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배익환 1956~2014

그의 겸손과 용기 사랑을 기억하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9월 1일 12:00 오전

지난 7월 24일, 바이올리니스트 배익환이 향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 가슴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배익환을 그리며,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과 첼리스트 조영창이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을 추억하며 애도의 편지를 ‘객석’ 편집부로 보내왔다

매 순간 감사하는 삶을 살았던 배익환

바이올리니스트 배익환의 때 이른 타계는 우리 모두의 큰 슬픔이자 음악계로서도 귀한 연주자를 잃은 큰 손실이다.

무엇보다 그의 인생이 무르익어가면서

음악계에 더 큰 향을 끼칠 수 있는 시점에서 들려온 소식이기에 더욱 가슴이 아프다.

이제 더 이상 그가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그와 나는 오랜 시간을, 정확하게는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서로 알고 지내왔고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그와 나는 한국에서 김용윤 선생,

미국에서는 이반 갈라미언 아래에서 음악을 배웠다. 배익환은 가족이나 그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은 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뉴욕에서 공부할 때조차

학업과 일을 병행하곤 했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주변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배익환은 삶과 음악 모두에서 본받을 만한 좋은 롤모델이라고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뉴욕에서 그가 피아니스트 이대욱과 함께 룸메이트로 지내던 때가 생각난다.

당시 대개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와 달리

그는 수많은 관현악 앨범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음반을 들으며 오케스트라 레퍼토리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런 열정은 나중에 그가 바이올리니스트를

넘어 다방면에 다재다능한 음악가로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배익환은 항상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매 순간 감사하는 삶을 살았다.

시간이 날 때면 늘 우리에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주던 훌륭한 요리사인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그의 사랑과 인생에 대한 열정은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영원할 것이다.

배익환의 인생과 그의 가치관이 지금 젊은 세대의 음악가들에게 영감과 등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 사진 임영균
 

유학 시절 그리고 화음체임버에서 함께 울고 웃던 시간들

 바이올리니스트 배익환!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음악을 애호하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친근감을 주는 이름… 정확히 41년 전, 우리가 미국에서 함께

유학 시절을 보낼 때 그와 뉴욕 룸메이트이던 강효 선생님과 나는 서로 아는 사이였다.

당시 나는 필라델피아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주말이면 종종 두 사람이 지내는

뉴욕의 아파트를 찾아가 늘 고마운 마음으로 머물곤 했다.

내가 기억하는 배익환은 음악 앞에 늘 진지하던 모습, 젊은 나이에 아르바이트를 위해 이리저리 열심히 뛰어다니던 모습, 그러면서도 친구들에게 늘 따뜻하게 베풀던 모습,

바이올린을 공부하지만 음악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총보를 들고 다니며 공부하던 모습,

그 총보를 들고 교향곡을 들으며 지휘하던 모습, 요리와 사진 찍는 취미 덕에

연주 여행을 가면 바이올린은 물론이거니와 큰 카메라를 늘 챙겨 사람들의 소박한 모습과 아름답고 신비한 자연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며 아이같이 기뻐하던 모습,

친구들을 초대해 정성껏 만든 정말 맛있는 음식을 자신이 평소 즐기던 와인과 함께 내놓는 모습이 떠오른다. 곁에서 친구가 힘들어할 때면 자신이 더 아파하고,

행복한 일에는 아낌없이 함께 기뻐해주던, 10년 넘게 화음체임버오케스트라를 함께하며 같이 웃고 고민하고 계획을 짜면서 꿈꿨던 시간들을 되새기며 다시 한 번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인간 배익환을 생각해본다.

그는 미국에서 주로 활동을 하며 지냈고, 나는 독일에 있었기에 늘 함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물론 음악을 통해 서로 알게 됐지만 음악 외에도 많은 것을 함께 공유하고 나눌 수 있었던 시간들에 감사한다. “인생은 길고도 짧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럼에도 음악은 영원하다. 그렇기에 그가 추구하던 음악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고 또 그것을 통해 배익환 역시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자리할 것이다.

익환이 형!

좋은 그곳에서도 분명히 아름다운, 우리의 영혼이 실려 있는 음악이 계속되리라 믿어.

형이 여기서 못다 한 일, 하고 싶었던 일들을 그곳에서 모두 이루며 행복하길 바라!

여기 남아 있는 우리도 열심히 살게! You are with us, always!

첼리스트 조영창

 

다시 듣는 배익환의 목소리

바이올리니스트 배익환은 자신이 솔리스트로서 설 수 있었던 것은 실내악 활동과 강의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 덕분이라고 말하곤 했다. 때때로 그는 잘 닦인 한길로만 걸으려 하고 그 양쪽의 험한 길은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하는 소심한 제자들에게 못내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진창에도 빠져보고 자갈길도 걸어봐야 그 경계선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과 용기는 스스로의 연주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왔다.

오래전 배익환은 ‘객석’이 여러 차례 마련한 학생들과의 대화를 통해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애정 어린 조언을 전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생생하다.

선율악기, 특히 바이올린을 하는 한국 학생들은 멜로디 라인이나 선율만을 중요시하고 베이스나 화성 전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학생이 많습니다. 이런 단점을 치유하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

음악 세계에서 바이올린이 차지하는 비율은 사실 아주 작은 부분입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자기 악기밖에 모르고 살죠. 그걸 극복하려면 우선 음악적 지식이 많아야 합니다. 바이올린 협주곡만 듣지 말고 바흐 칸타타를 비롯해 오페라 등 다른 장르의 음악을 다 파악할 줄 알아야 하죠. 좀 더 구체적으로는 현악 4중주를 연주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첼로를 주의 깊게 살펴보세요. 4중주에서 음악의 전체적인 틀을 주도하는 악기가 바로 첼로거든요. 첼로가 음을 어떻게 만들어주느냐에 따라 그 위의 악기들이 달라집니다. 물론 리드는 제1바이올린이 하지만, 전체적인 컬러나 화성적으로 방향을 만들어주는 것은 첼로입니다. 화상적인 터득을 위해서는 현악 4중주를 하면서 첼로 파트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 좋습니다.

신체 구조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낀 적은 없으세요? 학생들 가운데는 ‘손가락이 좀 더 길었으면’ 하면서 푸념을 늘어놓는 학생도 많습니다.

사람마다 신체 조건이 다 다르긴 하죠. 하지만 나쁜 조건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유리한 점이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죠. 가령 손가락 길이가 짧다고 해봅시다. 음을 짚을 때 5도를 쉽게 못 짚으니 굉장히 힘들겠죠. 하지만 높은 음에 가서는 손가락들이 따로 비켜줄 필요가 없으니 음정 잡기가 굉장히 쉬워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점만 보지 그 때문에 유리한 면은 잘 알아차리질 못합니다. 그래도 불편한 점이 있으면 저처럼 자세를 바꾼다든지 하며 개선할 수 있겠죠.

기본자세를 바꾸면 선생님들이 많이 싫어할 텐데요.

물론 해야 될 게 있고 안 해야 될 게 있겠죠. 하지만 저는 해도 된다고 정해진 범위 안에서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 교육 스타일이 ‘하면 안 돼!’ 식이죠. 하지만 마냥 그런 식이라면 과연 발전이란 것이 가능할까요? 음악이란 것이 자기 세계를 만들어내는 작업인데, ‘하지 마’ ‘해’가 만연하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음악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한국은 교육이 너무 경직돼 있습니다. 이런 경직성은 특히 예술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죠. 가령 좀 괴팍한 학생이 있다면 거기서 좋은 점만 골라서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면 될 텐데 조금만 자신의 방법론에서 벗어난다 싶으면 무조건 없애려고만 하거든요.

해외 콩쿠르 출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저는 콩쿠르를 무척 싫어합니다. 학교 때처럼 등수를 매기는 데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또 대개 콩쿠르를 나가는 시기가 19세에서 24세로, 보통 전성기라고 하죠. 하지만 저는 19세에 이미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경제적으로 음악적으로 안정이 되니까 안이해지더군요. 집 있겠다, 직업 있겠다, 월급 나오겠다. 그런데 구태여 콩쿠르에 나갈 필요가 있겠느냐… 했습니다. 그런데 표현하고 싶은 게 있는데 잘 살리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경각심도 불러일으킬 겸 콩쿠르를 목적으로 연습을 시작했죠. 더 미루다간 나이 제한에 걸려서 나갈 수가 없었거든요. 그렇게 콩쿠르에 처음 출전했을 때 내 나이가 27세였습니다. 굉장히 늦은 나이였죠. 내 목표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였지만, 콩쿠르 경험이 한 번도 없어 걱정되더라고요. 그래서 연습 삼아 뮌헨 ARD 콩쿠르에 먼저 출전했죠.

물론 콩쿠르에 나가면 이점도 많아요. 경력은 물론이고, 콘서트 기회도 자주 주어지죠. 무엇보다 콩쿠르에서 느끼는 긴장은 평소 연주회를 할 때보다 훨씬 심합니다. 따라서 그 긴장을 이기면 자신감과 안정감이 생기죠. 이런 점도 심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소득입니다. 단단한 연장을 만들려면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에 번갈아 담가가며 쉴 새 없이 두들겨야 하죠? 저는 콩쿠르에 나가면 꼭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강해지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 누가 날 때리는 것 같았죠.

우리나라는 해외에 비해 실내악적 토양이 굉장히 척박한 편입니다.

우리 한국의 민족성 때문일 겁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데 타협을 굉장히 수치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자기가 약해서 타협을 한다고 생각하지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현악 4중주의 목적은 잘난 4명이 모여 뜻을 모아 더 좋은 음악을 만들자는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현악 4중주를 일컬어 ‘결혼의 나쁜 점은 다 가지고 좋은 점은 하나도 없는 것’이라는 재미있는 조크가 있습니다만 틀린 말이 아닙니다. 현악 4중주를 비롯해 실내악을 하려면 서로를 비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즉, ‘너 음악이 왜 그 모양이야’ 투의 말을 감당해야 진정한 음악이 나올 수 있어요.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대단히 자존심이 강하죠.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의 발전을 이루어온 것이긴 하지만 덕분에 실내악은 크지 못했습니다.

화음체임버오케스트라 활동을 매우 적극적으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실내악을 위한 풍토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제일제당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준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조영창 씨와 제가 실내악 앙상블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된 것이죠. 문화가 발전하려면 솔리스트도 중요하지만 기초가 되는 체임버나 오케스트라의 발전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솔리스트가 혼자서 연주를 아무리 많이 해도 전체적인 문화 수준은 올라가지 않아요. 우리나라 중·고등학교를 보면 실내악에 대한 가르침이 미비한 것 같습니다. 개인 기량에만 너무 주력하는 편이지요. 제가 볼 때는 손가락이 좀 더 잘 돌아가는 것보다는 옆에서 함께 연주하는 첼로 소리를 파악할 줄 아는 귀를 키우는 것이 훗날을 위해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연주할 때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과장되게 표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청중이 연주자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어요. 그 ‘조금 더’의 가장 적절한 정도를 알려면 직접 선을 넘어보는 수밖에 없어요. 그걸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객석’ 1999년 2월호, 2001년 3월호에서 발췌

 사진 월간객석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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