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음악의 최전선에 있는 프랑스 오를레앙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으로 온 피아니스트 플로랑 보파르를 만났다. 음악, 그 안에 담긴 진심 어린 열정에 관한 이야기가 그의 목소리를 타고 울려 퍼졌다.
현대음악의 최전선에 있는 프랑스 오를레앙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으로 온 피아니스트 플로랑 보파르를 만났다. 음악, 그 안에 담긴 진심 어린 열정에 관한 이야기가 그의 목소리를 타고 울려 퍼졌다.
음표 위에 놓인 기차를 달리게 했던 나의 어린 시절
나는 다섯 살에 피아노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이었고,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자 피아노 조율사·제작자였다. 나 역시 간단하게 피아노 페달을 고치거나 줄을 교체하는 일 정도는 혼자 할 줄 안다. 전체 조율과 정음까지는 할 수 없지만, 피아노의 메커니즘은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연주 가운데 내가 원하는 음색을 표현해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어린 시절 장난감을 무척 좋아했던 나에게 피아노는 누르면 소리가 나는 신기하고도 거대한 장난감이었다. 아버지 덕에 나는 이 거대한 장난감을 제대로 소리 내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세 살 때부터 알게 됐다.
다섯 살이 되면서 아버지로부터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놀기 좋아하는 내가 싫증 내지 않고 꾸준히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아버지는 놀이처럼 즐겁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이 거대한 장난감을 내가 원하는 대로 소리 낼 수 있다니!’ 나는 단번에 매혹됐다. 아버지는 기차나 자동차 장난감을 악보 위에 가져다놓고 내가 연주한 프레이즈만큼 기차가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말하셨다. 나는 장난감 기차를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플라스틱 레일 위가 아닌 음표 위에 놓인 기차를 달리게 하려고 열심히 피아노를 쳤다.
장난기 많은 어린이였던 내가 매일 피아노 앞에 앉아 꾸준히 연습할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현명한 가르침 덕분이었다. 많은 부모들이 재능이 있어 보이는 아이들에게 연습을 강요하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덧씌우는 바람에 아이들이 음악에 질려버리는 경우를 종종 본다. 아버지는 나에게 피아니스트가 되라고 강요하기보다는 한 음 한 음 연주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음악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먼저 알려줬다.
아홉 살 무렵 리옹국립음악원에 들어갔고, 열두 살에는 리옹국립고등음악원에서 이본 로리오를 사사했다. 학교에서는 수학을 좋아했는데, 이후 파리고등국립음악원에 진학한 후에도 수학과 음악 사이에서 많이 갈등했다. 모든 것이 정제된 수의 세계는 음악만큼 매혹이 숨어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건 허수 개념이었다. 문제를 풀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해내고, 그 상상 속 존재로 인해 문제가 해결이 되고, 심지어 현실에 그걸 응용할 수 있다는 것이 나를 전율케 했다.
음악의 지평을 넓힌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 창단 당시부터 피에르 불레즈가 모델로 삼은 단체는 파리 오케스트라였다. 처우나 보수는 같지만 현대음악은 악보를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엄청나다. 풀타임이라도 3분의 1은 악보를 준비하고 3분의 2는 연주를 하는 데 시간을 쏟는다. 지금은 고전이 되어버렸지만 당시만 해도 리게티·불레즈·슈토크하우젠의 악보는 읽고 준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에 우리의 작업은 파리 오케스트라 단원들처럼 단순히 리허설과 연주 시간만을 계산할 수는 없었다.
1988년, 스물넷의 나이에 앙상블에 들어갔다. 현대음악에 특별한 애정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음악원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고, 그 배움을 통해 피아니스트로서 내가 더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으로 불레즈의 존재가 큰 동기가 됐다.
하지만 정작 오디션 곡목이 발표되고 나니 눈앞이 캄캄했다. ‘과연 저걸 다 준비나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포기했는데, 다행히 아무도 뽑히지 않았다. 곧 두 번째 오디션이 열렸고 오디션 곡들도 훨씬 쉬워졌다.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는 운이 좋아 합격했다. 돌이켜보건대, 앙상블에서 경험한 음악적인 황홀함과 기쁨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무리 오디션 곡들이 어렵더라도 첫 번째 오디션부터 열심히 준비했을 것이다.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의 분위기는 가족적이었다. 모두 같은 길을 걸어간다는 동지의식도 있었다. 당시 대다수 음악가들은 1940년도에 멈춘 채 그 이후 작품을 연주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편’, 현대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저편’으로 가르는 경향이 강했다. 실제로 나에게도 여전히 ‘현대음악 전문 피아니스트’라는 호칭이 따라다니지 않나? 나는 그냥 피아니스트일 뿐인데 말이다. 나는 앙상블 밖에서 꾸준히 고전 레퍼토리로 솔로와 실내악 연주를 지속했고, 1998년부터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초견 연주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흔히 누군가를 스페셜리스트라고 지칭하고, 분류를 통해 딱지를 붙이고 싶어 한다. 무언가 하나를 잘하는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도 뛰어날 수 있다는 걸 쉽게 간과한다. 나는 자신 있게 현대음악을 연주한 경험이 연주자로 하여금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준다고 말할 수 있다. 현대음악과 고전 레퍼토리를 동시에 연주하는 것은 각각의 음악적 역량을 키워주며 전반적인 음악성 역시 더욱 비옥해진다. 피에르 로랑 에마르와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그랬고, 클라우디오 아바도 역시 현대음악을 무대에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연주되지 않았던 곡과 마주한다는 건 설레는 동시에 두려움을 동반하는 일이다. 또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도 같다. 고전 레퍼토리들은 연주자별로 해석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어떤 음악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시작하는 경우다. 베토벤이나 쇼팽의 작품을 듣지 않은 채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현대음악은 악보만 있을 뿐 초연의 경우 단 한 번도 세상에 온전히 나오지 않은 음악이다. 우리는 그 음악이 무엇이 될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노력하고 상상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위험을 감수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 현대음악의 매력이다. 작곡가가 눈앞에 존재하고, 그들이 상상했던 음악이 무엇인지 생생한 목소리로 전해 들으면서 함께 창작의 과정을 나눌 수 있다.
현대음악 작곡가들과의 만남은 마치 세례를 받는 것과 같았다. 불레즈·뒤티외·리게티·슈토크하우젠… 눈앞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영감 충만한, 유일무이한 경험이었다. 인간의 머릿속에서 이렇게 한없이 새롭고 듣는 이를 놀랍게 만드는 아이디어로 가득한 음악이 창조될 수 있는지 생각하다 보면 작곡가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 만약 앙상블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다른 방식으로 음악적 역량을 늘릴 수 있는 무언가를 했겠지만, 이 이상의 가르침과 성장을 줄 수 있는 활동은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악보, 특히 친필 악보를 펼칠 때면 그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1990년대 후반, 진은숙의 악보를 처음 받아본 순간 가슴이 떨렸다. 단 한 음도 무의미하게 낭비되지 않은, 완전무결한 그녀의 스타일 자체가 작품의 완성도를 증명하고 있었다. 곧장 피아노 에튀드 악보를 구해 준비를 했지만 안타깝게도 팔 부상으로 연주를 쉬면서 직접 연주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은 리옹국립고등음악원에서 내가 자주 레슨 하는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나는 자신 있게 현대음악을 연주한 경험이 연주자로 하여금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준다고 말할 수 있다.현대음악과 고전 레퍼토리를 동시에 연주하는 것은 각각의 음악적 역량을 키워주며 전반적인 음악성 역시 더욱 비옥해진다
상상력 풍부한 귀로 빚은 현대음악이 실현되기까지
불레즈는 작곡가이며 지휘자다. 불레즈의 음악을 불레즈의 지휘로 연주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는 작곡가로 출발했으나 여러 이유로 지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그 자신의 음악을 지휘하기 위해, 그리고 그가 믿었던 현대음악을 아주 정확하고 섬세하게 지휘해내기 위해서였다. 여타의 지휘자들과 구별되며 특이하다고 할 수도 있는 그 제스처들은 스스로 음악을 지휘하기에 가장 이상적이었다.
지금도 불레즈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준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피아노에 자리한 내 옆에 앉아 그가 원하는 지점으로 나를 이끌어갔다. 그의 제스처로 인해 비로소 음악에 빛이 깃들 수 있었다. 그가 원하는 정확함과 계산된 음색은 물론 미묘한 리듬과 박자의 사용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은 그로 인해 가장 눈부시게 빛났다.
상상력 풍부한 귀로 빚어낸 현대음악을 실현시키려면 그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연주 불가능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낯선 악보를 만난 연주자들의 눈과 손이 작곡가의 귀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은 작곡가가 꿈꾼 음악을 현실화하기 위해 겪어내야만 하는 필수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앙상블에서 활동하며 지속적인 연주를 통해 작곡가들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그때의 쾌감과 뿌듯함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불레즈의 ‘삽입구(Incises)’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굉장히 짧은 작품이었다. 그는 세포가 분열 증식을 해나가듯 이 곡을 점점 확장시켰다. 그의 음악적 아이디어가 한순간 엄청나게 자라나 대곡이 되었다. 개정을 거쳐 곡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역시 한 작품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보는 것과 동일한 특별한 감정을 선사한다.
현대음악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있다. 우리를 선구자라 지칭하는 것이나 남들이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음악을 바라본다는 것은 사람들이 현대음악에 갖고 있는 선입견을 덧씌운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현대음악을 낯설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익숙한 언어로 전개되는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음악 고유의 언어에 익숙해지고, 어떤 소리가 맥락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상상해본다면 현대음악은 무의미한 소음 혹은 이상한 주법과 과도한 실험정신으로 뭉친 음악이 아닌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음악이 된다.
현대음악을 그저 어렵고 낯설다고 느끼는 대중들에게 무엇보다 공연장을 찾으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매 공연 때마다 간단한 해설을 곁들이고, 작곡가의 언어 자체를 미리 설명하기 위해 애쓴다. 이번에 내놓은 쇤베르크 음반이 좋은 예다. 일반인들은 쇤베르크의 음악에 숨어있는 이전 작곡가들의 영향에 대해 잘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쇤베르크에게서 바흐를 느끼는 것, 바흐로부터 이어져온 음악의 연속성을 발견하는 것은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가 의미 있는 무엇이 되도록 한다.
현대음악을 위해서는 레코딩보다 더 많은 공연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연주자의 존재를 눈앞에서 느끼고, 그 소리와 음색을 현장에서 느낄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피에르 로랑 에마르의 올드버러 페스티벌이나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는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오를레앙 콩쿠르에서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수많은 초연곡과 자주 연주되지 않았던 레퍼토리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이토록 많은 곡들이 창작되고 있다는 사실은 음악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흐뭇하다.
8년 전, 근육에 문제가 생겨 연주를 쉬어야만 하는 상황을 겪으면서 연주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는 문제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연주에 중점을 두는 삶이 아니라서 느끼는 패배감이 아닌, 과연 내가 좋은 선생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음악을 하는 방법 중 하나이고, 다음 세대의 음악가들과 함께 음악을 나누는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리옹국립고등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꾸준히 해온 실내악 페스티벌이나 독주회 준비처럼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음악을 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음악이라는 거대한 우주를 생각한다면 나는 아주 사소한 일들을 하고 있고, 내가 하는 일들은 위대한 모험도 탐험도 아닌 작은 발걸음을 떼는 행위에 불과하겠지만,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이 모든 것을 열정과 사랑으로 해왔다는 점이다.
지난 8년간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통증과 씨름하면서 내 생에 음악이 아닌 다른 것은 할 수 없다는 것, 반드시 음악이어야만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프랑스가 아니었다면, 피아노를 접할 수 없는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음악을 접하는 기회가 적은 환경이었다면 스틸 드럼을 연주하고 노래하는 길거리 악사가 되지 않았을까.
내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인다면 그건 ‘뜨거운 열정’일 것이다. 그리고 음악을 통해 나의 꿈과 상상, 내 생을 걸고 헌신하는 음악에 대한 마음이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