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닐센

덴마크 음악사를 빛낸 불멸의 이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2월 1일 12:00 오전

카를 닐센

덴마크 음악사를 빛낸 불멸의 이름

1865 덴마크 뇌레 린델세에서 출생

1874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

1884 코펜하겐의 왕립음악원에서 작곡을 배우기 시작

1894 교향곡 1번이 연주됨

1903 관현악곡 헬리오스 서곡 작곡

1905 덴마크 왕립관현악단의 부지휘자로 임명

1912 교향곡 3번이 초연됨

1916 교향곡 4번 ‘불멸’ 작곡

1922 교향곡 5번, 목관 5중주 작곡

1925 교향곡 6번 작곡

1926 플루트 협주곡 작곡

1931 66세로 코펜하겐에서 사망

올해 시벨리우스 탄생 150주년을 맞았지만 안타깝게도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연이 많지는 않다. 그래도 시벨리우스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 듯싶다. 같은 해 태어난 카를 닐센은 깜깜 무소식이니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닐센은 시벨리우스에 비하면 무명에 가깝다 보니 공연 소식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유럽과 미주에서는 그의 교향곡과 실내악을 주요 레퍼토리로 자주 연주하고 있다.

가난한 시골 소년

카를 닐센(1865~1931)은 덴마크의 뇌레 린델세에서 태어났다. 덴마크의 수도 쾨벤하운이 있는 셸란 섬 서쪽에 위치한 핀 섬의 시골 마을로, 이 섬에서 가장 큰 도시인 오덴세에서 남쪽으로 11km 정도 떨어져 있다. 닐센은 집안형편이 좋지 않아 어릴 때 이웃 마을의 가게에서 상주하며 일을 했다. 페인트공이던 아버지는 바이올린과 코넷을 연주한 아마추어 음악가로, 악단을 조직해 마을 축제에서 연주를 도맡아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닐센이 여섯 살 때 홍역에 걸려 집에만 있자 아버지는 그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아들이 바이올린에 재능을 보이자 아버지는 닐센을 자신의 밴드에 합류시켰다. 작곡도 곧잘 해 아홉 살 때 만든 작품 ‘폴카’(1874) 악보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음악을 향한 힘겨운 발걸음

14세 때인 1879년 닐센이 일하던 가게가 문을 닫아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전화위복이 되었다. 아버지에게 급히 한 달간 금관 악기를 배우고, 그해 11월 오덴세 근교의 군악대에 입대한 것. 닐센은 음악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입대 당시 닐센의 사진을 보면 군대용 버글(신호용 뿔나팔에서 기원한 것으로, 밸브가 없는 작은 금관악기)과 밸브가 있는 알토 트롬본을 연주한 것으로 보인다.

4년간의 군악대 생활 중 선배들에게 고전음악의 기초를 배웠으며, 오덴세 성당에서 바이올린도 배웠다. 작곡 실력도 늘어 ‘바이올린 2중주’(1882), ‘바이올린 소나타 G단조’(1882), ‘피아노 3중주 G장조’(1883), ‘현악 4중주 D단조’(1883) 등 규모를 갖춘 여러 실내악곡을 남겼다. 이 곡들은 대체로 하이든, 모차르트 등 고전의 모방에 가깝지만, 정규 콘서트에서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 높은 선율과 잘 짜인 형식을 갖추었다. 닐센의 음악성을 눈여겨본 군악대 감독은 그를 당시 덴마크 최고의 거장이자 왕립음악원 원장이던 작곡가 닐스 가데(1817~1890)에게 소개해주었다.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닐센은 군악대에서 제대하자마자 코펜하겐의 왕립음악원에 응시했다.

닐센은 바이올린으로 시험을 치렀지만, 학교가 원하는 기준에는 맞지 않았다. 그런데 세 번째 인생의 반전이 나타났다. 가데가 작곡 전공으로 합격시킨 것이다. 이로써 1884년 1월부터 3년간 왕립음악원에서 정규 음악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 1925년 당대의 예술가들과 함께한 닐센 ⓒwww.carlnielsen.org

고생 끝 행복 시작

닐센은 작곡가보다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어 한 것 같다. 작곡에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재학 시절 작곡한 곡은 4분 30초 길이의 클라리넷 소품 ‘환상소곡 G단조’(1883~1885)가 전부였다. 졸업 후에는 현악 4중주 1번(1887~1888)을 포함한 두 곡의 현악 4중주곡과 현악 5중주(1888), 그리고 성공한 첫 작품으로 기록된 ‘현을 위한 작은 모음곡’(1887~1888) 등 현악 작품과 몇 곡의 노래를 작곡했다. 첫 관현악 작품으로 교향곡 작곡도 시도했지만 아직은 자신이 없었는지, 1악장만 완성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이 곡은 ‘교향적 광시곡’(1888)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닐센은 졸업 후 2년 반 이상이 지난 1889년 9월 코펜하겐 왕립극장 소속 덴마크 왕립오케스트라의 제2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그가 존경해 마지않던 노르웨이의 거장 요한 스벤센(1840~1911)이었으며, 닐센은 이 거장 밑에서 오케스트라를 배울 수 있었다. 레슨과 후원 등으로 경제적 안정도 찾으면서 행복한 삶이 시작되었다.

1890년에는 이듬해에 걸쳐 정부장학금으로 유럽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닐센은 다양한 현대음악을 들었으며, 특히 ‘니벨룽의 반지’ 등 바그너의 음악극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닐센은 바그너의 음악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역시 정부장학금으로 여행 중이던 안네 마리를 만나 귀국 전인 1891년 5월 피렌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안네 마리는 조각가로, 덴마크에서 매우 중요한 여성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교향곡 1번(1890~1892)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초연은 2년 후인 1894년 5월 14일 스벤센이 지휘하는 왕립관현악단의 연주로 이루어졌으며, 큰 성공을 거두어 독일과 스웨덴에서도 연주되었다. 닐센은 갑자기 덴마크를 대표하는 젊은 작곡가로 급부상했다. 제2바이올린 연주자로 초연에 참여한 닐센은 그 누구보다 크게 감격했을 것이다.

덴마크 대표 작곡가로

30대가 된 닐센은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다양한 행사용 칸타타와 상당한 양의 연극음악을 위촉받았으며, 오페라 ‘사울과 다윗’(1898~1901)을 만들었다. 이 곡은 덴마크 음악으로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지만, 4막에 이르는 긴 길이에 드라마틱한 장면이 적어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정체성의 발현인 현악 작품 작곡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바이올린 소나타 1번(1895)과 현악 4중주 3번(1897~1898)은 수작으로, 충실한 내용과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닐센은 ‘사울과 다윗’을 작곡하던 중 교향곡 2번(1901~1902)을 착수했다. 이 두 곡은 동시에 작곡이 이루어진 까닭에 음악적 소재와 기법 등에 유사한 점이 많다. 교향곡 2번이 비교적 유명한 이유는 ‘네 가지 기질’이라는 부제 때문이다. 닐센은 셸란 섬의 한 시골 선술집에서 ‘담즙질’(화를 잘 내는 기질) ‘점액질’(냉정한 기질) ‘우울질’ ‘다혈질’ 등 인간의 네 가지 기질을 그린 네 점의 연작을 보았다. ‘교향곡 2번’은 이 기질을 각 악장의 악상 기호에 담았다.

이제 닐센의 시대가 도래했다. 교향곡 외에 잘 알려진 관현악곡 ‘헬리오스 서곡’(1903)이 바로 이 시기의 작품이다. 1903년 그리스 여행 중 에게 해의 일출을 보고 감격해 태양이 뜨고 지는 하루를 10분 정도의 길이에 담았다. 현악 4중주 4번(1906~1919)은 닐센의 현을 위한 실내악곡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덴마크의 국민 오페라 ‘가면무도회’(1906)도 완성했다. 이 곡은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에 필적하는 희극으로, 닐센의 유희적 측면이 훌륭히 발휘되어 있다.

승승장구하던 닐센은 1905년 덴마크 왕립관현악단의 부지휘자라는 날개를 달았다. 1914년까지 이어진 이 기간 중 그는 지휘와 계속되는 위촉 작곡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별거, 외도 등 생활은 불안정했다. 그래서 두 번째 교향곡 이후 9년이 지나서야 교향곡 3번(1910~1911)을 내놓을 수 있었다. 이 곡은 레이놀드 모리체비크 리에레의 ‘소프라노 협주곡’처럼 가사 없이 보칼리제로 부르는 두 독창자가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부제인 ‘Sinfonia Espansiva’(‘확장 교향곡’이라고 표기한다)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은데, 닐센을 연구한 영국 작곡가 로버트 심프슨은 ‘마음의 외적 성장’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교향곡 3번으로 터진 물꼬는 바이올린 협주곡(1911)과 바이올린 소나타 2번(1912)으로 이어졌다.


▲ 닐센이 음악 활동을 했던 덴마크 코펜하겐의 풍경 ⓒNyhavn Bertil Videt

‘불멸’의 작곡가

카를 닐센은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는 덴마크 최고의 작곡가였다. 1914년에 음악협회 관현악단으로 옮겨 1926년까지 지휘했으며, 2년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는 등 최고 지위를 누렸다. 그의 음악은 덴마크의 지역색과 그만의 개성을 담고 있지만, 스벤센의 낭만주의와 그리그의 민족주의, 브람스의 신고전주의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폴리포니로 둘러싸인 영역 안의 어느 지점에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그를 감싸던 이 벽을 깨고 나오게 했다. 덴마크는 중립국으로서 이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노심초사했지만, 국경이 인접한 독일의 압력으로 참전해 덴마크인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이에 닐센은 굳센 희망의 의지를 담은 작품을 발표한다. 교향곡 4번 ‘불멸’(1914~1916)이다. 이 놀라운 작품은, 마치 홀스트의 ‘행성’처럼 닐센의 곡 중에서도 특히 빛난다. 두 명의 팀파니스트가 만드는 격동과 목관악기의 화려한 움직임, 그리고 금관악기의 강력한 팡파르와 거침없는 현의 물결은 격렬한 감정의 동요를 경험케 한다.

특히 이전까지 사용했던 대표 조성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심프슨이 언급한 ‘진행하는 조성’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조성은 고전적인 운영 방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으로, 이전에도 사용되었지만 교향곡 4번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은 첫 부분의 주제가 피날레에 등장하는 순환 구조로 확보되었다.

피아노곡 ‘샤콘’(1916)와 ‘주제와 변주’(1916), 그리고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에 비견되는 교향시 ‘판과 시링크스’(1917~1918), 연극 음악 ‘알라딘’(1918~1919) 등 개성적인 역작이 뒤를 이었다.

거장의 향기

교향곡 4번이 전쟁에 대한 외향적 저항이라면, 교향곡 5번(1922)은 전쟁에 대한 내면적 성찰이었다. 사색적인 무게감과 이를 통해 발현되는 진지한 개성의 측면에서 교향곡 4번보다 한 수 위로 평가받는다. 이 곡은 전체 두 악장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만 내용상 네 악장의 성격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교향곡 4번과 달리, 몇 가지 요소가 대비되면서 유기적 통일성을 꾀한다. 이 곡에서 귀를 사로잡는 것은 음악의 흐름을 끊고 평정하는 작은북인데,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을 연상시킨다. 군악대에 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전쟁을 희화적으로 상징하는 모티브로 보인다.

같은 해 작곡한 목관 5중주(1922)는 목관악기 연주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작품 중 하나로, 교향곡 5번과 달리 경쾌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감돈다. 교향곡 5번의 진지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와 함께, 이 곡을 연주한 코펜하겐 목관 5중주단에 대한 신뢰가 이러한 즐거운 작품을 만들게 했을 것이다.

3년 후에는 교향곡 6번(1925)을 작곡했다. 이 곡에는 ‘단순 교향곡’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목관 5중주와 연결되는 유희적 측면이 있지만 교향곡 4번에 필적할 정도로 극적이며, 음악적 스타일은 보다 현대적이면서 복잡하다. 거장들의 최후의 교향곡 같은 장중함은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닐센은 당시 심각한 심장마비를 경험했지만 죽음이 곧 닥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키지 못한 약속

60세가 넘은 닐센은 자신의 목관 5중주를 연주한 코펜하겐 목관 5중주단의 단원들을 위해 협주곡을 쓸 것을 구상한다. 그 결과물로 플루트 협주곡(1926)과 클라리넷 협주곡(1928)이 탄생했다. 이 두 곡의 관현악은 작은 규모로 편성되어 독주 악기가 잘 드러나도록 배려했으며, 형식적으로 매우 자유롭다. 특히 클라리넷 협주곡은 닐센의 곡 중 가장 현대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몇몇 패시지들이 쇼스타코비치를 연상시키는 것도 흥미롭다. 이후 3년간 닐센은 여전히 행사용 음악과 연극 음악을 작곡하면서, 굉장한 집중력으로 폴리포니의 향연을 들려주는 기념비적인 오르간 대곡 ‘Commotio’(1930~1931)를 남겼다. 하지만 약속했던 목관 협주곡 세트는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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