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이 켜지고, 음악의 심연 속에 빠져드는 연주자들. 가슴을 파고드는 그들의
울림이 객석에 전달되기까지, 매년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변함없는 모습으로 이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는 한 남자를 만났다
올해로 8년째, 매년 여름이면 대관령을 찾는 남자가 있다.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톰’ 또는 ‘톰 아저씨’라 불리는 그는 현재 카네기홀 프로덕션 매니저로 활동 중인 토머스 얼먼이다.
음악제 시작 몇 주 전, 예술감독 정명화·정경화는 그에 관해 이야기하며 “대관령을 책임지는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실제로 만난 그는 푸근한 얼굴에 마음씨도 좋을 것 같은, 오랜 친구 같은 모습이었다. 두 시간 남짓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느낀 것도 첫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관령국제음악제 모든 스태프가 한결같이 좋아하고 따른다는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해외 유수 페스티벌에 스태프로 참여해왔던 그에게 미국 애스펀 음악제에서의 기억은 특별하다. 무엇보다 18년간 애스펀 음악제에서 쌓아온 시간은 그를 카네기홀 프로덕션 매니저로 이끌었고, 대관령국제음악제 초대 예술감독인 강효와의 인연을 맺게 했다. 이후, 2006년부터 지금까지 토머스 얼먼은 대관령의 크고 작은 변화들 속에서 매년 같은 자리를 지키며 음악가와 관객 뒤에서 무대와 페스티벌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9월에는 뉴욕 월스트리트 재즈 페스티벌에 참여할 예정이라는 토머스 얼먼과 올해의 페스티벌 폐막 공연을 앞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자신이 하는 일들에 관해 소개해달라.
프로덕션 매니저다. 카네기홀에서는 공연이 비교적 단순하기 때문에 공연 전까지는 프로덕션 매니저로, 공연 중에는 스테이지 매니저로 일한다. 하지만 대개의 페스티벌의 경우 얼마나 공연이 많고 복잡한지에 따라 역할의 범위가 달라진다. 대관령국제음악제는 공연이 많고 업무가 워낙 복잡해 전문적인 무대감독과 조감독뿐 아니라 조명 디자인, 사운드팀이 상주하고 있다. 콘서트 프로덕션(CP)에 속한 인턴들도 있는데, 이들은 무대 세팅뿐 아니라 무대 전환 크루로도 일한다. 페스티벌에 무엇이 필요할지 예측하고 준비하는 것, 각 스태프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체크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무엇보다 정명화·정경화 예술감독이 안목과 비전을 갖고 여는 페스티벌에서 나를 비롯한 제작팀의 몫은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것에 있다.
카네기홀과 달리 페스티벌이기에 요구되는 특별한 영역이 있다면.
주어진 상황에서 일하는 것 자체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이를테면 장비와 악기 등 필요한 것을 무대 위로 들여오는 일들 말이다. 필요한 것들을 조정하고 리허설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공연이 다 끝나면 다시 짐을 꾸려서 내보내는 것까지 모두 동일하다. 다만 카네기홀과 달리 페스티벌에서는 사무실도 없고, 커뮤니케이션 체계도 만들어야 하고, 시스템이나 설비에 이상이 없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밥 먹을 곳, 잠잘 곳 하나하나까지… 하나의 도시를 건설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지난 3주 동안 대관령에 하루 종일 붙어 있었다. 그전에 몸담았던 애스펀은 9주나 머물러야 했다! 매번 페스티벌 전체 기간을 ‘하루’라고 생각하며 임한다. 물론 조금 긴 하루다. 그래서 매년 새로운 크루들과 처음 만날 때 건네는 나만의 인사가 있다. “안녕, 오늘 하루의 제일 좋은 친구들!”
올해로 8년째 대관령국제음악제에 참여하고 있다. 지속적으로 이곳을 찾게 되는 이유는.
일단 음악이 좋다. 장소도 굉장히 아름답다. 1년 중 9월부터 6월까지가 카네기홀에서 일하는 시즌인데, 뉴욕 한복판에 있는 극장인지라 정말이지 매일을 번잡함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다 이곳에 오면 마음이 참 편해진다. 함께 일하는 프로덕션 제작팀의 실력도 좋아서 페스티벌임에도 불구하고 콘서트홀에서 진행하는 것과 동등한 수준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수준은 관객들이 느끼는 것뿐 아니라 예술가를 배려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페스티벌을 진행하다 보면 늘 변수가 많을 것 같다.
모든 무대 위에는 항상 변수가 따르기 마련인데 결국 어떻게든 공연은 올라간다. 다행히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큰 사고가 났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다만 소소한 에피소드들은 종종 생긴다. 예를 들어 피아니스트 세 명이 공연을 하면 리허설 때 피아노 의자의 종류와 높이, 위치를 각 연주자에 맞춰 정해놓는다. 그런데 실제 공연에서 우리가 아차! 하는 일들이 생기곤 한다. 연주자가 의자 위치나 높이를 조절할 때다. 관객석에서는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행동일 수 있겠지만, 스태프 입장에선 리허설 때 정했던 것과 다른 의자를 가져다 놓은 것이기 때문에 연주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생길 수는 있지만 관객이 모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끼리만 아는 실수는 그나마 괜찮은 편에 속하는 거고, 관객들까지 아는 실수는 정말 큰 실수인 거니까.
그동안 대관령국제음악제를 지켜보면서 직접 체감한 변화들이 있다면.
용평리조트에서 알펜시아리조트로 옮긴 지 올해가 5년째다. 뮤직텐트가 지어진 지는 3년이 됐고. 그전에는 열악한 환경에서 공연을 하다가 알펜시아리조트 콘서트홀에서 공연이 이뤄지고, 마이어 사운드팀이 함께 참여하면서 소리도 훨씬 좋아졌다. 그 사이에 음악학교 학생들도 많이 늘어났고. 한마디로 말하자만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시설이나 규모에서 좋아지고, 또 커지고 있다. 연주 면에서는 늘 최상이었고 지금도 동일하다. 공연 진행이나 연주 모두 어느 미국 콘서트홀에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라 생각한다.
평소 일하면서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
공연이 끝날 때다. 나는 예술과 관객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공연이 끝나고 하우스 라이트가 켜지고 사람들이 떠날 때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시간이고, ‘오늘 하루 내가 잘했구나’라고 느끼는 순간이다. 연주자가 열정적인 만큼 우리도 백스테이지에서 열정을 갖고 있어야 이 일들을 해낼 수 있다. 항상 연주하고 싶어 하고 무대에 오르기 원하는 음악가들을 보면 나도 더 많이 도와주고 싶다. 내가 대관령국제음악제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젊은 연주자들이 음악에 대해 신나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다. 뭐든지 처음 할 때의 피어오르는 열정을 도와주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자신의 직업에서 필요한 자질과 능력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같은 분야의 일을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해준다면. 각기 다른 경험과 배경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함께 무대를 만들어간다. 그 가운데는 기술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고 소리나 조명, 세트 디자인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프로덕션 매니저가 되기 위해서는 조명·무대·세트 디자인·음향 파트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 나는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됐다. 음악을 정말 좋아하는데 무대에 설 정도의 실력은 갖고 있지 않은 케이스였다(웃음). 각자에게 맞는 자리가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로 프로덕션 매니저는 단번에 잘못된 것을 찾아내기도 하고, 다소 독특한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하고 중재하는 일도 해야 한다. 퍼즐을 맞추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고 할까. 연주자 못지않게 뜨거운 열정을 갖추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