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베토벤 대장정을 벌이고 있는 김선욱. 그의 안팎이 당당함으로 채워져 있으리라는 방증은 무대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9월 14일 LG아트센터.
글 김주영(피아니스트) 사진 LG아트센터
퍼포먼스의 총체적인 덕목으로서 ‘용기’는 매우 중요하다. 작곡가의 영감의 실체를 구체화하여 심신에 각인시키고 크고 작은 무대에서 얻은 요령들을 이상적으로 탈바꿈시켜 든든한 경험치를 안은 채 무대에 설 수 있기까지, 누구에게도 부끄럼 없는 당당함은 무대 위 용감한 연주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청중에게 다가가기 전, 자신의 음악적 행위 모든 것에 최종 결제 도장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베토벤이라면 그 용기의 크기는 얼마나 커야 할까. 2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베토벤 대장정을 벌이고 있는 김선욱. 그의 안팎이 당당함으로 채워져 있을 것이라는 방증은 무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빨리 들어가보고, 빨리 깨지고 싶다.” 음악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옳게 파악하고 싶다는 욕심뿐, 치기 어린 도발의 요소 등을 작품 속에 우겨넣겠다는 의도 없이 솔직하고 당당한 그의 각오는 회가 거듭될수록 확실해지고 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역량 전체를 솔직하게 작품 속에 투영하는 자세는 홀가분하며 감상자들에게도 그 자체로 시원한 뒷맛을 남긴다. 여기엔 이미 ‘도전’이나 ‘정복’이란 단어가 무색하며, 그저 위대한 악성의 그림자를 좀더 가까이 밟아보려는 노력 자체가 아름답게 그려진다.
무대에서 작곡가와 살아있는 의식의 흐름을 나눈다는 면으로 보자면, 소나타 27번 Op.90의 두 악장은 전형적인 베토벤의 스타일과 다소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김선욱에게 상대적으로 부담 없이 다가왔을 수 있다. 기복이 심한 초기 표제음악의 경향(1악장)과 슈베르트를 예견하는 소박한 노래(2악장)를 연주하는 김선욱의 손끝은 담백했고, 뉘앙스 역시 투명하게 마무리되었다. 또한 악장 간의 파우제 배열이 특히 뛰어났는데, 음상의 꼬리를 매력적으로 남긴 채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연출력이 두드러졌다.
32곡 중 쉬운 곡은 없지만, Op.101의 소나타 28번이 특별한 난곡인 이유는 작곡가의 내면 (서정미)과 고도로 세련된 작곡 기법(푸가)을 거의 동시에 처리해야 한다는 데 있다. 가볍게 시작한 1악장과 투박한 리듬의 스케르초 악장 사이에서 잠깐의 어색함을 겪었지만, 김선욱의 균형감각은 3악장의 난해한 대위법을 모두 소화하고 난 뒤에 나타났다. 기복이 심한 다이내믹 배열과 불규칙한 프레이즈를 통해 누구나 혼란을 겪게 마련인 3악장에서 김선욱의 ‘돌파 능력’이 빛을 발했으며, 한껏 여유로운 아타카(이어 연주하기)는 감상자들에게도 논리적 판단의 시간을 제공했다.
헬리콥터를 타고 본 에베레스트 산이 별다른 매력이 없듯, ‘하머클라비어’ 역시 위를 향해 보고 한음 한음 올라가야 하는 곡이다. 타고난 베토베니안들이 그러했듯, 김선욱이 건반을 두드리며 만들어내는 박진감은 곧 편안함으로 이어졌다. 피아니스틱한 아이디어를 작곡가의 스타일에 접목하는 방법이나, 갈고 닦은 기교의 전달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가릴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다는 식의 당당한 해석에서 일관성과 힘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스케일이 큰 다이내믹 연출로 거대한 그림을 만들어낸 1악장, 빠른 흐름으로 산만함을 잠재운 2악장, 담백한 구성으로 무거운 비장미의 과도함을 배제하는 데 성공한 3악장과 적극적인 비르투오시티의 표출이 개운한 뒷맛으로 남은 4악장 등 모든 요소들이 생생함과 신선함을 전달해주었다. 워낙 땀을 많이 흘리는 김선욱의 마지막 모습은 마라토너들의 경기 후 모습과 흡사했다. 아무쪼록 11월에 예정된 마지막 대장정까지를 함께한 청중이, 달리는 사람들만이 느낀다는 ‘러너스 하이’를 김선욱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