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칼라스 고음질 음원 전집 감상회 취재기
‘소장의 가치’와 ‘소비의 속도’를 가늠질하는 지금. LP, CD, 그리고 그 이후 음악을 만나는 새로운 방법
LP 레코드가 다시 유행하고 있다. 1980년대 CD의 등장으로 창고 신세를 지던 LP는 1990년대에 출현한 MP3에 의해 완전히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부터 40·50대를 중심으로 붐이 일기 시작했고, 흐름은 20·30대까지 퍼져 지난해에는 그야말로 ‘LP 시대로의 회귀’였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2014년 한 해 LP 판매량이 전년보다 52% 증가했다고 밝혔다.
LP 소비의 급증은 사실 LP 자체의 소비라기보다는, LP의 ‘감성’에 대한 소비 현상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LP를 하나하나 수집하던 그때, 전축의 턴테이블 위에 얹으면 레코드판이 뱅글뱅글 돌며 소리를 내던,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귀한 일이던 그때 그 시절의 향수가 사람들의 정서를 자극한 것이다.
이는 30여 년간 대안 없이 머물러 있는 CD와 무형의 매체로 가치가 퇴색된 MP3의 한계를 뛰어넘는 대체 매체의 결핍에 의한 현상이기도 하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고음질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는 꾸준히 개발되었지만 수천, 수억 원을 호가하는 오디오 브랜드는 부유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하나의 가구로 ‘전시’되었고, 저음질의 MP3 파일은 ‘소장의 가치’보다 ‘소비의 속도’가 더 중요해졌다.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음악 애호가들은 끊임없이 발전하는 녹음 기술과 오디오 기기를 마음껏 즐기고 소비할 권리가 있다. 언제까지 과거의 낭만에 젖어 있을 수는 없다. 양질의, 편리한, 또 소장 가치가 있는 음악 매체가 등장해야 한다.
리얼리티+편의성=?
최근 그루버스가 워너 클래식스의 마리아 칼라스 스튜디오 녹음 전집을 마이크로 SD카드에 담아 고음질 음원으로 발매하였다.(마이크로 SD카드는 극소형 메모리카드로, 매우 안정적이고 높은 저장 능력을 갖췄다) 그루버스는 2012년 설립한 고음질 음원 다운로드 서비스 기업으로 아이리버의 자회사로 출범했다가 지난해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파일 형태의 서비스만 운영하던 그루버스가 처음으로 내놓은 ‘제품’은 무형의 형태로서는 고음질의, 유형의 형태로서는 패키지의 구성을 띤다. 이는 ‘상품’으로서 한 단계 진보한 시도로 보인다.
그동안 스튜디오에서 24비트·96kHz 이상의 포맷으로 녹음되던 음악은 용량의 문제로 16비트·44.1kHz로 변환되어 CD에 담겨왔다. 당연히 완성도는 원본 포맷에 비해 떨어진다. 원본을 그대로 감상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DVD 오디오·SACD·블루레이다. 이러한 매체를 통해 투명한 음향과 공간감·잔향 그리고 연주자의 섬세한 표현을 전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매체는 여전히 CD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루버스 주최로 2월 10일 풍월당에서 열린 음악감상회에서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로 매체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진행을 맡은 최윤구 씨는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 비제 오페라 ‘카르멘’의 ‘하바네라’를 CD에 담긴 웨이브(wav) 파일과, 24비트·96kHz 포맷으로 새로 리마스터링한 고음질 음원 파일을 차례로 재생했다.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으로 재생하니 CD의 음악도 감흥이 훌륭했다. 하지만 고음질 음원은 확실히 달랐다. 한 꺼풀 막이 걷힌 듯 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심도 있는 음향과 빽빽한 밀도, 홀의 반사 잔향까지 세밀하게 담긴, 넓고 유연해진 음악적 표현은 입체적인 경험을 선사했다. 이날 현장에 있던 오디오 시스템은 아이리버에서 개발한 브랜드 아스텔앤컨의 AK500N 모델이었다. 2000년대 초, MP3 플레이어 분야의 1등 기업으로 벤처 신화를 쓴 아이리버는 스마트폰 시대가 개막하며 수년간 고배를 마셨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칫솔 살균기까지 만들었지만, 적자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다 음향 제조기기 회사로서 본거지로 돌아와 휴대용 하이파이 오디오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6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현재까지 세 개의 휴대용 하이파이 오디오 모델을 내놓았고, 처음으로 선보인 거치형 하이파이 오디오가 이날 음악을 들려준 제품이다. MP3 플레이어로 시장을 주름잡던 기업이 새로이 정한 노선은 현재 음악 애호가들의 욕구를 반영한다.
대중화를 위해 필요한 것
많은 사람들이 파일에 담긴 음악을 듣는 것에 여전히 거부감을 느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손에 잡히지 않는 매체가 얼마나 신뢰감 있는 소리를 전해줄지 의심이 드는 것이다. 이는 시간이 필요한 문제다. 고음질 음원이 꾸준히, 활발히 유통된다면 자연히 친숙해질 일이다.
그러나 널리 보급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먼 듯 보인다. 먼저 디지털 저작권 관리(DRM, Digital Rights Management)가 보완·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무단 복제의 위험성을 지닌 매체인 만큼 사용자의 편의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정확한 관리가 필요하다. 용량의 문제도 있다. 한 장의 CD에 담긴 16비트·44.1kHz 음원의 용량은 700MB인데, 사양이 높아질수록 용량은 제곱이 되어 CD 한 장을 듣기 위해 수십GB의 용량을 마련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다운받을 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점과 다운받은 후에도 컨버터와 재생기기가 해당 파일을 지원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럼에도 고음질 음원이 차세대 음악 매체의 단일 후보임은 틀림없는 듯하다. 다운로드 방식이 지속·발전할 수도, 고음질 음원을 스트리밍 서비스로 즐기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양질의 콘텐츠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예술을 더 가까이에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새 시대의 도래가 머지않았다.
글 김호경 기자(ho@gaeksuk.com) 사진 윤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