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게 읽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퇴색이 아닌 더욱 풍부한 색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9월 1일 12:00 오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어른을 위한 성장소설이다. 타인에게 분명 어른으로 보이고 또 그에 맞게 행동하지만, 마음속 깊이 ‘내가 진짜 어른일까?’라고 매일 밤 자문하는 당신과 나의 오늘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흠모하는 나에게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는 양사나이와 초록괴물을 탄생시킨 기이한 상상력의 ‘단편소설 작가’이다. ‘노르웨이의 숲’으로 시작하여 10대, 20대에 읽었던 하루키의 장편소설에는 어째 끌리지 않았다. 그가 이야기하는 (혹은 세상이 그가 이야기했다고 주장하는) 상실과 고독에는 쉽게 동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이 제목부터 난해한 소설을 읽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스스로 얼마나 어른이 됐는지, 혹은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됐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상실과 고독 같은 고차원적인 감정을 넘어, 남의 사연에 얼마나 귀 기울여주고 얼마나 동감할 수 있는지 혹은 보듬어줄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언제까지 어린아이처럼 양사나이와 모험을 떠나고 초록괴물이 문 앞에 서서 노크하기를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쓰쿠루의 사연을 어느 정도 읽었을 때, 마침 그와 내가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카(赤), 아오(靑), 시로(白), 구로(黑). 선명한 색채를 이름 속에 간직한, 그 이름만큼이나 선명한 개성을 지닌 넷은 다자키 쓰쿠루의 10대를 만들어낸 소중한 친구들이다. 이 단단하고 정교한 정오각형을 유지하기 위해, 쓰쿠루를 포함한 남자아이 셋과 여자아이 둘은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철저히 숨긴 채 조심스럽고도 포근한 동반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 대학에 진학한 해, 쓰쿠루는 영문도 모른 채 네 친구들에게 버림받고, 이후 다섯 달을 “죽음의 입구에서 살았다.”
소설 초반에 참으로 안쓰러웠던 청년 쓰쿠루. 하루키는 그를 크게 세 개의 시공간으로 밀어 넣고 있다.
1. 색채가 없는 쓰쿠루가 색채가 있는 네 친구들과 함께했고, 또 버림받은 시절.
2. 친구들에게 버림받은 그 이듬해, 쓰쿠루 앞에 나타나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라진 하이다와 함께한 시절.
3. 사라라는 여인의 독려에 힘입어, 16년이 흐른 후에야 자신이 버림받은 이유를 찾아 나서는 지금, 즉 ‘순례의 해’.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 – 제1년 스위스’ 중 여덟 번째 곡인 ‘르 말 뒤 페이(Le Mal du Pays)’는 이 소설의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주요한 요소다. 그 첫 등장은 하이다가 쓰쿠루의 집으로 가져온 라자르 베르만 LP의 재생으로 이뤄진다. 하이다, 그는 네 친구들에게 버림받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삶을, 아니 ‘다른 삶’을 시작한 쓰쿠루 앞에 나타난 대학 후배이다. “일반적으로는 멜랑콜리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 정확히 번역하기가 어려운 말이에요”라고 하이다는 곡의 제목이 지닌 뜻을 설명한다. 이 “영문 모를 슬픔”이 담긴 곡을 쓰쿠르는 단번에 알아듣는다. 시로가 즐겨 연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6년이 흐른 후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쓰쿠루는 어느 낯선 공간에서 다시 이 곡을 듣고 시로를 회상한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하루키는 리스트 ‘순례의 해’를 책장 사이사이는 물론 소설의 전면에까지 내세웠다. 1811년 헝가리 태생의 프란츠 리스트는 클래식 음악의 낭만기를 살며 근대를 예언한 인물이다. 흔히 ‘초절기교 피아노곡의 작곡가’로 인식되지만, 당시로서는 75년이란 긴 세월을 살며 신동, 스타, 음악가, 성직자, 아버지 등 너무 많은 ‘개인’으로서의 모습을 남기고 떠났다.
신부로서 생을 마감한 리스트는 젊은 시절 수습 불가능한 여성 편력에 허덕였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이 1835년, 그의 나이 스물넷에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감행한 사랑의 도피. 여섯 살 연상의 백작 부인에게는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었기에 두 사람은 사회적 지탄을 피할 수 없었다. 1844년, 영원할 것만 같던 사랑은 허무하게 끝을 맺는다. 그 길고도 짧은 사랑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긴 피아노 작품이 바로 ‘순례의 해’이다. 마리 부인과 리스트가 처음 도망간 곳은 스위스였다. 각 곡에서는 사랑에 빠진 리스트의 행복이 그대로 드러난다. 반면 ‘제2년 이탈리아’를 쓸 당시, 두 연인은 헤어지기 직전까지 갈 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리스트는 이때 사랑이고 뭐고 다 허망하여, 그저 책, 연극, 미술 등에 빠져들었다. 끝으로 ‘순례의 해 – 제3년’은 마리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세 아이 중 둘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 딸 코지마와 빚은 갈등 등 노년의 쓸쓸한 회상 혹은 명상으로 채워진다.
즉 리스트의 피아노 모음곡 ‘순례의 해’는 세 해, 세 권으로 구성되었고 마찬가지로 하루키의 소설에서 쓰쿠루 또한 1. 아오(靑), 2. 아카(赤), 3. 구로(黑)를 향한 세 차례의 순례를 떠나니 두 작품은 이렇게 연결 고리를 갖는 듯하다. 구로를 만나러 떠나는 마지막 순례를 통해 리스트가 걸었던 순례와 쓰쿠루의 순례는 그렇게 평행을 그리며 종결되나 싶다. 그러나 리스트의 ‘순례의 해’가 단순한 여정만을 기록한 작품이 아니라 ‘제3년’에 이르러 노년의 회한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또한 소설에 등장하는 음악이 순례의 제1년, 제2년에 걸쳐 있다는 점에서 쓰쿠루의 순례는 그 마지막 해에 당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소설의 결말은 답답할 만큼 훤히 열려 있다.
소설에서는 ‘순례의 해’라는 표제가 지닌 표면적 공통점뿐만 아니라 리스트의 현신을 만날 수도 있다. 하이다의 존재가 바로 그렇다. ‘순례의 해’ LP를 쓰쿠루에게 남기고 떠난 하이다는 한없이 지적이며, 음악을 사랑하고, 눈에 띄는 섬세한 외모를 지닌 점에서 리스트와 닮았다. 한편 자신의 아버지가 겪은 일이라며 하이다가 쓰쿠루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미도리카와라는 재즈 피아니스트가 등장하는데, 미도리카와는 인간이라면(더욱이 현재의 삶이 무료하고 무의미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혹할 만한 유혹으로 하이다의 아버지를 삶과 죽음의 도박장으로 이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메피스토펠레스이다. 리스트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깊은 영감과 영향을 받아 작품을 탄생시킨 바 있다. 그러니 리스트를 연상시키는 하이다가 메피스토펠레스를 닮은 미도리카와의 전설을 들려주는 것은 마땅하다.
흥미로운 점은 하이다와 미도리카와의 이름에도 색채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각각 회색과 녹색이다. 아오, 아카, 시로, 구로, 쓰쿠루의 10대 시절을 지배한 네 가지 색은 그 어떤 색으로도 조합해낼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원색이었다. 반면 이들 네 가지 원색이 헝클어놓은 쓰쿠루 제2의 삶에 등장한 하이다, 그리고 하이다가 불러낸 미도리카와의 이름이 흑과 백, 청과 황의 조합으로 이뤄진 것은 우연일까.
이 모든 숨은 그림을 찾아내려는 나름의 노력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는 데 재미를 더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실은 ‘별로 상관없다’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프란츠 리스트와 그가 쓴 ‘순례의 해’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해도, 쓰쿠루의 순례에 무리 없이 동참할 수 있다. 네 가지 색채의 친구들이 보여준 단번의 배신에 쓰쿠루는 왜 그토록 처절하게 무너졌고, 이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듯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을까. 과연 쓰쿠루의 변태(變態)는 여기 우리와는 거리가 먼 이례적인 사건일까.
10대 중후반, 나를 지배했던 음악, 그림, 글… 아니 공기의 냄새까지 여전히 남아 이른바 ‘감수성’을 완성하고 있는데 그때의 사람들이 지닌 힘은 어떠하겠는가. 열여덟 살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그리 다른가. 내겐, 쓰쿠루가 겪은 그만큼의 상처가 과연 없었는가. 그런 점에서, 다시 태어난 쓰쿠루가 만난 하이다, 미도리카와가 리스트 혹은 리스트가 불러낸 인물의 현신이기에 ‘중의적’ 이름을 갖고 있다고 마냥 우길 수 없다. 어쩌면 쓰쿠루는, 아니 우리 모두는 영원히 ‘원색’의 인물을 만날 수 없고, 그런 인물이 될 수도 없을지 모른다. 이러한 색채의 변화를 ‘퇴색’으로 받아들이든 혹은 ‘더욱 풍부한 색감’으로 받아들이든, 그것은 어른이 된 개인의 선택이다.

글 박용완 기자(spi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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