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놀트 쇤베르크

홀로 걸은 음악의 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0월 1일 12:00 오전


▲ ⓒArnold Schonberg Center

1874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

1899 ‘정화된 밤’ 작곡

1903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작곡

1906 실내교향곡 1번 Op.9 작곡

1909 모노드라마 ‘기대’ 작곡

1912 ‘달에 홀린 피에로’ 작곡

1918 사적 음악 연주회 시작

1921 12음 기법 창시

1923 세레나데 Op.24 작곡

1928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 초연

1951 사망 

올해 100주년을 맞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당시 작곡가들의 삶의 모습도 크게 달라졌다. 랄프 본 윌리엄스는 41세의 나이로 의무대에 자원입대해 구급차를 운전했다. 39세의 모리스 라벨은 베르‰전선에서 트럭 운전병으로 근무했다. 드뷔시는 1918년 3월 독일이 마지막으로 파리 시가지에 포화를 퍼부을 때 세상을 떠났다.

오스트리아 빈 태생의 유대계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운명도 기구했다. 전쟁이 터지자 음악회가 줄어들어 연주나 편곡에 따른 수입이 전무했고 작곡을 배우던 제자들의 발길도 끊어졌다. 그도 처음엔 ‘퇴폐적 부르주아’로 여겼던 프랑스 작곡가들, 예를 들면 비제나 라벨·스트라빈스키 같은 ‘별 볼일 없는 키치’들을 타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42세에 생계를 위해 오스트리아군에 지원한 그는 천식 때문에 1년 만에 제대하긴 했지만 전쟁 통에 자신의 음악 활동이 중단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상황이 호전되진 않았다. 베를린 예술대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고 1928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을 초연하는 영예를 누렸지만, 문제는 그의 음악에 대한 반대 여론이 적대적이라고 할 만큼 거셌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치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이번에는 그의 음악에도 ‘퇴폐적’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결국 미국으로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을 위하는 것은 음악이 아니다

서양음악사에서는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드뷔시·스트라빈스키·쇤베르크를 꼽는다. 하지만 더글러스 리가 스탠더드 레퍼토리의 대열에 합류한 곡을 골라 소개한 ‘20세기의 명곡’에는 모두 100여 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쇤베르크의 곡은 단 한 곡도 없다. 오스트리아 빈의 음악 출판사 우니버잘 에디션이 2013년에 정리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필수 20세기 명곡’에는 다행히 쇤베르크의 작품이 세 곡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도 쇤베르크가 창안한 12음 기법을 바탕으로 작곡한 작품은 한 곡도 없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정화된 밤’, 실내교향곡 1번 Op.9 등 모두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작곡된 곡들이다.

다른 곡들은 대부분의 음악가나 청중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고 있지만 ‘달에 홀린 피에로’는 예외다. 현대음악 전문 앙상블이 즐겨 연주할 뿐만 아니라 음반도 10여 종이나 나와 있다. 팝이나 재즈 가수가 부른 버전도 있다. 쇤베르크의 작품 중 불멸의 명곡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달에 홀린 피에로’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 작품에 대한 분석이나 연구 작업도 활발하다. 어떻게 보면 라이벌로 비칠 수 있는 스트라빈스키까지 이 곡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초연 때 리허설을 40회나 했을 만큼 연주하기는 까다로운 곡이다.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노드라마 ‘기대’는 정신병에 걸려 어두운 밤 숲 속에서 연인을 찾아 헤매는 한 여인의 이야기다. 초기 무조음악으로는 대규모 편성의 작품이다. 산업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심리적 공포를 반영하고 있다.

쇤베르크가 20세기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커서 지적 호기심 또는 의무감으로 간혹 레퍼토리에 포함하는 연주자나 연주단체들도 있지만 ‘달에 홀린 피에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품은 인기와는 거리가 멀다. 대부분의 현대음악이 여러 차례 반복해 들으면 제법 친숙하게 와 닿는 데 반해 쇤베르크의 작품은 들을 때마다 난해하다. 그가 새로운 음악 언어를 창조해 현대음악의 지평을 넓힌 공로는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정작 이러한 새로운 음 조직이나 작곡 방법론으로 만든 작품들은 인간의 인지 능력을 벗어난다는 이유로 혹독한 푸대접을 받고 있다.

일반 청중에 대한 불신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쇤베르크가 주도한 ‘사적 음악 연주회’라는 모임이다. 1918년, 빈에서 시작된 이 음악회 시리즈는 프로그램 선정에서부터 연습·연주에 세심하고도 철저한 노력을 기울이고 청중도 아무에게나 개방하지 않고 엄선해 티켓을 판매했다. 주로 음악가·의사·작가·화가 등 엘리트 지식인들이 객석을 메웠다. 현대음악에 비판적인 기자나 평론가의 출입을 막기 위해 입구에는 ‘평론가 출입 사절’이라고 적은 안내 표지까지 붙였다. 센세이션이나 상업적 유행과 통념을 쫓아다니기에 바쁜 ‘음악 애호가’들이 현대음악 연주회에 와서 휘파람을 불거나 야유를 퍼붓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해서였다. 물론 박수도 금지했다. 오스트리아를 강타한 극심한 인플레로 1921년에 막을 내리기까지 유료 관객 앞에서 117회 공연을 치렀다. 재연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모두 154곡이 연주된 셈이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매주 한 번꼴로 연주회가 열렸다.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곡은 같은 날 두 차례 연주하기도 했다. 대편성의 관현악은 실내악 또는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해 연주했다. 쇤베르크는 처음엔 자신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지 않았다. 스트라빈스키·R.슈트라우스·부조니·버르토크·드뷔시·말러·베베른·베르크·레거 등 젊은 작곡가들의 실내악으로 꾸몄다.

수준 높은 청중으로만 구성된 음악회에서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모든 작곡가의 꿈이긴 하지만 자칫 현대음악이 폐쇄적 엘리트주의를 내세움으로써 고립을 자초한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음악이라면 그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음악이 아니다.”

청중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쇤베르크의 음악에서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진보’의 싹을 발견한다. 반대로 스트라빈스키에 대해서는 ‘복고적인 보수 반동’이라는 비판을 가했다. 장·단음계처럼 으뜸음이나 딸림음이 없이 옥타브를 구성하는 12개의 반음이 같은 빈도로 출현하는 12음 기법은 불협화음의 해방이자 어떤 음도 다른 음 위에 군림하지 않는 음의 민주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 1911년 아파트에서 ⓒArnold Schonberg Center


▲ 쇤베르크가 1910년에 그린 자화상


▲ 1940년 로스엔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의 모습 ⓒArnold Schonberg Center

외톨이 작곡가의 12음 기법

쇤베르크는 1874년 빈에서 구두 가게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이 가난해 남들이 학교 다닐 때 그는 일을 해야만 했다. 음악은 독학으로 배우다시피 했다. 아마추어 악단 멤버로 활동할 때 지휘자와 단원으로 만난 세 살 손위의 알렉산더 쳄린스키에게 작곡의 기초를 배웠다. 당시 빈 국립음대 학생이었던 쳄린스키는 나중에 쇤베르크의 처남이 된다.

쇤베르크는 표현주의 화가들과 가깝게 지냈다. 오펜하이머·코코슈카·마르크·클레·실레 등과 예술적 교분을 나눴다. 평생 아마추어 화가에 불과했지만 한때 직업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한 적도 있다. 칸딘스키 등 직업 화가들의 작품이 출품된 전시회에 그의 작품을 내건 적도 있었고, 1910년에는 개인전도 열었다. 적어도 미술을 음악 다음가는 ‘제2의 직업’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07년부터다. 그는 평생 90여 점의 그림을 남겼는데 1908년부터 1910년까지 3년 동안 전체 작품의 3분의 2 이상을 그려냈다. 대부분이 유화와 수채화이지만 펜화·크레용화·목탄화 등도 있다. 1910년 무렵 쇤베르크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작곡가로 출세하고 싶은 욕망과 전통적인 음악 어법을 탈피한 음악 세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내적 욕구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은 것이다.

외톨이 작곡가를 뒤에서 후원하고 격려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지휘자 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였다. 쇤베르크의 밀린 집세를 내주기도 했고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들의 작품을 끔찍이 아껴주면서 조언자이자 비판자, 그리고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쇤베르크는 20세기 음악에서 가장 대범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혁신주의자로 꼽힌다. 직계 제자인 안톤 베베른·알반 베르크는 물론 피에르 불레즈·밀턴 배빗 등 많은 작곡가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에 대한 설명 없이 불가능하다.

12음 기법의 도그마에 대한 반성은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대신에 미니멀리즘·신낭만주의가 득세했다. 무조음악의 요소를 적절히 구사하는 것은 긴장감 형성을 위해 좋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무조음악을 고집하는 것은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감상을 포기하도록 하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것이다.

글 이장직(서울대 서양음악연구소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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