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화, 로열페스티벌홀에 다시 서다

그녀가 런던에 돌아온 날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월 1일 12:00 오전

“1970년 5월 13일.”

정경화는 2014년 12월 2일 런던 로열페스티벌홀 리사이틀을 앞두고 매니지먼트 ICA가 촬영한 동영상에서 자신이 처음 이곳에 섰던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했다. 로열페스티벌홀은 정경화의 음악 역사에서 특별한 곳이다. 앙드레 프레빈/런던 심포니와 차이콥스키 협주곡으로 런던 데뷔를 마친 후 ‘파이낸셜 타임즈’지는 스물둘의 정경화를 이렇게 묘사했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그로부터 44년 후인, 2014년 12월 정경화는 오랜만에 로열페스티벌홀에 섰다. 2002년 7월 22일 앨버트홀에서 정명훈/라디오 프랑스 필과 브루흐 협주곡 1번을 협연한 이래 12년 만의 런던 무대였다. 사우스뱅크로 오기 전 리버풀과 퍼스에서 사실상 런던행을 준비하는 투어를 가졌고 클래식 라디오 채널 BBC3의 인기 프로그램 ‘인 튠(In Tune)’에 출연해 진행자 션 래퍼티와 흥겹게 수다를 나눴다. 공연 직전 영미 주요 일간지와 나눈 인터뷰에선 2005년 왼손 검지를 다쳤던 이야기에 거침없었고, “서울을 제외하면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청중은 런던 관객”이라는 코멘트도 한국 언론에 돌아다녔다. 2,500석 규모의 로열페스티벌홀 리사이틀이 만석을 이루는 경우는 지난 시즌, 우치다 미쓰코와 마우리치오 폴리니 정도였다. 정경화의 독주회도 90퍼센트가량 유료 판매가 이뤄졌다. 정경화의 얼굴을 보기 위해 대략 300~400명가량 되는 한국 관객들도 그의 등장을 기다렸다.

정경화는 젊은 시절 런던에 살았다. 1969년 NHK 심포니의 취입을 제외하면 1970년 아시아 출신으로는 데카에서 음반을 낸 첫 독주자였다. 1971년 4월 7일 BBC는 지금도 명연으로 회자되는 정경화와 프레빈/런던 심포니의 멘델스존 협주곡을 컬러로 방영하면서 시민들에게 정경화를 알렸다. 로열 필하모닉이 1972년 BBC 프롬스에 그녀를 데뷔시켰고, 뒤이어 샤를 뒤투아와 런던 필이 움직였다. 1975년엔 아바도, 1977년엔 BBC 심포니가 정경화와 BBC 프롬스를 함께했다. 1977년 11월 22일 로열페스티벌홀에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대신해 마거릿 공주가 참석한 가운데 로열 콘서트가 열렸고 정경화는 런던 필과 멘델스존 협주곡을 함께했다. 1978년 버르토크 협주곡 2번도 게오르그 숄티/런던 필 연주였고 필리핀 사람들이 농구 선수 신동파를 통해 한국을 알듯, 정경화를 통해 한국을 알게 된 영국인들이 늘어난 것도 그즈음이다.

1983년, 청와대를 예방한 로열 발레단 관계자와 주한 영국 대사관 관계자들이 “정경화 같은 한국 현악 주자들이 연주를 잘하는 비결”을 물었고 영부인 이순자는 훗날 황우석이 그랬듯 “젓가락을 쓰기 때문”이라는 농담을 건넸다. 1984년 파리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서울에 온 다니엘 바렌보임은 “한국에 관해 아는 건 정경화와 백건우”라고 했으며, 버밍엄 심포니 시절 정경화와 버르토크 협주곡 2번을 레코딩한 사이먼 래틀도 2005년 베를린 필 내한 기자회견에서 “정경화와 진은숙을 잘 안다”고 대답했다. 1984년 런던 폰트가 세인트 콜롬바 교회에서 거행된 결혼식이 끝나고 정경화는 “남편을 따라 영국 국적을 갖지만 지금처럼 자랑스러운 한국인임을 잊지 않겠다”고 미국의 통신사 AP와 인터뷰했다.

장남을 출산하고 잠시간의 공백 끝에 소품집 ‘콘 아모레’로 제2의 전성기를 시작한 그녀는 1989년 9월 28일 로열페스티벌홀에서 정명훈/런던 필로 베토벤을 탐험했고 당시 런던 필 감독 클라우스 텐슈테트와는 지금도 전설적인 명반으로 회자되는 브루흐 협주곡을 런던에서 실황 녹음했다. 1997년, 레벤트리트 콩쿠르 우승 30주년을 기념해 런던 바비컨센터는 독주회와 실내악, 협연을 통해 다각적으로 아티스트를 조명하는 정경화 페스티벌을 열었다. 잉글리시 체임버와 런던 심포니가 페스티벌을 함께했다. 1999년 켄트 나가노/할레 오케스트라와 BBC 프롬스에서 베르크 협주곡을 끝으로 정경화는 런던에서의 20세기를 마감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 ‘레전드의 귀환’

오랫동안 정경화를 볼 수 없던 런던 음악계가 그녀를 기억하는 마지막 시점은 1999년과 2002년 BBC 프롬스다. 베르크와 브루흐를 시원하게 그어대던 그 자취가 그들 뇌리에 남아 있다. 그래서 오랫동안의 공백이 궁금했고 공연 전 솔직한 심정이 담긴 인터뷰는 실연의 기대치를 어디에 놓을지, 일종의 가늠자 역할을 했다. 케빈 케너의 반주로 모차르트 소나타 K379,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1번이 전반부에, 바흐 샤콘에 이어 프랑크 소나타가 이어졌다.

리사이틀이 끝난 후 런던 비평계 반응은 44년 전과 조금 달랐다. 일간지 리뷰들은 무난한 공연을 뜻하는 ★★★을 부여했고, 기침 해프닝을 처음 거론한 ‘더 타임즈’지는 ★★을 매겼다. ‘레전드의 귀환’으로 정경화의 복귀를 지켜보던 관객들은 해프닝과 함께 정경화의 현재가 어떠한지도 확인했다. ‘가디언’지는 ‘어린 관객을 언제나 환영한다’는 정경화의 기고를 게재했다.

정경화의 이날 연주는 국내에서 보여온 부상 후 복귀 공연의 기량과 다름없었다. 첫 곡 모차르트 소나타부터 정경화는 음표의 고저에 따라 상체를 적정하게 움직이면서 음악에 몰입하려 했다. 예전의 다이내믹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집중하는 표정과 이완을 준비하는 특유의 눈짓은 젊은 시절 그대로였다. 들려주기 위한 음악이 아닌, 자신의 현재가 이렇다는 것을 청중과 나누는 접근이었지만 예민함은 그대로였다. 있는 그대로를 보이려는 순수함이 연이어 터지는 기침 소리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재채기 소리에 민감해서 눈을 부릅뜨기도 했고 1악장이 끝나자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공연장에 데려오는 건 재고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정경화의 현재가 어떠한지 청중이 알 수 있는 단서 중 하나였다.

이렇게 민감하다는 것은 정경화가 여전히 완벽을 추구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011년 12월 예술의전당 독주회에서 정경화는 브람스 소나타 1번 3악장을 연주하다가 기침 때문에 공연을 스스로 중단했다. 관객들이 그를 응원하려고 박수를 보냈지만, 정경화가 바로 손을 들어 거부 의사를 보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음악 이외의 제스처를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음악이 가는 대로 자신을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주로 반주자와 관객의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는 욕심이다.

정경화는 자신에게 최적화된 피아노 주자를 찾았다. 한국 관객은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정경화가 어떤 연주를 보일지 알고, 관계에 맞는 리액션도 할 줄 안다. 어디에서나 맞춤형 관객을 기대하긴 어렵다. 런던의 반응은 서울과 달랐다. 2015년 4월에는 정경화가 다시 찾고 싶어 하던 도쿄 산토리홀에서 리사이틀이 열린다. 담담하게 잦아드는 차분한 악장에서 멋쩍게 웃는 그녀의 미소를 보고 ‘바이올린의 화신’이라 부르던 그들이다. 장인적 기술과 소통 능력은 정경화의 바흐와 베토벤, 브람스를 바라볼 때 화두다. 

사진 뮤직앤아트 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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