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엄 스칼릿 안무의 로열 발레 ‘헨젤과 그레텔’

이 시대 아이들을 위협하는 실제 공포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7월 1일 12:00 오전


▲ 요즘 아이들에게 진정한 공포는 무엇일까? 이 작품에 ‘동화 속 마녀’는 없다 ⓒROH / Tristram Kenton, 2013

유괴와 살인까지 보여주는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의 발레 ‘헨젤과 그레텔’은 불안과 의심이 팽배한 1950년대 매카시즘을 직접적인 배경으로 하지만 암울한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까지 비춘다.

가난의 흔적이 묻어나는 흑백 영상의 자그마한 브라운관 텔레비전, 겨우 네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낡은 일인용 팔걸이 소파, 유효 기간을 꽉꽉 채운 수프 캔 몇 개만이 뒹굴고 있을 법한 작은 냉장고, 이삿짐을 싸다 만 듯 종이 박스가 대충 올려져 있는 싱크대, 그 싱크대 위에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궁색한 가재도구….
1950년대 미국의 어느 시골 가정집을 배경으로 시작하는 발레 ‘헨젤과 그레텔’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댄서들의 표정 하나까지 생생히 볼 수 있는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 소극장에서 열린 이 공연(5월 8~11일)은 하우스의 상주 아티스트인 20대 청년 리엄 스칼릿이 전체 안무를 맡아 제작한 혁신적인 창작발레로 세계 초연이다.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독특한 시선으로 부조리한 현실을 비틀어낸 연출로 단숨에 평단의 화젯거리가 됐다.
발레는, 우리가 어린 시절 익히 접해 익숙한 동명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모티프로 이를 1950년대 남루한 삶에 지친 미국의 가정을 배경으로 각색했다. 대개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이 동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럴 것이다. 가족 전체가 굶어 죽을 수 없다는 새엄마의 계략에 의해 숲 속에 버려진 헨젤과 그레텔이 쿠키와 사탕으로 만들어진 집에서 마녀를 만난다. 헨젤을 살찌워 먹으려고 하는 마녀를 지혜로 극복하고 그레텔은 마녀를 아궁이에 넣어 죽인다. 돌이켜보건대 어린 시절 동심의 눈에서 마녀를 제거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헨젤과 그레텔의 이야기는 무시무시하게 다가오기보다는 권선징악에 기반한 지극히 동화적인 스토리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림형제가 1812년에 발표한 동화 ‘헨젤과 그레텔’은 중세부터 존재한 이야기로 그 이면에는 다양한 철학적 사유와 정치적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필자 역시 성장한 뒤 이 이야기가 중세 유럽에서 빈번했던 기근으로 인한 식인문화를 상징한다는 해석부터,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해 헨젤과 그레텔이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를 상징한다는 설, 정신분석학적으로 등장인물의 행위를 해석한 풀이를 접했다. 하지만 이 모든 철학적 설명보다도 개인적으로 뇌리에 각인된 헨젤과 그레텔의 이미지는, 그림책 속 과자로 만든 집과 검은 망토를 입은 늙은 마녀의 기괴한 코, 그리고 헨젤과 그레텔의 귀여운 행동 – 빵 조각을 떨어뜨리며 흔적을 남기는 – 을 담은 그림으로 강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이번 발레로 재탄생한 ‘헨젤과 그레텔’은 내 안에 깊이 박힌 헨젤과 그레텔의 이미지를 단번에 뒤집는 도발적인 작품이었다.

20대 청년 리엄 스칼릿의 안무작
‘For Sale(매매)’ 푯말이 붙여진 이 작은 집은 가난을 이기지 못해 집을 내놓은 무능한 가장의 어두운 표정과 닮았다. 딸 그레텔이 위로해도 소파에 늘어져 있는 아버지는 삶의 의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좀비 같다.
첫 장면의 충격 요법은 작품 전반으로 이어진다. 철컥 철컥 철컥…. 구두 굽 소리 치고는 너무나 거친 발자국 소리가 무대를 채운다. 이 거센 발자국의 주인공은 선글라스로 머리를 틀어 올린 채 바바리를 입은 여성이다. 요염한 걸음걸이로 붉은 입술에 담배를 문 채 등장하는 팜므파탈, 그녀는 동화에서 중요한 악의 축을 이루는 악한 새엄마이다.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그레텔은 위층으로 도망간다. 눈여겨볼 것은 새엄마의 차림새다. 바바리 코트를 벗은 그녀는 전형적인 미국 다이너 식당의 웨이트리스 차림인데, 그녀의 직업의 불투명성은 그녀가 춤을 출 때마다 찢어진 치마 사이로 보이는 스타킹 홀더와 짙은 화장으로 더 강조된다.
새엄마와 아버지가 가난에 대한 불만에 대해 싸우고 화해하는 다양한 동작 후 집을 나가고, 헨젤과 그레텔은 냉장고에서 등장하는 ‘샌드맨’(북유럽 전래동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잠든 아이들 눈에 모래를 뿌려 좋은 꿈을 꾸게 한다)에 이끌려 조그만 오두막집으로 향하게 된다.
순수해보이는 집의 주인은 한 남성이다. 여기서 이 작품의 선입견 뒤집기가 또 한 번 시도된다. 1950년대 미국으로 배경을 옮긴 발레 ‘헨젤과 그레텔’ 속 ‘마녀’는 여자가 아니다. 연쇄살인범이자 소아성애자인 집주인은 말끔한 옷에 뿔테 안경을 쓰고 있다. 그의 표정과 춤에 묻어있는 섬뜩함은 작은 지하 공간 속에 아이들만이 앉을 수 있을 법한 작은 의자와 테이블, 머리가 없는 인형들, 그리고 넝마에 덮여 있지만 빨간 구두를 신고 늘어진 다리가 여자의 시체임을 암시했다. 시체는 열린 오븐 속에 묻힌 채 고꾸라져 있다. 이 악당은 아이들의 얼굴을 분장시키고 자신의 인형인 것마냥 티파티를 벌이고 해괴한 일을 시킨다. 이 부분의 연출은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발레의 2막은 샌드맨과 악당의 해괴한 놀이에 집중하고, 헨젤과 그레텔을 찾아다니는 그들의 아버지가 오두막집에 와서도 아래층에 갇힌 아이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부모의 소리를 들은 헨젤과 그레텔이 도망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긴장감 팽배한 연출에 집중된다. 이렇게 끌어가는 클라이맥스 뒤에는 충격적 피날레가 기다리고 있다. 헨젤과 그레텔은 악당의 놀이에 적당히 맞춰주다가 이제는 그를 물리칠 만큼의 강한 성격을 갖게 되고, 악당이 스스로 자살을 시도할 만큼 강하게 그를 비난한다. 스스로의 힘에 의해 지하 감옥에서 나온 헨젤과 그레텔은 이미 버려진 빈집으로 돌아오고 엄마와 아빠가 없음을 안다. 상실감은 잠시, 헨젤과 그레텔은 이내 현실에 적응하고 그 빈집을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만든다. 그리고 벽에 자신을 가둬놨던 가해자의 사진을 거는 장면으로 발레는 끝이 난다.


▲ 작품은 1950년대 미국의 어느 시골 가정집을 배경으로 한다 ⓒROH / Tristram Kenton, 2013

희대의 악마, 요제프 프리츨을 대입하다
필자는 리엄 스칼릿이 해석한 헨젤과 그레텔의 가장 강한 어필이 이 작품의 마지막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헨젤과 그레텔은 자신들이 거부했던 새엄마와 아빠의 성격을 무의식적으로 답습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트라우마로 인해 저주받은 현대판 페르소나의 상징을 제일 마지막에 강하게 표현하는 기법이 특별했다.
이 논란적 작품을 두고 다양한 반응이 나올 때 리엄 스칼릿 감독 자신은 이 작품에 ‘요제프 프리츨’을 대입했음을 로열 발레의 영상을 통해 밝혔다. 요제프 프리츨은 자신의 딸을 집의 숨겨진 지하감옥에 이십여 년간 감금한 채 성적노예로 삼다가 몇 년 전 발각돼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킨 극악한 범죄자이다. 발레의 초반 부분에서 이 작품과 요제프 프리츨과의 상관 관계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무대 배경이 가정집이긴 했지만, 그 옆의 작은 풀밭 정원 위에 나무 오두막이 있고 숲을 상징하는 높다란 나무 몇 그루가 설치된 덕에 무대는 꽤 전원적인 느낌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각인형 같은 남성 무용수의 등장이 곧 이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남성 무용수는 마치 허수아비 꼭두각시 같은 춤으로 어기적어기적 움직이며 헨젤과 그레텔을 미스터리한 나무 오두막으로 데려가고, 아이들이 집에 들어가자 오두막이 올려진 풀밭의 세트장이 위로 올라가면서 무시무시한 지하감옥이 나온다. 관람객의 시야 속에서 가려져 있다가 드러나는 지하 감옥은 요제프 프리츨 사건 후 각종 미디어에 등장한 그 지하감옥과 닮았다. 폐쇄적인 이 공간은 관객 앞에 나타났다가도 외로운 영혼처럼 지하로 사라진다.
60분의 1막과 40분의 2막으로 나눠져 있는 이 작품은 1막에서는 빈한하면서도 암울하고 음흉하며 복합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무대 디자인을 맡은 존 바우저는 “세트를 통해 꿈을 상실하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가난에 찌든 가족, 끔직한 현실 뒤에 가려진 사회의 어두움을 보여주고자 했다”라고 설명했다. 오두막으로 납치된 후 시작하는 2막에서는 한 편의 공포 영화를 보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댄서들의 표정, 숨소리까지 다 들리는 작은 공간은 댄 존스가 이끌어내는 몽롱하면서도 강렬한 음악으로 긴장감이 팽팽히 지속된다.
발레의 장면장면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스크랩하듯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발레라는 예술의 영역이 태생적으로 지닌 부드러움으로 반어적으로 표현해내는 부조리는 더 극적이고 충격적이다. 새엄마가 남편의 머리를 병으로 깨는 파격적인 장면은 부서진 가정과 가정폭력을 상징하고, 유괴와 살인까지 보여주는 로열 오페라하우스의 ‘헨젤과 그레텔’은 불안과 의심이 팽배한 1950년대 매카시즘을 직접적인 배경으로 하지만 암울한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까지 비춘다.
리엄 스칼릿의 탁월한 안무는 헨젤과 그레텔의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춤부터 인형을 안고 추는 사이코패스적인 춤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번 프로덕션의 묘미는 줄거리를 잊게 만드는 흡입력과 강한 이미지 메이킹인 듯하다.
이 충격적 작품을 두고 “어디선가 본 듯한 진부한 특색을 그러모아 짜깁기한 듯하다”는 혹평도 나온다. 미국 영화에서 나오는 웨이트리스, 영화 ‘미저리’에 나오는 사이코패스 같은 요소를 지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에겐 그 모든 논쟁을 뛰어넘어, 과감한 시도로 어른을 위한 동화에서 벗어나 부조리극으로 재탄생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헨젤과 그레텔’을 둘러싼 다양한 폭로나 해석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배한 그림책 속 헨젤과 그레텔의 이미지를 뒤엎을 만큼 강렬하게 다가왔다.

글 김승민(런던 이스카이 컨템퍼러리 아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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