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BBC 프롬스

멈추지 않는 음악! 잠들 수 없는 영국의 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9월 1일 12:00 오전


▲ 7월 20일 열린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월드오케스트라 포피스의 공연

120년 역사를 자랑하는 클래식 음악 페스티벌 BBC 프롬스가 7월 18일부터 9월 13일까지 8주간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메인 공연장인 로열 앨버트홀에서 주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76회, 카도건홀에서 10여 회의 실내악 공연이 열린다

7월 20일에 열린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다국적 악단인 월드 오케스트라 포 피스(이하 WOP)의 공연은 세 차례(2000·2005·2010년) BBC 프롬스 공연 때의 매진 사례와 달리 빈자리가 사분의 일 가깝게 보였다. 수석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런던 심포니(LSO)와 자주 만난 탓에 관심이 분산됐고,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러시아 푸틴 대통령에 동조하는 ‘마린스키의 차르’에 대한 반감도 흥행 저조에 한몫했다. 지난 5월 트래펄가 광장에서 열린 LSO 야외 행사에선 수십 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게르기예프가 입장하자마자 ‘부끄러운 줄 알라’고 기습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95년 UN 50주년을 기념해 출범한 WOP는 1997년 게오르그 숄티 서거 이후, 게르기예프가 이어받아 1998년부터 부정기적으로 열린 18회 콘서트를 모두 인솔하고 있다. 취리히 톤할레의 율리아 베커,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의 베르트랑 세르브라 같은 악장을 포함해 서울시향의 문주영 등 각국의 실력파들이 이번 WOP에 참가했다.

첫 곡은 영국의 여성 작곡가 록산나 패누프닉의 2008년 작 ‘평화로 가는 세 가지 길’이었다. 1968년생인 패누프닉은 2004년에 썼던 바이올린 협주곡 ‘아브라함’을 축약하여 신작을 완성했다. ‘세 가지 길’은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에서 절대자를 바라보는 세 가지 방법이라고 작곡가는 밝혔다. 아브라함의 심상이 흘러가는 순서를 일대일 대응으로 그리는 서사 방식이 10분 넘게 펼쳐졌는데, 요즘 작품으로 보기엔 진부하고 전개 과정도 평면적이었다. 이어진 곡은 2011년 마린스키 오페라 일본 투어로 큰 화제를 남겼던 R. 슈트라우스 오페라 ‘그림자 없는 여인’ 가운데 교향적 환상곡이었다. 게르기예프의 다이내믹과 섬세함을 같이 볼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였다. 다층적인 구조를 갖는 판타지 성향의 오페라 작품에서 지휘자가 어디서 어떻게 음악적 정수를 뽑아내는지 표본을 보여줬다.

후반부는 말러 교향곡 6번이었다. 게르기예프는 2007년 LSO의 말러 사이클 때처럼 6번에서 2악장 안단테-3악장 스케르초 순서의 1906년판을 사용했다. 그동안 마에스트로와 LSO의 말러는 단기 결전의 절박한 심정으로 느껴졌던 반면, WOP를 대할 때는 맹독을 잃은 독사처럼 매끈하지만 기운 빠진 모습이 역력했다. 일진광풍의 기세로 단원들을 몰아세우던, 확신이 넘치던 게르기예프의 말러는 어디로 간 것인가? 하루 전, 중국 지휘자 위롱과 차이나 필의 프롬스 데뷔에 ★★★을 주던 ‘텔레그래프’지는 ★★로 갈기 빠진 지휘자를 힐난했다.

 


▲ 7월 21일은 데이비드 진먼이 음악감독으로 19년을 함께한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마지막 공연이었다


▲ 8월 8일 BBC 필하모닉의 지휘봉은 악단의 전 음악감독이자 현 명예 지휘자 잔안드레아 노세다가 잡았다

영국에 내려앉은 스위스의 향취

7월 21일, 지난 4월 내한한 데이비드 진먼과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이하 TOZ)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19년간 고락을 같이한 TOZ의 음악감독으로서 지휘하는 마지막 행사였다. 6,000여 명의 관객이 이들의 마지막을 축하하는 증인이 됐다. 첫 곡 R. 슈트라우스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은 지난 내한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올해 아시아 투어 오프닝 곡으로 자주 연주됐다. 소리를 여울지게 해서 급류로 만들어버리는 진먼 특유의 빠른 템포가 넓디넓은 콘서트홀에 청명하게 퍼졌다. 소리에 성격을 부여하고 악기군의 윤곽을 명확하게 만들기 때문에 진먼은 스토리텔링 작품에 능하고 특히 R. 슈트라우스의 관현악곡에서 필치가 선명하다. 세세한 부분마다 대비가 강렬했고 그때마다 작품은 새로운 빛을 발산했다. 베토벤·브람스를 해석할 때와 비교하면 큰 편성이었지만 저음의 울림이 마른 느낌을 주지 않고, 스트링의 탄력은 그대로여서 텁텁하지 않은 후기 낭만시대를 선사했다.

TOZ의 협연 파트너는 율리아 피셔였고, 협주곡은 피셔가 2012년 데카에서 진먼·TOZ와 녹음했던 드보르자크였다.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울림이 한 몸을 이뤘다. 타이트한 리듬감과 따뜻한 톤을 머금은 피셔의 텍스처는 익숙하지 않은 멜로디도 금방 친숙하게 해서, 자칫 산만하기 쉬운 아다지오 악장에서도 관객이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섬세한 프레이징으로 비르투오시티를 웅변하고 높은 기대치에 응답하는 스타 기질이 뚝뚝 묻어났다. 마지막 곡은 진먼과 TOZ의 기념비 같은 베토벤, 그중에서도 교향곡 6번 ‘전원’이었다. 진먼이 집중한 건 깔끔함이었다. 귀에 익은 선율들이 스타카토로 튕겨질 때 생동감은 그동안 어떤 것들이 베토벤을 두툼하게 했고, 진먼은 무엇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는지 청중도 가늠할 수 있었다. 20년 전엔 ‘베토벤이 과연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고음악 주법을 채용한 현대물이 생소했지만, 이제는 세월이 흘러 진먼·TOZ 커플이 21세기 초의 음악상이 어떠했는지를 후세에게 실증할 유산이 됐다. 관객들이 이들의 헤어짐을 아쉬워할 때, 진먼이 “이제는 진짜 스위스 음악을 들을 시간”이라고 했고, 금속 재질의 소 방울을 든 음악가들이 무대에 올랐다. TOZ의 클라리네티스트 플로리안 발저가 편곡한 춤곡에 맞춰 단원들은 떠나는 지휘자와 끝을 모르는 무도를 나눴다. 20년 전, 진먼이 볼티모어 심포니와 헤어질 때 연주하던 ‘댄스 믹스’의 맘보처럼 이들의 이별도 전혀 슬프지 않았다.

 


▲ 마크 엘더 ⓒRussell Hart


▲ 율리아 피셔

가장 영국적인 오케스트라, BBC 필과 할레 오케스트라

8월 8~9일에는 맨체스터 브리지워터홀을 근거로 하는 라이벌 악단, BBC 필하모닉과 할레 오케스트라 공연이 열렸다. 8일 BBC 필의 지휘봉은 악단의 전 음악감독이자 현 명예 지휘자, 잔안드레아 노세다가 잡았다. 밀라노 태생으로 지금은 토리노 왕립극장 음악감독으로 재직 중인 노세다는 2002년부터 10년간 BBC 필 수석 지휘자를 맡으면서 악단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게르기예프 후원으로 마린스키 수석 객원지휘자로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유럽에서 흔히 보는 객원지휘자였던 그는 악단 부임과 동시에 샨도스에서 리스트를 중심으로 화제반을 양산했고, 2002년부터 매년 프롬스에 오르며 국제적 인지도를 탄탄하게 쌓았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노년 관객들은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과 프랑크 ‘관현악적 변주곡’에서 영국의 신성, 벤저민 그로스버너의 터치를 유심히 관찰했지만 이날의 백미는 생상스 교향곡 3번 ‘오르간’이었다. 노세다는 낭만주의 곡에서 종종 급진적인 면을 보이며 관객이 작품을 재평가하게끔 하는데, ‘오르간’에서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좌중의 시선을 모았다. 일주일 전, 현 음악감독인 후안호 메나와는 안전 주행의 말러 교향곡 5번을 선보인 BBC 필은 2000년대 자신들을 빛내준 주인공과 격렬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노세다가 강조하는 낭만의 출발은 더블베이스다. 오케스트라의 좋은 소리는 비올라와 더블베이스에서 나온다고 믿는 노세다는 ‘오르간’에서 역시 베이스 라인을 최전면에 부각시켰다. 그러나 에너지를 한순간에 다 쏟지 말고 끝까지 균등하게 끌고 가야 한다는 평소의 지론과 달리 초반에 스태미나를 다 퍼붓는 바람에 후반부에 가서는 지휘의 활력이 악단으로 전해지지 않았고, 곡의 새로운 실체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9일은 마크 엘더 지휘, 할레 오케스트라의 차례였다. 영국인이 자랑하는 엘가리안, 엘더는 연가곡 ‘바다의 그림’을 리릭 메조소프라노 앨리스 쿠트와 함께했다. ‘수수께끼 변주곡’의 초연이 성공하고 작곡가가 그해 여름 아내와 휴양지에 머물며 쓴 작품이다. 이 곡은 성악곡에 관현악 반주가 붙는 것과 영국에서는 얼마 안 되는 메조소프라노 레퍼토리라는 점이 특징이다. 영국 해상의 돌변하는 풍광을 다양한 표정으로 표현한 다섯 개의 작품이 경건한 메조소프라노의 리드에 따라 색다른 공감각적 미감을 안겨줬다. 바다 밑바닥부터 수면 위로 천천히 포말이 올라오듯, 거칠면서 긴 호흡으로 시각을 청각화하는 쿠트의 순발력과 지구력이 눈부셨다. 반주가 목소리를 덮지 않도록 거친 부분을 연마하는 엘더의 세공 역시 발군이었다.

후반부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은 영국의 스타 지휘자가 누리는 전성기의 한 단면을 살펴보는 자리였다. 기름기를 뺀 현의 움직임과 경량감이 느껴지는 관이 주도하는 요즘의 베토벤과는 달리 엘더의 ‘영웅’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러면서 고리타분한 느낌을 상쇄할 만한 매력이 곳곳에 보였다. 1악장의 전개부를 지나면서 기어를 올리듯 동력을 추가하고, 2악장에서 셈여림의 변화에 따라 밀고 당기는 느낌을 주는 여유로움은 노장의 해석이기에 자연스러웠다. 전체적으로 소리가 풍성하고 각 악기의 특징적인 음색이 깨끗하고 조화롭게 앙상블 속에 녹아들었다. 그래서 엘더와 연주할 때 할레 오케스트라는 비로소 ‘영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오케스트라’란 부연에 힘을 얻는다. ‘바다의 그림’에선 영화음악의 느낌을 풍기다가 ‘영웅’에선 음량이나 기동력에 의존하기보다 성실하고 정중하게 음악을 만드는 변화무쌍한 조합을 통해 14년을 함께한 엘더와 할레의 궁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BBD Pr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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