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릴 수 있는 것을 평할 수 있다는 다행
어떤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정말이지 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초대해주신 분께는 그저 너무도 과분한 자리였다고, 정중히 고개를 숙이겠습니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가격은 족히 되는 손바닥만 한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보안 장치로 단단히 잠긴 유리상자에서 물건을 꺼내 그 속을 보여주었을 때, 이 정도면 ‘명품’이 아니라 ‘예술품’이라 해도 되겠다, 내가 아랍 왕자라면 분명히 샀을 것이다, 정말 아름답고 정교하다… 감탄하고 또 감탄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아무나 못하는 것일 테고, 그래서 과분했습니다.
그 물건은, 아니 여기서부터 ‘작품’이라 칭하겠습니다. 그 ‘작품’은 죄가 없습니다. 원가 대비 백 배, 천 배의 가격이 책정돼 있다 하더라도, 저는 그 ‘작품’을 변호할 것입니다. 만약 지금부터 그 ‘작품’에 대해 본격적으로 얘기해보라 하면 제가 아는 모든 미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예술적 가치’를 논하고야 말겠습니다. 단지, 그 아름다운 ‘작품’의 전후에 놓였던 대화가 피곤했습니다. 그러한 ‘작품’을 소개하고 평하고 그에 대한 글을 쓰는 분들과의 식사 자리가 이어졌습니다. 한두 시간의 짧은 대화, 참여하지 않고 그저 경청했을 뿐인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작품’이 아닌 그 작품의 ‘소비자’ 혹은 소비가 가능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은 듯했습니다.
11년째 ‘객석’에서 예술을, 보다 정확히 음악을 다뤄오면서 작품이 아닌 청중이 제 마음속에서 더 우위를 점한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청중에 대한 분석이 들어간 기사를 간헐적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예술’ 혹은 ‘예술가’가 중심에 있었습니다.
어떤 차이일까.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니, 옅은 미소가 입가에 번졌습니다. 예술작품과 예술가에 오롯이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이유는 이 한 권의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과 그걸 읽는 사람들 모두가 ‘예술’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닌 물건’에 대한 평을 쓰면서,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 수 없기에 ‘물건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한 것은 아닐까요.
특정 분야를 비하하거나 어설픈 비교우위에 오를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느낀 감정은, 다만 ‘다행’이었습니다. 값을 책정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가치의 명작을 언제나 내 삶 어딘가에 둘 수 있다는 다행. 수억 아니라 수천 억의 가치를 지닌 음악이 내 귀를 타고 내 마음에 흡수될 수 있다는 다행.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늘 그것과 함께할 수 있다는 다행. 같은 공연을 본 사람들과 솔직하게 ‘예술’을 논할 수 있다는 다행. 가끔은 비판도 할 수 있다는 다행. 결국 누릴 수 있는 것을 평할 수 있다는 다행.
영화 한 편, 책 한 권, 음반 한 장, 공연 한 편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닳고 닳은 기치가 새삼 진리로 다가옵니다. 바흐에게 일자리를 준 적도 없고, 차이콥스키를 후원한 적도 없지만, 그 음악을 귓전에 울리게 하고는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예술을 사랑한 우리의 초여름은 얼마나 풍요로운지요.
박용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