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자루스키

첫 내한 앞둔 카운터테너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4월 1일 12:00 오전

당신이 궁금했어요

서로 등을 진 18세기의 신사와
멋진 미소의 21세기 청년.
우리는 궁금하다.
뒤돌아선 남자의 정체도,
첫 내한을 앞둔 잘생긴
카운터테너의 사연도!

예쁜 목소리와 귀공자 같은 용모, 36세의 젊은 카운터테너 필리프 자루스키는 최근 프랑스 음악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예술가 중 한 명이다. 언론 매체에 쉬지 않고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 대중적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권위 높은 프랑스의 음악상인 빅투아르 드 라 뮈지크, 즉 ‘음악의 승리상’을 2004년부터 쉬지 않고 받아왔다는 점에서 자루스키가 단순히 멋진 외모로 인지도를 높인 음악가가 아니라는 점이 증명된다.
그는 음량은 작지만 곱고 깨끗한 퍼포먼스로 호응을 받아왔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바이올린을 공부했으나 자신이 ‘제2의 벤게로프’는 아닌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자 10대의 자루스키는 피아노와 성악으로 전공을 바꾼다. 카운터테너로서의 재능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소프라니스트(남성 소프라노. 변성기가 지나서도 가성을 쓰지 않고 소프라노의 음역을 구사하는 남자 가수) 파브리스 디 팔코의 연주를 들으며 그 분야에 마음이 끌린 자루스키는 18세 나이로 카운터테너로서의 첫발을 디딘다. 여전히 자루스키의 스승 격으로 그를 보살펴준다는 니콜 팔리앙은 자루스키의 천사 같은 음성에 매료되어 카운터테너로서의 재능을 크게 향상시켜주었다. 지난해 가을, 자루스키가 파리넬리 음반(포르포라의 아리아를 담았다)을 내놓았을 때 프랑스의 ‘엑스프레스’ 지는 “카운터테너들 간의 전쟁은 없을 것이다”라는 기사 제목으로 자루스키가 지닌 프랑스 카운터테너계의 독보적인 위상을 시사했다.
오는 4월 30일 LG아트센터에서의 첫 내한 공연을 앞둔 필리프 자루스키. 그와의 인터뷰는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웠다. 미국 투어를 마친 그는 최근 프랑스 순회공연에 올랐다. 마감을 하루 앞두고서야 겨우 전화 인터뷰를 가질 수 있었다. 이야기는 역시 화제를 모았던 신보 ‘파리넬리’로 시작됐다.

‘파리넬리’ 음반 재킷 사진이 아주 흥미로운데, 당신의 아이디어였나요, 아니면 음반사의 뜻이었나요?
제 생각과 음반사의 의도가 만나 무르익는 가운데 잉태된 아이디어입니다. 제 첫 아이디어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 조금 낡고 조촐한 궁전 가운데 제가 있는 식이었어요. 저는 처음부터 파리넬리처럼 18세기 당대 의상을 입고 싶지 않았어요. 음반 재킷에 작곡가 포르포라를 등장시키자는 건 사진작가의 아이디어였고, 결국 콩베르사시옹(conversation)이란 소파를 중심으로 스승인 포르포라와 제자인 저를 배치하는 식이 되었습니다. 18세기 가구의 특징을 간직한 이 소파가 재킷 사진에 환상적인 균형과 구조적 아름다움을 부여했습니다. 사람들은 등을 지고 앉은 사람이 포르포라인지 파리넬리인지 묻곤 하는데, 물론 제 입장에선 포르포라입니다. 이 사진에는 일종의 ‘동작’이 있어요. 둘이서 뭔가를,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토론하고 있는 것 같죠. 이 묘한 분위기가 마음에 듭니다. 과거와의 대화는 필수이지만 이 시대 음악가로서 현재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음반 재킷처럼 평소 차림도 스포티한가요?
저는 항상 운동화 차림이에요. 여행하기 편하니까요. 그러나 이와는 좀 상반되게,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의 연주 관례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저는 (파리넬리 시절의) 이런 아리아들을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공연하고 싶진 않습니다. 스모킹(간소화된 턱시도)을 입으면 조끼 덕분에 일단 몸이 곧게 서지요. 18세기에도 화려한 무대 의상들은 몸에 꼭 맞게 고안돼 옷 입은 사람의 실루엣을 완성시켜주었어요.

이 음반에서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와 듀오를 불렀습니다. 당신에게 바르톨리는 어떤 존재인가요?
함께 노래하기 전부터 저는 일찍이 바르톨리의 일등 팬이었습니다. 제게 큰 영감을 준 분이죠. 성악 음반 역사를 바르톨리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을 정도니까요. 그녀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에 두면서 동시에 화려한 사진과 설명을 담은 고급스러운 앨범을 제작해왔습니다. 그러한 프로젝트를 구상해낸 사람은 바르톨리 그 자신이죠. 그녀가 없었다면 카스트라토 전통을 역사적 차원에서 사색해보고자 했던 저의 파리넬리 앨범 같은 호화 프로젝트를 음반사에 제안하는 게 어려웠을 거예요. 그런 점에서 바르톨리가 저에게 준 영향은 매우 커요. 우리는 알려지지 않은 레퍼토리를 발굴·연주한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어요. 저도 바르톨리의 제안으로 그녀의 음반 ‘미션’에서 함께 노래한 적이 있는데요. 지금도 꿈처럼 느껴져요. 불과 한 5년 전까지만 해도 제 인생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와 바르톨리가 친구인지를 묻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친구라 말하기에는 바르톨리를 향한 저의 존경심이 너무 큽니다!”라고 답합니다.

예술적 측면에서는 충분히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예술적으로는 공통점이 아주 많아요. 바르톨리는 아주 엄격한데다 공부도 많이 하고, 대단히 긍정적인 에너지를 지녔죠. 특히 그녀 안에 잠재된 ‘이탈리아나타’, 즉 이탈리아성은 제가 항상 추구하고 있는 바입니다. 우리 카운터테너들에게는 독특한 음색이 있지만, 그럼에도 메조소프라노들이 지닌 음색의 팔레트에 비하긴 어렵습니다. 바르톨리는 그런 점에서 ‘요녀’예요! 그녀와 함께 노래하는 건 큰 영감이 되지만 동시에 대단한 도전이죠. 상대 가수가 너무나 표현적이니 쉽지 않죠. 그녀와의 교류, 동감이 크게 요구됩니다. 결론적으로 바르톨리는 위대한 예술가로서의 혜안을 지닌 분입니다.

지난해 잘츠부르크 오순절 페스티벌(바르톨리가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에 오른 ‘줄리오 체사레’에서 안드레아스 숄과 안네 소피 폰 오테르와 공연했죠. 낭시의 ‘아르타세르세’ 공연에서는 여러 젊은 카운터테너들과 함께 했고요. 흥미로운 체험들을 거듭하며 어떤 걸 느꼈나요?
(‘아르타세르세’는 헨델·포르포라와 동시대를 살았던 빈치의 작품이다. 낭시 프로덕션은 자루스키·첸치치·파졸리 등 젊고 실력 있는 카운터테너가 한자리에 모여 큰 화제를 모았고, 그 성공에 힘입어 최근 쾰른에서도 공연됐다.)
제가 언젠가 함께 노래해보고 싶었던 두 성악가가 다름아닌 바르톨리와 안네 소피 폰 오테르였습니다. 그런데 한 공연에서 이들 두 가수와 함께 노래할 수 있었으니, 섭외가 들어왔을 때 주저할 이유가 없었죠. 안드레아스 숄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아는 사이로 퍼셀 레퍼토리를 통해 듀오를 한 적이 있어요. ‘아르타세르세’에서는 여러 카운터테너들이 줄줄이 꼬치에 꿴 것처럼 연이어 등장합니다. 사실 이 프로덕션은 여러 면에서 거의 ‘역사적’이라 부를 만합니다. 거의 남성 가수들로 배역이 이뤄진 이 작품은 18세기 가장 유명했던 오페라 형태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작품을 연주할 절호의 기회를 얻었고, 300년 전 대성공을 거둔 작품이기에 리바이벌 되자마자 즉각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봅니다. 그만큼 음악적으로 각별한 매력을 지닌 작품입니다. 근래 들어 정말 많은 카운터테너들이 등장했고, 그들의 음성은 각각 다릅니다. ‘아르타세르세’ 공연에 카운터테너 다섯 명이 모인다고 하니, 일부에서 음성들이 너무 비슷해서 획일적인 느낌이 들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일단 저와 막스 에마누엘 첸치치의 음색이 다른데다 나머지 카운터테너들 모두 각자의 개성을 지녀 가수 입장에서는 걱정이 없었습니다.

‘아르타세르세’ 새 프로덕션의 성공을 보더라도, 21세기는 카운터테너의 세기일까요?
점점 더 많은 카운터테너들이 활동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때의 유행이려니 했겠지만, 카운터테너는 독립적인 분야로서 영구적으로 자리 잡을 겁니다. 이미 수 년 전부터 테크닉 및 음색의 다양성에서 이 분야는 현저한 발전을 이뤘습니다. 큰 음악홀에서 노래할 수 있는 충분한 성량을 지닌 카운터테너들도 많이 출현했고요. 현대음악 분야에서도 미래가 밝습니다. 저에게도 곡을 보내오는 작곡가들도 많은데, 마르크 앙드레 달바비가 대표적입니다.

이번 첫 내한 공연은 파리넬리 대 카레스티니라는 대결구도로 꾸며집니다. 그들이 정말 라이벌이었으며 당신이 선정한 곡들에서 이 점을 엿볼 수 있나요?
그들의 라이벌 의식은 레퍼토리들을 통해서 느낄 수는 없습니다. 젊은 시절의 그들은 같은 오페라극장에서 노래했습니다. 카레스티니(헨델은 파리넬리보다 카레스티니를 더욱 총애했다)를 고용하듯 파리넬리를 고용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카레스티니를 위해 쓰인 ‘아르타세르세’의 아리아를 부를 수 없다”라는 파리넬리의 편지가 이 점을 잘 대변합니다. 그들은 서로를 증오했습니다. 유럽 투어에서는 주로 파리넬리 곡들(포로포라 작곡의 아리아)을 불렀지만, 이번 첫 대규모 아시아 투어를 위해서 (카레스티니의 레퍼토리였던) 헨델의 알려진 아리아들을 부르고 싶었습니다. (베니스 바로크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이번 자루스키의 첫 내한 공연은 18세기 유럽 오페라계의 대표적인 라이벌인 카스트라토(거세 가수) 파리넬리와 카레스티니의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자루스키는 이들 두 가수를 두고 1733년부터 1736년까지 런던 오페라계를 양분했던 작곡가, 포르포라와 헨델의 아리아를 들려줄 예정이다).
포르포라는 헨델의 음악이 지닌 가치를 알고 있었고, 이에 라이벌로 맞서기 위해 파리넬리를 초대했습니다. 파리넬리는 포르포라에게 큰 빚을 진 상태였어요. 포르포라를 통해 배웠고 자라났으니까요. 파리넬리가 포르포라를 위해 런던으로 왔다는 사실 때문에 헨델은 당시로서는 차선이었던 카레스티니를 택합니다. 실상 카레스티니는 파리넬리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난 ‘무대체질형’ 연기자였습니다. 파리넬리는 그 점에서 카레스티니에게 졌고요. 제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러한 라이벌 의식을 통해 헨델이 최상의 컨디션을 구가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대표적으로 그의 오페라 ‘알치나’ ‘아리오단테’를 들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걸작들이죠. 제가 서울 연주를 위해 고른 ‘부정한 여인(Scherza Infida)’은 헨델이 쓴 아리아 중 가장 아름답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카스트라토와는 아주 다른데요.
헨델이나 포르포라의 악보를 읽으며 파리넬리와 카레스티니의 음성을 상상해볼 수는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음악적 역량을 염두에 두고 스스로를 단련하지만, 신체적인 면에서 그들과 저의 목소리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들은 흉부에서 올라오는 목소리로 노래했는데, 팔세토(가성)를 쓰는 오늘날 카운터테너들에 비해 훨씬 더 파워풀했습니다. 악보에서 표출되는 음악적 표현성을 저 자신의 감수성과 보컬 성격에 맞춰 적응시켜야 함이 중요했습니다. 물론 관객들 각자가 상상하는 캐릭터들이 있겠지만 음악적으로 헨델에게 대립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단 몇 개의 음들로 그는 걸작을 만들었으니까요. 한편 포르포라는 카스트라토의 목소리를 위한 곡을 아주 잘 만들었습니다. 그는 파리넬리를 잘 알고 있었고 음악인으로서 파리넬리의 한계까지 존중했어요. 사실 (다른 작곡가들이) 파리넬리를 위해 만든 곡들을 보면 테크닉적으로 어렵기만 하지 연주자 입장에서 난센스인 곡들도 적지 않습니다. 포르포라의 경우, 자신이 직접 키운 제자 격의 파리넬리가 지닌 역량을 잘 알기에 가장 비르투오소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곡들을 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점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파리넬리와 카레스티니는 당신에게 단지 비현실적인 신화인가요, 아니면 좋은 레퍼런스인가요?
굳이 비교하자면 파리넬리의 삶은 곧 전설입니다. 그는 일찍이 무대를 떠나 마드리드로 갔어요. 외교관들이 배출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아는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 왕자들과 공작들, 그리고 문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을 정도로요. 카레스티니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어요. 제게 카레스티니는 전형적인 카스트라토입니다. 아주 많은 색을 지닌 인물이죠. 그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고, 자만심이 강했고, 다시 가난 속에서 죽었어요. 그는 노래를 그만둔 후 바로 세상을 떴지요. 커리어의 말기 또한 무척 어려웠어요. 저의 어쩐지 카레스티니에게 끌립니다.


▲ 화제를 낳은 자루스키의 ‘파리넬리’ 음반 재킷

당신의 음역은 어떻게 되나요?
비교적 맑은 음색을 유지해왔습니다. 아주 낮은 알토도 아니고, 아주 높은 소프라노도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항상 메조소프라노 음역을 선택해왔어요.

당신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감탄하는 바인데, 어떻게 그렇게 길게 음을 잇죠?
제가 파리넬리보다 자주 숨을 쉰다는 사실을 아세요? 길게 늘어지는 첫 음을 예로 들면, 파리넬리는 제가 선보이는 것보다 두세 배는 더 길게 음을 끌었다고 전해집니다. 공연 후 관객들이 도입부가 정말 놀랍고 인상적이었다고 칭찬할 때마다, “저보다 세 배나 긴 숨을 지녔던 카스트라토들도 있었는걸요”라고 답하곤 합니다.

당신이 구사한다는 ‘미세 호흡법’에 대해 설명을 좀 해주세요.
저는 숨을 아주 낮게 쉽니다. 사실 숨 쉬는 것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여야 합니다. “하!” 하고 한 껏 들이쉬면 음악적 흐름을 끊게 됩니다. 아마 제가 숨 쉬는 것을 거의 못 들으셨을 거예요. 아주 깊은 숨이지만, 거의 침묵 가운데 쉽니다. 그 다음 관건은 호흡을 절약하는 방법에 있습니다. 그런 테크닉들을 익힌 후 저만의 아주 긴 숨을 갖게 되었죠. 제가 카스트라토 레퍼토리를 노래하기 시작한 지 벌써 10년입니다. 만약 제가 다른 레퍼토리를 노래했다면 이런 창법이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18~20세 때부터 아주 긴 보컬리즈를 숨 쉬지 않고 부르는 트레이닝을 했어요.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제가 부르고 싶은 레퍼토리가 요구하는 한계를 만났고, 이런 테크닉을 발전시키게 됐습니다. 노래를 하면 할수록 이런 테크닉이 단순화되고 또 자연스러워졌어요. 즉 디테일을 위해 많은 훈련을 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이런 디테일들을 간략히 종합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노래를 하면 할수록 말하듯 부르게 됩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뤄진 건 아니죠.

당신은 성악가가 되기 전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공부했죠.
성악을 시작했을 때, 그 엄격한 규율을 익히는 데 바이올린을 공부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바이올린에서 성악으로 전향한 것은 일종의 작은 혁명이었어요. 바이올린을 공부할 때는 단어를 통해 노래할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처럼 ‘단어’를 노래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죠. 처음 노래 공부를 시작했을 때를 돌이켜보면, 텍스트가 지닌 내용과 감정에 앞서 너무나 기악인적인 마인드로 음들을 노래하곤 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악보에 있는 음표를 연주하고 독립적인 해석을 할 수는 있었지만, 단어가 들어간 텍스트를 다루는 작업은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 하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당신은 젊고 매력적이고 팬들도 많죠. 음악 외에는 무슨 일을 하나요? 또래들처럼 클럽에도 가나요? 운동도 하고요?
제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에 저의 팬이 있다는 사실이 전 참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그런 점에서 인터넷·유튜브 같은 온라인 환경에 감사합니다. 덕분에 국제적인 커리어를 구축하는 것이 과거보다 훨씬 더 쉬워졌다고 봅니다. 연주 전날은 피하지만, 물론 클럽도 갑니다. 좀 게을러서 그간 운동을 많이 하지는 않았는데, 이제 이팔청춘이 아닌 관계로 실루엣을 지키기 위해서 운동도 신경 써서 해보려고 합니다.

당신을 알아보고 몰려드는 광적인 팬들은 없나요?
제 목소리의 노예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가능한 한 정상적인 삶을 누리려고 합니다. 길거리 혹은 모임에서 저를 알아보는 팬들은 있지만, 무슨 저스틴 팀벌레이크를 만난 것마냥 히스테리를 부리며 소동을 일으킨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이 점이 클래식 음악 스타들의 특권이지요.

제 눈엔 팀벌레이크보다 더 미남인데요.
제가 더 잘 생겼다고요? 하하하. 고맙습니다!

필리프 자루스키 첫 내한 공연
4월 30일 오후 8시 LG아트센터. 포르포라의 오페라 서곡과 아리아, 헨델의 콘체르토 그로소와 오페라 아리아들. 카운터테너 필리프 자루스키·베니스 바로크 오케스트라

글 배윤미(파리 통신원) 사진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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