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인터미션 때 로비에서 만난 동료 피아니스트들은 아시케나지 듀오에 대해 삐딱한 감상을 나누고 있었다. “아들을 보니 참 짠하지. 아버지의 거대한 산을 극복해야 하다니.” 누군가는 발칙한 속내마저 드러냈다. “차라리 아버지 소리만 걸러내 들었으면 좋겠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아시케나지가 그의 아들 보브카 아시케나지와 함께 3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았다. 2007년, 더 이상 공개 무대에서 솔로 리사이틀을 연주하지 않겠다던 블라디미르(父)의 공식 선언은 많은 청중의 아쉬움을 샀다. 이후 그가 피아니스트로서 무대에 오른 경우는 오직 아들과 함께 한 듀오 연주 때뿐이다. 하지만 거장을 아버지로 둔 아들들은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동시에 끊임없이 비교 당하고는 한다. 알프레트 브렌델의 아들인 아드리안, 프리드리히 굴다의 아들인 파울, 다니엘 바렌보임의 아들인 미카엘이 그러하다. 보브카 아시케나지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날 배포된 프로그램 책자 프로필에 한 면을 빽빽이 채운 아버지의 화려한 경력에 비하면, 맞은편 아들의 프로필은 억지로 분량을 늘인 듯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였다.
1부는 슈베르트 ‘헝가리풍의 디베르티멘토’와 브람스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 연주되었다. 청중의 입장에서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불편했다. 아버지가 가볍고 날렵한 리듬을 쉽게 연주한다면, 아들의 부점과 연타 음형은 둔탁하고 어렵게 들렸다. 울림도 마치 악기 자체가 물리적으로 다른 나이인 듯 들렸는데, 아들의 울림이 딱딱하게 마모된 늙은 해머가 때리는 듯했다면, 아버지는 풍성한 양모로 둘러싸인 젊은 해머로 연주하듯 울림이 달랐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마냥 압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들을 넘어서지 않으려는 노련함이 적재적소에서 느껴졌다. 프리모(primo)와 세콘도(secondo)의 역할 분담에서도 아들을 지지하는 아버지의 애정이 느껴졌다. 1부의 슈베르트와 브람스는 두 파트를 거의 널뛰듯 교체했지만, 2부에선 프리모의 주연 파트를 거의 대부분 아들에게 맡겨 음악의 전면에 내세우고, 아버지는 세콘도의 조연을 맡으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복잡한 리듬 패시지에서 고갯짓으로 타이밍을 조절하며 엇박의 강세를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지휘자와 같았다면, 아들은 든든한 신뢰와 지지를 등에 업은 협연자와 같았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곡은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이었다. 합을 맞추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은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는 이 곡에서 두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안정적인 앙상블을 들려주었다. 작곡가는 리듬의 혁명을 의도하며 기본박을 철저히 흐트러뜨렸지만, 두 연주자는 트릴의 횟수까지 정밀히 계산했을 정도로 요소마다 구체적이고도 구축적인 해석을 들려주었다. 페달의 울림을 최대한 절제해 터치의 질감과 입체적 텍스처를 속속들이 드러냈는데, 원시적 울림의 양적 확장을 의도한 원곡을 상기하자면 꽤 독창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었다. 허를 찔린 듯한 해석에 감탄하자 옆에 앉아있던 피아니스트 박종화가 “가족만이 들려줄 수 있는 앙상블”이라 촌평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잠식되었던 선입견을 꼬집는 따가운 일침이었다.
사진 PM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