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도 페를레무테르 님버스 레코딩

사랑스러운 대가의 마지막 발자취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월 1일 12:00 오전

정말 맛있고 소중해서 혼자서 조금씩 먹곤 했던 사탕이나 과자 등과 함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필자에겐 대학 시절 우연히 님버스 레이블을 통해 알게 된 블라도 페를레무테르의 연주가 그런 비밀스런 즐거움의 대상이었다.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달리, 페를레무테르는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나를 가르친 간접적인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결코 서두르는 법 없는 차분한 진행과 매끄럽게 흐르는 터치, 화사한 음색에 이르기까지 페를레무테르의 연주 방식은 20대 초반의 내게 새로운 세계였다. 두 손은 건반을 더듬는 것이 아니라 파스텔톤의 꽃밭을 거니는 듯했고, 청아한 선율미는 따뜻함과 새초롬함을 동시에 머금고 있었다. 라벨이 특별히 사랑하던 제자였고, 그의 작품의 해석자 중 최고라는 찬사를 얻었던 페를레무테르인 만큼 라벨의 음반을 통해 그 첫인상을 얻었지만, 이후 만나게 된 쇼팽 작품들의 탁월한 아름다움도 필자의 기억에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2002년,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페를레무테르의 소식을 들은 것이 얼마 되지 않은 듯한데, 벌써 10년이 지나 그의 만년의 모습을 정리한 박스 세트를 만나게 되었다. 바흐·베토벤 등 그의 주 분야인 낭만을 제외한 레퍼토리를 발견하는 것이 반갑고, 80대 후반이 되기까지 녹음과 연주를 놓지 않았던 ‘사랑스러운’ 대가의 마지막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볼 수도 있다. 아울러 자연스러운 연주회장의 분위기를 최우선시하여 원포인트 마이크로 녹음한 님버스의 원거리 녹음 방식은 청자의 호불호를 떠나 페를레무테르의 예술이 남긴 향취를 더욱 짙게 만들어준다.

피아노곡뿐만 아니라 관현악 작품들의 분석에도 열의를 보였던 라벨의 연주는 작곡가를 직접 사사한 자부심과 확신이 은근한 뉘앙스로 표현된다. 모나지 않은 음상을 앞세워 짙은 서정성을 그려낸 소나티네 ‘밤의 가스파르’ 중 ‘온딘’에서 들려주는 여유롭고 나긋나긋한 느낌의 판타지도 잊을 수 없다. 단순 명료한 악상을 통해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우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페를레무테르 최대의 장기인데, ‘쿠프랭의 무덤’ 중 ‘리고동’ ‘미뉴에트’ 등이 하이라이트다.

노년의 멋진 풍모는 쇼팽의 해석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고급스런 음색과 흔들리지 않는 품격이 잘 표현된 네 곡의 발라드와 환상 폴로네즈 등은 현학적 자세를 일절 배제한 상태로 왜곡된 구석 없이 솔직 담백한 이야기 구성을 보여주고 있어 넓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녹음 시기와 연주자의 테크닉이 비례하지 않는 것도 흥미로운데, 1970년대 만들어진 소나타 2번과 3번에서 기술적으로 부정확한 부분이 많이 보이는 데 반해 79세 때 연주한 에튀드집, 그리고 1992년 88세에 녹음된 마주르카들에서 보이는 농염함과 신선한 에너지는 듣는 이들을 경이롭게 만든다.

술술 풀어내는 페를레무테르의 낙천적이고 자연스런 피아니즘은 일체의 과장을 허락하지 않아 레퍼토리에 따라 큰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다. 위의 두 작곡가 외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는 절대음악적 아름다움을 고고하게 지켜낸 해석으로 주목되며, 주 분야는 아니지만 베토벤 소나타 ‘열정’에서는 절제된 다이내믹 안의 교묘한 템포 루바토가 흥미롭다. 드뷔시 작품 가운데는 선이 굵은 표현의 ‘기쁨의 섬’이 훌륭하며, 작곡가 앞에서 연주하여 파리 음악원을 수석 졸업했다는 포레의 ‘주제와 변주’에서는 의외의 깊은 철학적 고뇌도 묻어난다. 글 김주영(피아니스트)


▲ 블라도 페를레무테르(피아노)
Nimbus Records CSM 1032 (AD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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