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윤홍천이 건반으로 쓴 에세이
지휘자 로린 마젤과의 추억
2014년 12월, 윤홍천이 독일에서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 무대를 가졌다. 그가 들려주는 마에스트로 로린 마젤과의 인연과 이번 연주에 얽힌 진솔한 이야기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매일 앉는, 내게는 가장 익숙한 자리건만 2300여 명 앞에 앉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오케스트라의 서주가 시작되었다. 눈을 감았다. 쇼팽이 고향 바르샤바를 떠나며 작곡한 협주곡 1번은 장엄하게 시작된다. 웅장한 멜로디는 곧 서정적인 테마로 전개되고, 작곡 당시 스무 살이던 순수한 쇼팽의 애절한 감성이 마음으로 전해진다. 눈을 뜨고 건반을 보았다. 하얗고 까만 건반 위에 여러 감정이 쏟아진다. 지나간 날에 대한 기억, 슬픔과 행복 사이 수만 가지 색깔을 지닌 순간, 내게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과 타계한 마젤의 얼굴이 생각났다. 머리를 비웠다. 건반 위에 손을 올리니 모두 나의 손을 주목하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첫 음을 누르며 음악 속에 나를 던졌다.
마에스트로와의 만남
음악 세계에서 지휘자의 역할은 매우 크다. 어떤 지휘자를 만나느냐가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젊은 솔로이스트들이 지휘자를 통해 발굴되어 세상에 소개되기도 한다. 로린 마젤은 내게 우러러보는 지휘자 외에 개인적으로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는 내가 어릴 때 처음 본 세계적인 지휘자이기 때문이다.
1994년, 어머니는 초등학교 6학년인 나를 이끌고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했다. 마젤이 이끄는 영국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여주시려고 큰맘 먹고 당시 10여만 원이던 R석 티켓을 산 것이다. 어머니는 밖에서 기다리셨던 것 같다. 내가 당시 무엇을 얼마나 이해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은 내게 큰 인상을 남겼다. 오케스트라 앞에 선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 소리를 조각하듯 조율하던 그의 모습이 너무도 멋져 보였다. 그날 이후 나도 언젠가 저런 훌륭한 지휘자와 한 무대에 서고 싶다는 아련한 꿈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를 잊고 지냈다. 나이가 들면서 다른 지휘자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연주를 평가하게 되는 ‘머리가 커져버린’ 음악가가 되었다. 2012년 어느 날, 마젤이 뮌헨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그의 연주를 본 나는 다시금 큰 감동을 받았고, 그제야 어릴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를 만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나는 용기를 내 그에게 무작정 편지를 써 내려갔다. 나의 음반과 함께 봉투에 편지를 넣어 독일 매니지먼트에 전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매니저는 “워낙 바쁘신 분이니 아마 연락이 없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에게선 회신이 없었다. 거기에서 그와의 연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5월, 나는 그의 연주를 보러 갔고 연주가 끝난 뒤 무대 뒤로 직접 찾아갔다. 그는 기적처럼 내 이름을 기억했고, 이틀 후 오디션을 보러 갔다.
하얀 정장을 입고 나타난 그는 젠틀한 모습이었다. 30여 분의 연주가 끝나자 그는 자신의 방으로 나를 이끌더니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그러고는 왜 당신 같은 피아니스트를 이제야 알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더니 비서에게 연락처를 남기라고 했다. 곧 오케스트라 측에서 연락이 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오디션이 끝난 후 당일 바로 섭외하자며 오케스트라 측에 제의했다고 한다. 일이 너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이 마치 운명 같았다.
몇 달 후 마젤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때 나는 한국에 있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마젤의 건강에 대해서는 오케스트라 측으로부터 이미 들었지만 정작 돌아가셨다고 하니 허탈함이 밀려왔다. 주위 사람들은 앞으로 내게 올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을 아쉬워했지만, 나의 아쉬움은 다른 곳에 있었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고 배울 수 없게 된 것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그의 공연에서 연주한 곡이 베르디의 레퀴엠이었다는 것도 아이러니했다. 너무나 정확해서 가끔 차갑게, 현실적으로 느껴지던 그의 음악. 그것은 이제 너무나 자유롭고 영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의 음악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리허설, 따뜻했던 처음의 그날처럼
마젤이 타계한 후 오케스트라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이번 시즌엔 85번째 생일을 맞는 마젤을 기리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는데, 그가 지휘해야 할 40여 회 공연의 대타 지휘자를 찾는 것이 어려웠다고 한다.
12월 공연의 지휘는 핀란드 태생의 피에타리 잉키넨이 맡게 되었다. 사실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이름밖에 없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80년생이라고 했다. 나보다 두 살 위인 셈이다. 잉키넨은 이미 뮌헨 필하모닉을 지휘한 적이 있고, 훌륭한 지휘자라고 오케스트라 측에서 귀띔해주었다.
12월 12일, 첫 리허설을 하는 날은 내 생일이기도 했다. 리허설 한 시간 전 잉키넨을 만났다. 작은 체구에 소년 같은 이미지였다. 조금 무뚝뚝해 보였다. 그는 내게 몇 부분을 연주해보라고 하더니 짧게 이야기를 마쳤다. 자신이 있는 걸까 생각하다 왠지 이 사람과 연주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주할 피아노를 고르고 그리 쉽지 않은 가스타익 음향에 적응하자니 곧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피아노 앞으로 걸어가는 내게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연주해준 것이다. 너무 놀랍고 감사해서 엉거주춤 그대로 서 있었다. 2008년, 하노버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처음에는 베를린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그곳에서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내내 비가 내렸다. ‘이런 날씨는 지긋지긋해.’ 나는 다시 기차를 타고 뮌헨으로 내려왔다. 생일 축하 노래를 들으며 서 있는데, 유리창 위로 떨어지는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도착한 뮌헨의 첫 인상이 생각났다. 지그시 웃으며 반기는 듯한. 뮌헨 필하모니 단원들은 그렇게 나를 맞아주었다. 리허설은 한 시간 남짓 후 끝났다. 몇 군데를 다시 해봤고, 별문제 없이 잘 끝났다.
12월 14일, 뮌헨 필하모닉과의 첫 연주
연주 요청이 확정되었을 때부터 연주회 날까지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하루도 이 연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규모의 크기를 떠나 모든 연주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자는 목표를 가진 나지만 연주회 날이 다가오면서 마젤이 선택한 한국 피아니스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무엇보다 스스로에 거는 나의 기대치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라디오에서는 실황 녹음을 하게 되었다며 표가 매진되었다고 했다. 연주회 전날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었기에 11시 연주라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홀로 향했다.
독일 무대의 좋은 점은 연주자를 편안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무대 뒤 대기실로 들어가니 내게 필요한 것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오케스트라 관계자가 두꺼운 책을 가져왔다. 방명록이었다. 117번째 시즌을 맞이한다는 뮌헨 필하모닉의 방명록에는 전설적인 음악가들의 발자취가 남겨져 있었다. 마젤, 게르기에프, 에센바흐, 메타 등의 음악가와 같은 책에 내 이름을 올리는 것이 신기했다.
연주할 시간이 다가오면서 긴장될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항상 하던 대로 하자는. 하지만 연주에 들어가기 전 몇 분 동안은 ‘항상 하던 대로’의 마음이 전혀 아니다. 무대 위에 올랐다. 음악가는 음악 앞에서 가장 솔직할 수 있다고 했던가. 완벽한 연주는 아니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니 마음이 차분해지고 나 자신을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말하고 싶어졌다. 순간을 즐기고 있으니 40여 분의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원래 어떤 앙코르를 할지 정해놓지 않지만, 이번 연주회 때는 바흐의 ‘사랑하는 형과의 작별에 부치는 카프리치오’를 연주하려 했다. 마젤을 생각하며 연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피아노로 다시 향하는 순간 마음을 바꾸었다. 마젤과의 인연과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나만의 것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무대 위에서 모두에게 그 마음을 알리기보다는 몰래 소중히 간직하고 싶었다. 그래서 슈만/리스트의 ‘헌정’을 연주했다. 고마운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리며.
무사히 마친 나흘간의 협연
첫 연주가 끝나니 확실히 마음이 좀 편해졌다. 15일 하루를 쉬고 나니 컨디션도 좋아졌다. 뮌헨의 중요한 두 신문에서 좋은 평이 실렸다는 소식을 들으니 부담도 적어졌고, 조금 더 자신 있게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 같다. 16일과 17일에는 특히 많은 친구들이 공연에 참석해주었고, 이것이 큰 힘이 되었다.
18일 연주회는 도르트문트의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있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6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도르트문트에 도착했다. 도르트문트는 처음 연주하는 곳이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 이곳에서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대기실에서 혼자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있는데, 공연장 대표가 인사를 하러 왔다. 악수를 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상한 냄새가 났다. 무슨 냄새인지 두리번거리다 전구에 닿은 내 코트가 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연주하러 와서 당신의 홀을 태우고 갈 뻔했네요.”
콘체르트하우스는 음향 시설이 훌륭했고, 마지막 연주까지 무사히 끝났다. 연주가 끝나고 무대 뒤로 오는데 그동안 쌓인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급습했다. 오케스트라 관계자들과 식사를 마치고 호텔방에 들어와 바로 넉다운되었다. 비가 내리는 시내에 달린 크리스마스 장식이 이제는 좀 쉬라고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에필로그
공연을 마치고 집에 온 나는 오랜만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늦은 크리스마스 쇼핑도 해야 했고, 미뤄둔 일 처리도 많았다. 며칠 지나면서 이번 공연의 의미가 새삼 더 뜻깊게 다가왔다.
행운은 쉽게 올 수 있어도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열세 살 때 마음에 품은 꿈이 20년 만에 이루어졌듯이···.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한국인 성악가나 현악 연주자에 비해 피아니스트는 유난히 드물다. 독일에서 13년을 살면서 보이지 않는 장벽에 부딪힐 때가 많았다. 피아니스트의 수는 갈수록 많아지고 시장은 좁아진다지만, 동양인 피아니스트에게 특히 유럽 사람들은 그리 쉽게 팔을 벌리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더 열심히 하고자 하는 동기가 되었다. 어떤 이슈를 통해 반짝 스타가 되기엔 능력도 부족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다. 지금까지 나의 장점은 시간을 갖고 천천히, 하지만 늘 꾸준히 발전해나간 모습이 아니었을까? 세계무대에서 인정받는 ‘꾸준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 꿈, 이번 공연을 마치면서 다시 한 번 가슴에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