나의 음반에 들어갈 수 없어서, 곡의 거의 두 페이지를 자를 수밖에 없었죠. 그 후에 33회전 LP와 45회전 LP가 나와서 경쟁을 했는데, 결국 33회전이 이겼지요. 그 다음으로 테이프가 나왔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환경을 창출해냈습니다. 우선 전 악장을 한 번에 녹음할 수 있었고, 이것을 두세 번 정도 녹음해서 불필요한 잡음이나 실수들을 덜어낼 수 있었죠. 옛날에는 스튜디오에 앉아서 테이프를 가위로 잘라 스카치테이프로 붙였지요. 피터 버르토크가 기계를 발명하고서야 테이프를 기계에 넣은 채 잘라 붙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편집 기술은 많은 남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선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죠. 어느 피아니스트가 녹음을 할 때였는데, 200여 번의 테이크를 연주한 후, 그제야 만족해 하고 있을 때 사운드 엔지니어가 그에게 말했죠. “연주 또 하고 싶지는 않으세요?”(그렇게 많은 녹음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이를 비꼬아서 한 말이다.)
나는 녹음할 때 한 번도 내게 할당된 시간을 모두 사용한 적이 없었어요. 나만의 녹음 방식을 개발했기 때문이죠. 일단 한 악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고, 결과물을 들어본 후 마음에 들지 않는 몇몇 부분만을 골라 다시 연주했지요. 그 후 전곡을 다시 한 번 연주합니다. 만일 전곡 녹음이 좋았다면 그것을 사용하고, 실수가 있었던 부분은 다른 테이크들을 활용했죠. 보통 대여섯 군데에서 많게는 열 개 정도 고친 것 같네요. 그래미상을 받은 마지막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앨범을 만들 때는 좀 많은 편집이 필요했습니다. 두 번째 녹음 전날 어느 중국 작곡가의 현대음악을 연주했는데, 더블스톱들이 많이 나와서 손에 무리가 생겨버렸던 이유이지요. 그래서 몇몇 부분을 추가로 녹음했었죠. 지금은 카운터테너가 된 아주 유명한 엔지니어가 편집해줬어요. 주빈 메타의 조카이자 첼리스트 알도 파리소의 제자였던 베준 메타였죠.
1991년, 제가 선생님의 조수였을 때 드보르자크 협주곡을 세인트루이스 오케스트라와 녹음 하던 작업을 참관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녹음하는 2시간 반 동안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지난해 제가 체코 필하모닉과 드보르자크를 녹음할 때 9시간을 잡고 있었거든요.
녹음이라는 것은 연주와 또 다르죠. 녹음을 잘하는 것은 그 곡을 얼마나 여러 번 연주했느냐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내가 드보르자크 협주곡을 런던에서 처음 녹음했을 때, 그 이전에 다섯 번 정도 연주한 후였습니다. 첫 연주는 열네 살 때 부다페스트에서였죠. 문제는 한 번도 연주해보지 않은 곡을 녹음하게 됐을 경우인데, 일례로 미요 첼로 협주곡을 녹음했을 때 그 곡을 이전에 한 번도 연주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럴 땐 자신이 그 곡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녹음은 연주와 달리, 관객들을 위해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가 그 곡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녹음은 사진을 찍는 것과 같아서 집중력은 녹음할 때 특히 중요한 요소이지요.
저는 다섯 살 때부터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여러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의 리사이틀을 다녔습니다. 지금에 와서 고백하자면, 그때 ‘왜 이렇게 지루한가’ 심각하게 고민했었지요. 그런데 1973년 선생님의 내한 공연에서 저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그 소리가 제 청각에 선명히 남아있습니다. 선생님만의 특별한 소리를 찾기 위해 어떠한 연습을 하셨나요?
나는 마음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표현하려고 합니다. 음악가는 본인의 정체성을 갖춰야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요즘 여러 연주자들의 음반을 듣고 있는데, 그들 모두 재능 있는 연주자들이지만 소리의 개성이 모자라고, 모두들 비슷한 음색을 가졌어요. 다 똑같아요. 내 경우에는 사람들이 소리만으로도 나의 연주라는 것을 알아차리죠. 그런 음색의 원천은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인데, 나는 그의 소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미국으로 오신 후 하이페츠를 처음 접하게 되셨나요?
파리에서 처음으로 하이페츠의 카네기홀 연주 영상을 봤었지요.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의 소리 그 자체였어요. 하이페츠는 어느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주는 경이적인 수준이었죠. 물론 베토벤 소나타와 같은 작품에서의 음악적 견해는 나와 조금은 달랐지만, 그가 연주하는 소품들, 그리고 로저와 코른골트 협주곡 등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하이페츠로부터 연주할 때 몸의 불필요한 긴장을 풀고, 깨끗한 소리를 내는 법을 배웠지요.
선생님께서도 비브라토를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지요?
배음이 많은 음들은 비브라토를 적게 하고, 배음이 적은 음들은 좀더 많은 비브라토를 필요로 하지요. 카살스는 “선율적인 음정(lyric intonation)”이라 표현했고, 나는 “화성적인 음정(tendency intonation)”이라 말하죠. 더 나아가 음이 화성에 속하지 못할 경우 그건 음정이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연주 방식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떻게 바뀌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테크닉적인 발전이 연주에 긍정적으로 작용됐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물론이죠. 연주자로서 살아오면서, 악기를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어야만 연주자가 원하는 메시지를 완벽히 전할 수 있음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기본기를 위한 연습곡집에서 배울 수 있는 다양한 것들, 즉 악기를 잡는 법이라든가 활을 잡는 법 등은 자신을 표현하게 하는 기본이 되고, 이것은 곧 다른 사람과 나를 차별화하는 요건이 되지요.
선생님이 악기를 다루는 능력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없고, 또 테크닉의 수준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 올렸다고 평가받습니다. 연주를 할 때, 언제나 테크닉적인 완벽함을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통제하셨나요? 아니면 더 높은 예술적인 표현을 위해 테크닉을 추구하셨는지요.
어려운 질문이군요. 지금의 첼로 연주 테크닉의 발전엔 나 이외에 여러 사람들의 공헌이 있었습니다. 테크닉의 발전에 대한 나의 공헌이 다른 사람들보다 부각되었던 이유는 내가 인생에서 학생들을 가치는 것에 가장 중점을 두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카살스 이후의 첼로 테크닉 발전은 에마누엘 포이어만의 공헌이 가장 크다고 생각해요. 매우 재능 있는 첼리스트였는데, 하이페츠 스타일의 연주에 가장 가까이 간 사람 중 하나였죠.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역할을 한 사람이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나는 포이어만 이후 세대죠. 카살스가 첼로 연주의 아버지이자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며 첼로 연주를 크게 한 단계 뛰어넘게 해준 대가라면, 그 이후의 발전은 포이어만이 이끌었다고 생각합니다. 카살스가 세운 첼로 연주의 기본을 이어 받아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포이어만이죠. 포이어만의 연주를 처음 봤을 때, 그의 연주는 내가 표방하고자 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능하다면 그 단계에서 더 발전시키려고 노력했고요. 최근에 이르러 수많은 첼리스트들이 과거 유명한 연주자들의 테크닉을 넘어서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테크닉의 수준과 음악적 수준은 다른 문제지만 말이죠. 그러나 나는 첼로 연주의 기술적인 측면이 피아노나 바이올린과는 달리, 그 최고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바이올린의 경우 아직 그 누구도 하이페츠만큼 잘하는 연주자는 나오지 않았을 정도로 그의 연주 수준은 완벽에 가까웠죠. 그러나 첼로 연주는 아직 조금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주할 때 항상 객관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하시나요? 곡에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기 때문에 좋은 연주를 하게 된 것인지요.
이 질문에 짧게 대답하자면, 난 항상 이렇게 스스로를 표현합니다. “나는 감정적(emotional)이지만, 감상적(sentimental)이진 않다”라고.
선생님께서는 다섯 장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음반을 내면서, 매번의 녹음이 모두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말씀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나 집에서 연주할 때도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하시나요? 이번에 선생님께서 학생들을 지도하시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니, 제가 학생이던 25년 전과는 다른 새로운 손가락 번호들과 음악적인 아이디어들을 말씀하시네요.
연주는 항상 진화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연주가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도록 항상 노력하죠. 우리는 언제나 음악에서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음악적 진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기술적인 발전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1950~1951년에 처음으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중 네 곡을 녹음할 때, 대중 앞에서의 연주 경험은 3번 C장조와 6번 D장조밖에 없었어요. 이후 1957년 런던에서 6곡 전곡을 녹음했는데, 그 즈음에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6개 전곡을 연주했지요. 첫 번째 바흐 녹음들은 말하자면 오디션과 같은 것이었어요. 그 앨범으로 인해 내가 영국 관객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1956년에 런던에서 데뷔 연주를 가지게 됨으로써 ‘타임스’ 지로부터 “전설(legend)”이라는 극찬을 받게 되었으니까요.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이전의 바흐 음반들로 인해 바흐 연주자로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고, 점차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할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새로운 음악적 발견들과 수많은 연주에서의 경험은 이후의 음반에 녹아들게 됐지요. 그래서 첫 번째 앨범과 두 번째 앨범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세 번째 음반에서는 무척 달라졌습니다. 녹음 경험과 더불어 세계 전역에서의 수많은 연주 경험이 뒷받침되었으니까요. 결론적으로, 연주는 항상 진화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배울 때 이렇게 말씀하셨죠. “바흐를 배울 적엔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라. 심지어 무대에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는 계속 발견될 수 있다. 그것이 이 곡의 마법이다”라고요.
나는 학생들에게 언제나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알려주려고 합니다. 물론 무대 위에서 즉흥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요. 무대에서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들을 시도하고 검증한 후 그중 한 가지를 선택해 사용해야죠. 핑거링이나 보잉을 정할 때 최대한 불필요한 움직임을 줄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가장 경제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지요. 불필요한 동작에 에너지를 낭비하면 안 됩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피카소의 말이 생각나네요. “열 개의 색을 가지고 있다면 여덟 개만 사용하라, 다섯 가지의 색을 가지고 있다면 세 개만 이용해 그림을 그려라.” 핑거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배음을 기준으로 포지션을 익히도록 가르치나요, 아니면 반복된 연습을 통해 ‘감(feel)’을 익힐 것을 권유하시나요?
왼손은 언제나 두 줄 위에 걸쳐 있어야 하며, 그로 인해 음들 간의 화성적 관계를 느껴야 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것을 카살스는 “선율적인 음정(lyric intonation)”이라고 했고, 나는 “화성적인 음정(tendency intonation)”이라고 표현하는데, 모든 음들은 항상 화성 안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이것이 음정을 맞추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대부분의 연주자들이 이 점을 잘 알고 있지만, 기술적인 면에서 왼손이 포지션과 화성을 느끼도록 발전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죠. 항상 각각의 음보다는 그 음이 속해 있는 화성 또는 포지션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음악을 강렬히 느끼면 테크닉은 뒤따라오나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비슷한 질문이네요.(웃음) 음악을 느끼지 못한다면 연주해 낼 수도 없겠죠. 어떠한 음악적 확신이 있고,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하면 테크닉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항상 테크닉보다는 음악이 우선시되어야 하죠. 하지만 머릿속에 상상하고 있는 음악을 올바르게 표현하기 위해선 악기를 컨트롤할 수 있는 테크닉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긴장되어 있지 않아야 더욱 창의적인 음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악기를 연주할 때는 언제나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계속되는 근육의 긴장은 몸을 해치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올바른 사고를 방해하죠.
해석과 원본에 대한 충실함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난 몇 십 년간 점점 더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라 생각합니다.
나 자신은 ‘원본’에 매우 충실히 따르는 편은 아닙니다. 물론 악보에 쓰인 대로 정확하게 연주하려고 노력하지만,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따르지는 않지요. 첼리스트였던 보케리니의 첼로 협주곡에서는 그가 악기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가끔은 작곡가들이 악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서 효율적이지 않게 작곡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이 악기에 좀더 효과적이도록 작품에 수정을 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작곡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얻은 결론은, 악보에 쓰인 것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원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자주 인용하곤 하는 코다이와의 일화를 말해드리죠. 언젠가 선생님께 어떤 한 부분을 가리키며 “이 음이 G 내추럴인가요, 아니면 G#인가요?”라고 질문했을 때 그는 나를 똑바로 보며 “예스(Yes)”라고 대답했지요!
어떤 작곡가들은 매우 정확한 메트로놈 표기를 적곤 하는데요. 선생님은 어떻게 템포를 선택하시나요?
물론 나도 일단 작곡가의 템포 표기를 존중하여 그것을 따라 하지만, 잘 되지 않을 때에는 바꾸기도 하지요. 다이내믹도 마찬가지인데, 종종 작곡가가 써놓은 다이내믹 표기가 기능적이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나타 연주의 경우 첼로가 D선에서 연주할 때 피아노 소리가 너무 크면 첼로 소리가 잘 안 들리죠. 협주곡을 연주할 때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큰데 첼로의 강약 표기가 피아노로 되어 있으면 사람들은 첼리스트가 뭘 연주하는지 알지도 못하고요. 따라서 작곡가의 표기를 무조건적으로 따라 하기보다는 전체적인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보에 적힌 악상 기호는 어떻게 다루는 게 좋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연주자의 수준을 가늠할 때 그 연주자가 가장 약한 악상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가장 짧은 음을 어떻게 연주하는지를 판단합니다. 즉, 약한 악상에서 소리가 건강하지 않거나, 혹은 아예 잘 들리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죠.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의 악상을 항상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현악기 연주자뿐 아니라 모든 악기 연주자들에게 오케스트라 곡을 이해하는 데 도움될 말씀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세대와 요즘 오케스트라의 오디션 과정은 어떻게 다른가요?
오케스트라 오디션이라는 것이 생겨난 것은 꽤 최근의 일이지요. 나는 평생 단 한 번의 오디션만을 보았습니다. 예전엔 오디션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지휘자들이 연주자의 초견 능력을 보고 선발했죠. 오디션에서 어떤 곡이 나올지 몰랐지요. 우리 세대에서 초견은 매우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베토벤이나 버르토크 현악 4중주도 초견으로 읽는 법을 연습했습니다. 초견으로 곡을 읽을 때엔, 한두 음쯤 틀리더라도 큰 문제는 되지 않았지요. 더 중요한 것은 리듬의 흐름이었으니까요. 이러한 연습들로 인해 우리 세대의 연주자들은 매우 초견 능력이 좋은 편입니다. 요즘의 오디션은 미리 정해진 곡을 주면, 연주자들은 그 부분만 반복적으로 연습해서 판단하죠. 물론 두 가지 모두 장단점은 있습니다. 주어진 짧은 부분만을 연습하게 하는 요즘 오디션의 가장 큰 단점은, 연주력이 뛰어나지 않은 사람도 주어진 짧은 부분들만 오랜 기간 반복적으로 연습한 후 오디션에 합격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점이지요.
미래의 전문 연주자가 되려는 학생들이 중요하게 여겨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요. 음악성, 인성, 악보에 대한 충실함, 혹은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이런 능력들일까요?
모든 것들이 동등하게 중요합니다. 프로페셔널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하지요. 적절한 시대·장소·사람, 그리고 좋은 악기를 빌려줄 스폰서 등 많은 부수적인 요인들도 있을 것이고요.
제게 있어 가장 어려운 점은 매번 연주할 때마다 영감을 얻는 일인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무런 이유 없이 가끔 영감이 느껴지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그런 경험이 있으셨나요?
글쎄요…. 나는 제자들에게 전문 연주자로서의 자격을 가르치려고 늘 노력합니다. 전문 연주자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능력의 최소한 85퍼센트는 발휘할 수 있어야죠. 컨디션이 좋다면 95퍼센트 정도가 될 것이고, 평생에 한두 번은 100퍼센트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오곤 하죠.
연습을 하다 저 자신이 피곤하고 게을러질 때는 언제나 선생님 말씀이 기억납니다. “연습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연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멀리 간다”라고 하셨죠.
문제는 ‘얼마나 연습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연습을 하느냐’이죠. 연습은 지겹고 반복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연습은 근본적으로 ‘노동(labor)’과 가깝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언제나 연습의 마지막에는 ‘음악’을 연주하고 마무리를 해야죠. 연습이 아닌 ‘즐거움을 위한 음악’ 말입니다.
요즈음에는 잘 훈련된 연주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이러한 잘 훈련되고 재능도 많은 연주자들이 경쟁력 있는 수준으로 한 단계 더 뛰어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할까요?
방금 훈련(discipline)이라는 중요한 단어를 말했군요. 음악이란 가장 오래된 학문 분야(academic discipline) 중 하나입니다. 음악은 훈련을 통해 표현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분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남과 비교되는 경쟁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콩쿠르라는 제도를 좋아하지 않아요. 남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경쟁해야 합니다. 스스로 세울 수 있는 최선을 목표로 하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남과 비교하는 것은 심사위원들의 일이죠. 그마저도 정확한 건 아니지만….
이전에 출판하신 악보(edition)들을 수정하고 싶으시거나 다시 발행하고 싶을 때가 있으신가요?
최근에 새로 발행될 베토벤 3중 협주곡, 멘델스존 소나타와 도흐나니 소나타 악보의 서문을 썼습니다. 내가 출판한 에디션에는 그 곡들을 녹음했을 때 사용했던 핑거링이나 보잉이 담겨 있습니다. 도흐나니 소나타는 녹음을 한 적이 없으니 제외되겠지만요. 내가 출판한 악보를 보며 음반을 들으면, 연주자들은 내가 어떻게 녹음을 했는지 참고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후에는 자신들에게 맞는 기법을 찾아가길 바랍니다. 그 악보들은 내 손과 머리에 맞는 것이니까요. 근본은 지키되 기술적인 세부사항들은 자신에게 맞는 해결 방법을 항상 찾아나가야 합니다. 물론 불필요한 동작이나 근본에서 벗어난 연주를 하면 지적을 하지만, 나는 학생들에게 나와 똑같은 핑거링과 보잉을 사용하도록 주문하지는 않습니다. 독일어에 이런 표현이 있지요.
“그만큼 더 좋겠죠(Umso besser)!”
글·사진 양성원(첼리스트) 번역 장혜리(인디애나 음대 박사) 정리 김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