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먼 래틀/베네수엘라 국립 어린이 오케스트라의 2013잘츠부르크 페스티벌 DVD

영혼을 울린 ‘작은 거인들’의 ‘거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0월 1일 12:00 오전


▲ 사이먼 래틀·데헤수스 파라(지휘)/베네수엘라 국립 어린이 오케스트라/베네수엘라 화이트 핸스 합창단
(Unitel Classica 716908)
(16:9/PCM Stereo, DTS 5.0/146분) ★★★★☆

아무리 말러 열풍 시대라고 하지만, 어지간한 교향악단으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음악계의 깐깐한 귀명창들이 두 눈 부릅뜨고 응시하는,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의 연주가 끝나자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열광적인 박수가 터진다.

음악회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안다. 어떤 박수는 그저 ‘안다 박수’에 지나지 않거나 제도와 서열에 꽁꽁 묶여 있는 후배나 제자들의 억지스러운 시늉이라는 것을. 반면 오선지의 마지막 칸에 ‘박수’라는 표시라도 있다는 듯 가슴속에서 용수철처럼 터져 나오는 박수가 있다. 이 영상, 그러니까 사이먼 래틀이 베네수엘라의 어린이들과 함께한 2013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이 끝나자마자 터진 박수가 그런 영혼의 박수였다. 6분 넘게 이어지는 박수에 박수에 박수!

이 박수는 그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의 자선 음악회에 참여한 신세 좋은 사람들의 한가로운 ‘감성팔이’가 아니다. 음악 그 자체, 즉 말러 교향곡 1번을 높은 수준으로 재현한 거장과 그 오케스트라를 향한 박수다. 사이먼 래틀은 이 남미의 어린이들을 명절 때 만난 조카들 대하듯 따사로이 안아주고 격려했지만 연주 중에는 오래전 야심만만하게 조련했던 버밍엄시립교향악단이나 은하계 극강의 베를린 필 연주자들을 대하듯 매섭게 몰아붙였다.

영국의 음악평론가 톰 서비스는 ‘마에스트로의 리허설’에서 사이먼 래틀에 대해 “왼손을 불끈 쥐고, 지휘봉을 머리 위로 들고, 상징적인 몸짓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음악과 음악가들을 한 방 칠 것 같은 자세”라고 묘사했는데, 이 연주에서도 그러했다. 이는 사이먼 래틀이 베네수엘라의 아이들을 연주자로 존중했다는 뜻이다.

군데군데 앙상블이 무너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베네수엘라의 아이들 역시 ‘자선 음악회’에 억지로 불려 나온 불쌍한 아이들이 아니라 당당히 잘츠부르크의 무대에 선 음악가로서의 존엄함을 보여줬다. 그들은 ‘거인’을 연주한 ‘작은 거인’이었다. 나는, 우선, 이 점부터 강조하고 싶다. 음악 외적인 요소가 아니라 연주 그 자체로 충분히 음미할 만하다.

물론 우리는 이 연주의 역사적인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음악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관계, 곧 엘 시스테마의 극적인 순간 아니던가. 교향곡 ‘거인’ 연주를 마친 후, 사이먼 래틀은 객석으로 가서 엘 시스테마의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음악가이자 경제학자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와 포옹했다.

1975년, 전과 5범을 포함한 11명의 아이를 상대로 시작한 이 음악 운동은 이제 베네수엘라를 넘어 세계적인 문화 운동으로 펼쳐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여러 음악 단체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같은 맥락의 작업들을 펼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엘 시스테마가 베네수엘라 민주화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일정한 경제 수준을 갖춘 나라라면, 지방자치단체나 음악단체가 조금만 신경 써도 이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전례가 없지 않다. 그러나 금세 시들해진다. 관청은 예산이 없다고 하고 음악가들은 소위 말하는 ‘감성팔이’ 삼아 선심 쓰듯 나섰다가 곧 멈춘다. 왜 그런가? 민주주의, 곧 우애와 공감과 연대의 정서가 빈곤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산도 아니고 인력도 아니다. 깊은 우애와 사회 연대 의식이 피운 꽃이 엘 시스테마다. 영상 속에 그 꽃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글 정윤수(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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