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토에게 주어진 과제
디토 페스티벌의 ‘Joy of Mozart’
6월 10일 LG아트센터
올해로 여섯 해를 맞은 디토 페스티벌은 매년 개최하는 공연마다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클래식의 대중화라는 어려운 과제를 극복해왔다. 2014년 디토 페스티벌은 ‘모차르트’가 그 중심에 있었고, 지난 6월 10일에는 지휘자 정민이 이끄는 디토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조재혁이 함께했다.
디토 오케스트라가 이번 페스티벌에 내건 곡은 스트라빈스키의 현을 위한 협주곡 D장조와 모차르트 교향곡 29번이었다. 하지만 모차르트라는 테마에 뜬금없이 자리 잡은 스트라빈스키는 의구심을 자아냈다. 아마 지휘자 정민은 짜릿하고 활발한 스트라빈스키로 승부수를 띠울 생각이었던 것 같다.
스트라빈스키의 현을 위한 협주곡 D장조는 시작부터 스트라빈스키 특유의 활기를 표현해내려는 단원들의 비장함이 느껴졌다.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도입 부분의 비올라 솔로 역시 안정적이었지만 단원들 개인의 역량과는 별개로 전체적인 하모니는 찾아볼 수 없었다. 통통 튀는 생동감이 필요한 제1바이올린 안에서 약간씩 속도가 어긋나기 시작하자 처음에 안정된 인상을 주던 저음 현악기 역시 집중력을 잃은 듯 갈수록 둔탁해졌다. 활발함을 부여하려는 다이내믹의 시도는 계속됐지만 소리가 깔끔하게 모이지는 않았다.
모차르트 교향곡 29번은 1악장의 간드러지는 주제 선율이 후반부까지 이어지는데, 주제 부분에서 바이올린 리듬이 다소 무겁게 느껴졌다. 4악장에 이르러서야 바이올린은 초롱초롱하고 경쾌한 음악을 보여줬다. 다만 계속해서 박자와 음정이 무너졌던 호른은 안타까움을 유발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선보인 조재혁은 시적인 선율을 따라 마음이 잔잔해지는 느낌으로 2악장을 고요하게 연주해나갔다. 3악장에 들어서자 손이 풀린 듯 빠르고 간결하게 리듬을 처리하며 재치를 느끼게 했다. 전체적으로 피아노는 차분한 반면, 오케스트라는 박력 넘치는 음향으로 협주곡에서의 균형미가 부족해 아쉬움을 남겼다.
디토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단원 개개인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전반적으로 시원했지만 오케스트라의 핵심인 하나의 울림을 찾지는 못했다. 단원들의 명랑함에 비해 곡을 여유롭게 풀어나가는 원숙함이 부족했다. 이날 젊은 청중들로 가득할 것 같았던 객석에는 생각보다 많은 중·장년층 관객들이 자리해 있었다. 이는 디토의 팬 층이 그만큼 확장됐고, 그들만의 견고한 입지가 다져졌다는 의미 아닐까. 매해 다양한 계층의 관객들이 찾는 ‘디토 페스티벌’이기에 더 많은 연습을 거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한계를 깨길 바란다. 디토가 모든 공연에 충분히 공을 들였을 때, 그 이름이 더 싱그럽게 빛날 것이다.
사춘기 어른을 위한
소년들의 함성
국립극단 청소년극 ‘비행소년 KW4839’
6월 13~21일 백성희장민호극장
여신동의 두 번째 연출 작 ‘비행소년 KW4839’는 지난해 국립극단 청소년예술가탐색전 워크숍을 새롭게 재구성해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지난해 ‘사보이 사우나’에서 인상과 이미지의 파편들로 작품을 만들어낸 여신동은 이번 작품에서 청소년들의 개인적이고도 집단적인 이야기 조각들을 극의 재료로 사용했다.
여신동이 처음에 청소년극 연출을 맡는다고 했을 때, 더욱이 작품 제목에 ‘비행’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비행(飛行)과 비행(非行)을 떠올리며 다소 식상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본 작품에서 여신동의 ‘비행’은 사전적 의미 이상으로 다층적이었고, 세대의 경계를 허물며 청소년 그 너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여신동의 경계 허물기는 극장 초입에서부터 시작됐다. 극장에 들어서서 객석에 앉기까지 관객들은 비행기 탑승과 비슷한 안내 절차를 밟는다. 비행기와 교실 내부를 오버랩시킨 무대 위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학생이자 승무원이 되어 교실에서 지켜야 할 수칙을 읊어댄다. 여기에 비행기가 이륙하기까지 벌어지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교실과 비행기, 청소년과 여행자 사이의 공통점을 위트 있게 풀어낸 몇몇 설정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온다.
청소년극을 볼 때마다 신경 쓰이는, 솔직히 다소 염려되는 부분 중 하나가 등장인물로 분하는 성인 배우의 연기력이다. 즉 청소년을 ‘연기’하는 정도에 따라 극의 몰입도가 결정되기 마련인데, 이번 무대에 선 배우들은 ‘연기’ 대신 연출가의 주문에 의한 ‘날것’ 그대로를 서슴없이 내놓은 모습이었다. 연출가와 배우들의 적극적인 협업에서 자신만의 캐릭터를 끌어올리고 대사를 써내려갔다는 이들은 그 자신이 청소년이었고, 지금도 청소년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을 안고 사는 어른으로 경계 없이 무대에 서 있었다.
배우와 함께 무대에 등장한 ‘목소리’들은 이번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청소년에 대한 어른들의 생각, 청소년에 대한 청소년들의 단상들은 모두 개별적이고 단편적이다. 하지만 이 조각들은 하나의 모자이크화가 되어 우리 시대 청소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극의 마지막 10분. 자신의 자리에 선 아이들은 ‘한계’에 대해 힘주어 외친다.
“나는 한계를 느낍니다!” 나지막한 고함으로 시작된 외침은 점점 함성으로, 눈물과 떨림으로 관객에게 다가왔다. 그 목소리는 청소년뿐 아니라 배우 자신, 이들을 지켜보는 관객 모두가 오늘을 살아가며 오롯이 감내하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청소년이었던, 지금도 사춘기 너머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우리 사회의 어른들을 위로하는 외침이었다.
마음을 어루만진 춤
키부츠 현대무용단 ‘If At All’
5월 30~31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올해 모다페(국제현대무용제) 개·폐막작은 이스라엘이 장식했다. 오하드 나하린·호페시 섹터를 비롯해 그동안 한국을 찾았던 여러 이스라엘 안무가들의 작품은 항상 관객에게 역동적인 무대를 보여줬기에 이번에도 그들 특유의 에너지를 전해줄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번 무대는 달랐다. 흑건과 백건이 교차되어 건반을 이루는 피아노처럼 어둡고 강렬한 전반부와 밝고 부드러운 후반부가 빚어낸 연출은 ‘If At All’을 비로소 완전한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막이 오르자 조명 아래 홀로 선 무용수가 움직임을 시작했다. 여성 무용수에게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강렬한 힘과 유연함, 부드러운 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있었다. 무대 배경에 떠 있는 동그란 달 하나와 그 아래에서 춤추는 무용수의 움직임, 격정적이면서도 풍성한 음악이 보는 이의 감성을 어루만졌다. 이어서 무대를 달리며 등장한 남자 무용수들의 원무는 일종의 제의를 연상시켰다. 튼실한 근육이 자리한 상체의 강인함과 대비되는 부드러운 춤이 돋보이는 움직임이었다. ‘내유외강’, 그들의 춤은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작품은 독창적이거나 색다른 안무는 아니었지만 무용수 개개인의 개성을 살린 동작들이 모여 특색 있는 작품을 완성했다. 특히 안무가가 설계한 동작들이 흩어지면서도 다시 론도 형식으로 완성되는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어졌다. 일방적으로 무용수들에게 지시한 안무가 아니라 원활한 상호작용으로 완성된 그들 모두의 작품이었다.
움직임으로 승부하는 듯한 이 작품을 새롭게 보게 된 것은 작품 중반부 군무부터였다. 첼로의 선율이 점차 격정적으로 변하면서 무용수들은 현의 움직임을 따라하듯 팔을 좌우로 뻗는 동작을 반복했다. 음악은 절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혼란스러운 시위 상황 같은 사운드들이 서로 겹쳐 들렸다. 이 장면은 이스라엘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오버랩 되면서 또 다른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고, 쓰러진 무용수들이 다시 일어나서 힘차게 행진하는 발걸음에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재건의 의지가 엿보였다.
안무가 라미 베이어는 공연 후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 장면에 대해서 온전히 관객의 해석에 맡기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무대는 비단 이스라엘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리게 하며 진한 공감을 일으켰다.
무대 위에 펼쳐진
인생 여정
아크람 칸 ‘데쉬’
6월 14~15일 LG아트센터
당신의 삶을 한 편의 작품으로 담아낸다면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아크람 칸은 홀로 무대를 채우는 방법을 택했다. 이전에 실비 기옘·쥘리에트 비노슈와 함께 한 듀엣을 선보였던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오직 자신만의 춤을 관객에게 내보였다.
작품은 움이 돋은 아버지의 무덤을 망치로 내려치면서 시작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깨움과 동시에 본바탕인 아버지를 불러내는 행위다. 혼잡한 도시를 지나 제트기의 엔진과 마주한 그는 ‘작은 사람’을 꺼낸다. 이 ‘작은 사람’은 그의 머리에 그려진 자신의 아버지다. 작품은 쉴 새 없이 빠르게 다음 장면으로 전환되는데, 이윽고 그의 조카 에시타가 등장해 아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동시에 고국으로 이끌어 간다.
비주얼 디자이너 팀 입과 조명 디자이너 마이클 헐이 그려낸 애니메이션은 관객을 환상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파도치는 바다와 무성한 나무, 입 벌린 악어, 거대한 코끼리, 꿀벌과 벌집은 방글라데시의 자연을 보여준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도 찰나, 곧 등장한 거대한 소음의 전차로 인해 아름다운 순간들은 깨져버리고 만다.
무대 위에 자리한 두 개의 의자는 이들 부자의 모습을 닮았다. 거대한 의자에 올라 그에 비해 너무도 작은 의자를 가만히 바라보는 모습은 아버지와 함께일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함축해 보여주고 있다. 몬순기후의 장대비이자 그의 아버지가 이야기했던 하늘에 닿을 듯한 거대한 풀을 상징하는 실크 띠가 내려오면서 작품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데, 이 장면은 자신의 가족사뿐 아니라 종교 분쟁과 기후 온난화로 인한 고국의 복합적인 상황에서의 비극과 희극을 드러내고 있다.
아크람 칸의 이야기는 무대미술·조명·음악·애니메이션·드라마투르기까지 각 분야의 훌륭한 아티스트들과 함께 이토록 아름답고 웅장한 무대로 완성됐다. 그럼에도 작품의 주인공은 그의 춤이었다. 컨템퍼러리 댄스로 시작해 점차 카탁과 신체극이 혼합된 춤으로 변화해가며 지금까지의 춤의 여정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특히 카탁 특유의 발 리듬은 그만이 선보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곧 마흔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80분 동안 펼쳐진 그의 움직임은 민첩하고 역동적이었으며 동시에 안정적이었다. 또 거대한 나무 꼭대기에 올라 빙글빙글 돌고, 무수한 실크 띠 사이를 헤치며 달리는 모습에서는 무대의 개념을 시공간적으로 확장한 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쉬’를 통해 아크람 칸이 들려준 내밀한 이야기에 관객들은 진하게 공감하며 웃고, 감탄하며, 함께 눈물지었다. 예술가의 인생에 있어 한 편의 ‘역작’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