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벨 파우스트 파리 현지 인터뷰

아르모니아 문디 레이블의 간판 스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월 1일 12:00 오전

당신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파리에서 만난 이자벨 파우스트는 스스로를 ‘쇄골’을 드러내지 않는 거의 유일한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정의한다

12월 18일 파리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앞둔 이자벨 파우스트를 김나희 통신원이 만났다. 파리는 파가니니 콩쿠르 우승 후 이자벨 파우스트가 9년간 살았던, 인연이 깊은 도시이다.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의 계보에 자신의 이름을 굵직하게 새겨넣은 음악가답게, 그녀는 후배 음악가들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들려줬다.

당신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가장 인상 깊게 느끼는 것은 굉장히 정묘한 음색이다. 특별한 비결이 있나.

내 음색에 대해 하도 매일 듣다 보니 특별하다는 생각을 별로 못하는데 누군가 나에 대해 그렇게 말해준다면 그건 참 고마운 일이다(웃음). 악기가 좋아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건 전부가 아니다. 내가 쓰고 있는 스트라디바리우스 ‘잠자는 미녀’는 아주 깨끗하고 밝고, 빛이 깃든 소리를 내준다. 연주자가 어떤 소리를 내고 싶다면 그걸 이미 머릿속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악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연주자가 만들어가는 것이 소리이기 때문이다. 상상 속에서 가지고 있는 소리가 실제로 나타나게 된다. 그 다음에 요구되는 것이 기술적인 측면이리라.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어떤 바이올리니스트가 테크닉적인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가정해보자. 하지만 그가 음악적으로 어떤 소리를 내야 할지 알고 있다면 테크닉이 부족하더라도 결국에는 그 소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 테크닉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음악적으로 내가 어떻게 울리는가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그가 추구하는 소리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 소리는 어떻게 찾아가는가?

우선 음악적으로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악보에 적힌 것을 다 알고 나면 내가 어떻게 소리를 낼까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만약 레퍼토리에 상관없이 늘 같은 소리만 낸다면 그 소리가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영혼 없는 연주가 된다. 모든 위대한 작곡가들이 그들만의 색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곡을 쓰던 순간에 상상했던 소리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소리를 최대한 가깝게 재현해내는 것이 우리 음악가들의 할 일이다.

바흐부터 베르크, 버르토크까지 당신의 레퍼토리에 제약이 없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

바이올리니스트라서 얼마나 운이 좋은가. 피아노만큼은 아니지만 플루트나 비올라, 첼로에 비하다면 레퍼토리 폭이 훨씬 넓다. 모든 작곡가들의 음악언어와 색채는 완전히 다르다. 마치 매번 다른 목적지로, 다른 빛깔과 냄새를 지닌 도시로 떠나는 것처럼, 우리는 음악을 따라 새로운 세계 속으로 모험을 한다. 특히 더 선호하는 작곡가나 시기가 있다고 규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매 순간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고 어디에 집중하는지에 따라 늘 달라진다. 레코딩을 앞둔 상태라면 얼마쯤은 그 곡에 완전히 빠져 있고 그 아름다움에 몸과 정신이 다 취한 채로 그렇게 산다. 아주 강렬한 집중이자 마치 음악이 내 피부 아래로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경험이다. 레코딩이 끝나고 난 이후 이제는 이 세계에서 살 만큼 살아냈으니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집중만이 좋은 레코딩이라는 결과물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어쩌면 필수적인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신보인 버르토크는 브람스 협주곡에 이어 다시 한 번 대니얼 하딩과 호흡을 맞췄다.

그와 함께 작업하는 것은 아주 흥미롭고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준다. 브람스 협주곡 이후 콘서트에서 꾸준히 연주를 함께 해왔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커리어를 아주 일찍 시작했기 때문에 이룰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이뤘고, 개인적인 슬럼프나 어려움도 현명하게 극복해낸 산전수전을 다 겪은 지휘자다. 그가 지난 세월 동안 꾸준히 발전을 지속해가고 있고 이제 그는 굉장히 진지하게, 아주 효과적인 방식으로 어떤 것도 낭비하지 않고 음악을 만들어나간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레코딩은 솔로에 비해 정말 스트레스가 크다. 예산과 가능한 리허설 시간, 주어진 조건들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버르토크 녹음을 앞두고 우리는 실험 삼아 콘서트에서 같이 연주할 기회가 없었다. 예행연습 없이 바로 레코딩에 들어가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훌륭하게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그에게는 음악적인 허세 혹은 보여주기 식 제스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작곡가의 음악적 의도를 위해 존재한다. 그 점에서 하딩과 나는 음악을 바라보는 시선이 같다.

많은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관능적인 드레스를 입거나 하는 식으로 대중에게 어필하는 시대다.

종종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레이블에서 원하는 섹스 어필한 드레스나 포즈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레이블을 떠나거나 원하는 방향대로 레코딩을 할 수 없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곤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참 다행이다. 한 번도 비슷한 일을 겪지 않았으니 말이다. 연주를 위해 가장 중요한 건 편안한 옷차림이다. 그렇다고 청바지를 입고 연주를 하지는 않지만, 편안한 옷차림과 니트 카디건 등을 선호한다.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들 중 나는 데콜테(프랑스어로 목덜미에서 가슴까지 드러낸 부분)를 드러내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지 않는 거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웃음). 우리는 비주얼의 시대에 살고 있고, 음반은 더 이상 팔리지 않으며, 대중은 유튜브의 10초 광고도 못 견디고 정신없이 순간적으로 반응하며 채널을 돌린다. 여유가 있거나 스폰서가 들어온다면 우아한 오트쿠튀르 드레스를 입는 게 뭐가 나쁜가. 경쟁이 심한 세상이고 더 이상 음악만으로 어필하기에는 어려우니 기획사의 마케팅 전략을 따르라고, 그게 성공을 위한 지름길이며 현명한 선택이라고 주변에서 조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의 음악적 퀄리티를 믿어야 한다.


▲ Isabelle Faust 1972년 독일 에슬링겐 출생. 다섯 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했고, 크리스토프 포펜·데네시 지그몬디에게 배웠다. 1997년 발매한 버르토크 바이올린 소나타로 그라모폰상 ‘올해의 젊은 아티스트 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아르모니아 문디 간판 아티스트로 국내에도 그 팬 층이 두텁다. 2012년 내한, LG아트센터에서 피아니스트 알렉산드르 멜니코프와의 듀오 리사이틀을 선보이기도 했다

결국 음악이 음악가의 유일한 무기다. 다른 것은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음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설령 당장은 아닐지라도 시간이 당신이 지니고 있는 ‘음악’의 가치에 대해 분명히 답해줄 것이다. 이 음악의 가치에만 의존하기가 미덥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런데도 나는 자신의 음악을 믿으라고 말하고 싶다. 요즘은 내가 어렸을 때보다 더더욱 어렵다. 내가 커리어를 시작하던 1980년대에는 뭐랄까 지금만큼은 아니었으니까.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바뀌고, 굉장히 짧은 시간에 시선을 끌어야 하는 자극 속에 노출된 세상이 되었다. 긴 시간을 두고, 인생 전체를 보고 꾸준히 지속적으로 발전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거나 그런 계획을 세우는 건 태평한 행동이 되어버렸다. 내 경우 운좋게 가족과 주변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정상적으로 아비투어(독일의 대학입학자격시험)를 마침으로써 부모님은 내가 음악원만 다니면서 바이올린만 할 줄 아는, 편중된 인간으로 자라나지 않도록 신경을 써주었다. 요즘에는 그런 걸 하면 낭비라고들 생각한다. 어린 나이에 음악원에 들어가 남들보다 더 일찍 화제를 일으키며 데뷔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세상이 변했다. 만약 일찍 연주를 시작했다고 한들 그것이 앞으로의 연주를 보장해주는가? 잠깐 이목을 끌다가 사라져버리는 신동들이 얼마나 많은가.

만약 젊고 실력 있는 여성 바이올리니스트가 음악과 바이올린 테크닉 외 무언가를 더 가졌다면 그 ‘조커’ 카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게임을 하고 싶을 것이다. 이해한다. 하지만 스스로 음악가가 아닌 상품이 되기를 자초하는 것은 긴 관점에서 결코 현명하지 않은 행동이다. 우리가 이 모든 일들을 하는 이유는 음악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쇄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니지 않나. 여전히 클래식 음악을 듣는 청중은 보수적인 경향이 강하다. 지나친 노출은 음악이 아닌 ‘노출’만으로 화제에 오를 뿐이다.

오랫동안 사사한 크리스토프 포펜의 이야기를 좀 들려달라.

포펜과는 7년을 같이 공부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다. 요즘은 그가 정말 유명해져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바쁘게 지내며 지휘를 겸하고 있지만, 내가 학생이던 시절에 그는 그냥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운이 좋았다. 데트몰트 음악원에서 이제 막 교육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던 터라 클래스에는 딱 세 명의 학생뿐이었다. 1회 레슨은 세 시간 넘게 지속되었다. 곡 하나를 깊이 탐구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에게서 받은 가르침 중 하나는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데 막상 실내악을 해보면 정말 쉽지 않다. 나는 현악 4중주의 제2바이올린이었는데, 음악의 구조를 볼 수 있다는 점,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중간 역할을 하는 점이 좋았다. 꼭 앞에 나서서 주 멜로디를 연주해야만 만족하는 게 바이올린의 역할이 아니다. 게다가 비올라는 내 친오빠였다. 그와 함께 4중주단의 안쪽 소리를 만들어가는 것은 충만한 경험이었다. 폴리포니와 음악적 구조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어야만 단단하고 결집된 안쪽 소리를 빚어낼 수 있다. 화성적으로 어떤 진행이 지속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으므로 제1바이올린보다 오히려 더 보람찬 부분이 있다.

끝으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는 왼손 손가락이 반 마디 이상씩 더 길다.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왼손을 늘려왔으니. 굳은살은 늘 있어왔던, 이제는 신체의 일부 같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어떤 식으로든 몸에 흔적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남편의 적극적인 외조와 가족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꾸준히 연주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일과 사랑과 가정 사이에서 균형 잡힌 삶을 산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늘 연주 여행을 다녀야 하고, 집 보다 호텔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음악가들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만약 나에게 단 하나의 생이 주어진다면 바이올린을, 음악을 할 것이다. 이 생을 다 살고 다음에 또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그때는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글 김나희(파리 통신원) 사진 Felix Bro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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