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통영국제음악제 ‘여정(Voyages)’

윤이상의 꿈, 무르익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3월 1일 12:00 오전

윤이상 서거 2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프로그램을 미리 살펴본다


▲ 기돈 크레머·크리스토프 포펜·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

제14회 통영국제음악제가 3월 27일부터 4월 5일까지 펼쳐진다. 2002년 ‘서주와 추상’이라는 주제 아래 힘찬 뱃고동을 울리며 출항한 통영국제음악제는 윤이상의 ‘꿈’(2003)을 담아 ‘공간’ ‘기억’ ‘유동’ ‘만남’ ‘자유’ ‘동과 서’ ‘음악+’ ‘전환’ ‘소통’ ‘자유와 고독’ ‘바다풍경’을 거쳐 2015년 ‘여정(Voyages)’이라는 항구에 머무른다. 윤이상(1917~1995) 서거 20주년을 기념해 그의 삶과 음악을 회고하고, 음악제의 지난 13년을 돌아보는 의미로 테마를 ‘여정’이라 정했다.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프로그램을 살펴보니, 통영 방문 일정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고민이다. 2주 내내 통영에 머물 수는 없는 일. 주요 공연을 골라볼 수 있도록 스케줄을 정해야 하는데, 축제 전 기간에 알찬 프로그램이 고루 포진해 있다. 통영의 따스한 봄바람을 가장 먼저 맞을 이는 올해의 레지던스 아티스트인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와 바젤 심포니 오케스트라다. 유미 황 윌리엄스와 윤이상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을, 또 다른 레지던스 아티스트인 피아니스트 파질 사이와 레너드 번스타인 교향곡 2번 ‘불안의 시대’를 연주하며 축제의 막을 올린다.(3월 27일)

지난해 호평받은 살바토레 샤리노의 음악극 ‘죽음의 꽃’에 이어 올해 통영국제음악당 블랙박스를 채울 작품은 마크 앤서니 터니지의 오페라 ‘그리스인’이다.(4월 2~4일) 마크 앤서니 터니지의 초기작이자 출세작으로, 내실 있는 무대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된다. 매년 개막식을 책임지던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TFO)는 올해 폐막 공연을 담당한다.(4월 5일)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소프라노 카롤리나 울리히가 협연하고 크리스토프 포펜이 지휘자로 나선다. 이들은 폐막 공연을 마치고 축제의 감동을 일본·홍콩 투어 공연을 통해 아시아에 전할 예정이다.

윤이상이 이루고자 했던 후학 양성의 꿈을 실현하는 아시아 작곡가 쇼케이스(3월 29일)도 예년과 다름없이 펼쳐지며, 명창 안숙선의 ‘심청가’(4월 2일)와 조윤성·윤종신의 ‘보야지 드 재즈’(3월 28일) 등의 공연도 만날 수 있다. 본격 항해의 초읽기가 시작됐다. 파도에 미리 몸을 실어보자.

작곡+연주+지휘, 데이비스&사이의 무대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데이비스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파질 사이는 이번 페스티벌에서 다채로운 음악적 교류를 나눈다. 개막 공연에서 사이는 데이비스가 지휘하는 바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데이비스는 밤 10시에 시작하는 나이트 스튜디오에서 피아니스트 나메카와 미키와 함께 사이가 작곡한 두 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변주곡을 선보인다.(3월 28일)

현재 바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인 데이비스는 슈투트가르트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하이든 교향곡 시리즈(Sony Classics)와 브루크너 오케스트라 린츠와 녹음한 브루크너 교향곡 시리즈(Arte Nova)로 유명하지만, 35년간 현대음악 작곡가 필립 글래스의 곡을 연주해온 ‘필립 글래스 전도사’이기도 하다.


▲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파질 사이·예용시

데이비스의 폭넓은 레퍼토리가 군더더기 없이 깨끗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그리는 데에는 그가 다른 무엇보다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는 지휘봉을 들기 전 스코어를 완전히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소리에 대해 확신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지휘대에 오르면 자신이 작곡가를 대변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각 악기의 소리와 오케스트라의 음향에 집중한다. 데이비스가 윤이상과 대면한 것은 윤이상의 말년인 1994년에야 이루어졌지만, 그는 1980년대부터 윤이상의 여러 곡을 연주해왔다. 그는 윤이상이 매우 친절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고 회고하며, 그의 시적인 음악을 사랑한다고 전했다. 이번에 윤이상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을 선보이는 데이비스는 윤이상의 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2중 협주곡과 플루트·오보에·바이올린·첼로를 위한 ‘Images’를 음반(Camerata, 1997)으로 남겼다.

터키 출신인 사이는 앙카라 국립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한 후 독일의 뒤셀도르프 음악대학으로 건너가 수학하다 25세 때 영 아티스트 인터내셔널 오디션에서 1위를 수상하며 세계 음악계에 등장했다. 개성 강한 자유로운 피아니즘으로 ‘21세기의 글렌 굴드’라는 별명을 얻었다. 현재까지 교향곡 4곡, 협주곡 15곡, 실내악곡 14곡, 피아노곡 16곡과 재즈로 편곡한 모차르트·파가니니 등 여러 곡을 발표하며 작곡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04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터키 민속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밝힌 그는 이번 페스티벌에서 예용시/홍콩 신포니에타와 자작곡인 피아노 협주곡 2번 ‘실크 로드’와 ‘게지 파크 Ⅲ’을 한국 초연하며,(3월 31일) 자작곡 레퍼토리로 리사이틀을 갖는다.(3월 29일) 그가 직접 연주하는 창작곡을 만나는 것은 즐겁지만, 이번 페스티벌에서 그가 연주하는 윤이상의 곡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아쉽다.

파격과 도발의 끝, 오페라 ‘그리스인’

올해 또 다른 상주 작곡가로 통영을 찾는 마크 앤서니 터니지는 현대음악 작곡가로서 현재 가장 ‘뜨거운’ 인물이다. 1988년 오페라 ‘그리스인’을 초연하며 음악계에 등장함과 동시에 명성을 얻었다. 이듬해부터 1993년까지 사이먼 래틀이 이끄는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세 개의 오페라 작품 ‘세 명의 소리치는 교향들’ ‘카이’ ‘모멘텀 앤드 드로운 아웃(Momentum and Drowned Out)’을 차례로 발표했다. 2011년에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 모델이던 애나 니콜 스미스의 삶을 다룬 오페라 ‘애나 니콜’을 발표해 ‘텔레그래프’지로부터 ‘터니지는 재즈, 블루스, 무도회장의 빅밴드와 브로드웨이의 생동감 등 미국의 가장 대중적인 표현 방식과 대체 불가의 독창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평을 얻었다. 초기에 얻은 악동 이미지는 그가 수년간 꾸준히 선보인 예술성 덕에 완전히 사라졌다.


▲ 오페라 ‘그리스인’·디오티마 현악 4중주단

이번 페스티벌 무대에 오를 오페라 ‘그리스인’(4월 2~4일)은 그의 정체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모티브로 한다. 아버지를 죽이고 생모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의 고전 비극을 1980년대 런던으로 옮겨왔다. 단출한 무대 위에 귓가를 자극하는 타악기·관악기의 시끄러운 리듬과 원색적인 대사가 이어진다. 여러 선율선이 교차되는 터니지의 극적인 음악은 극의 묘미를 살린다. 붉은색이 난무하는 클라이맥스는 최후에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긴장과 흥분이 극 내내 지속되는 이 작품은 연주를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에게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지만, 동시에 강한 몰입도를 이끈다. 지난해 음악극 ‘죽음의 꽃’ 공연 당시 중간 지점의 좌석 뒤로 앉은 관객에게만 자막이 보이는 문제가 있었던 블랙박스가 이 오페라를 어떻게 준비할지,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이다.

통영의 바다 내음과 함께 즐기는 실내악

통영의 봄을 기다리는 팬들 중 많은 이들이 올해에는 어떤 현악 4중주단이 찾아올지 궁금해할 것이다. 2002년 아마티 현악 4중주단을 시작으로, 휴고볼프 현악 4중주단(2003년)·폴란드 실레지안 현악 4중주단(2004년)·아르디티 현악 4중주단(2005년)·크로노스 현악 4중주단(2007년)·쿠스 현악 4중주단(2011년)·켈러 현악 4중주단(2012년)이 초청을 받았으며 지난해에는 노부스 콰르텟이 상주 음악가로 무대에 올랐다. 올해에는 디오티마 현악 4중주단이 내한해 ‘베토벤과 불레즈: 어떤 실내악의 하드코어’라는 제목으로 불레즈 ‘현악 4중주를 위한 작품 Ⅰ a&b’를 한국 초연하고, 드뷔시 현악 4중주 G단조, 베토벤 현악 4중주 15번 A단조를 들려준다.(4월 1일)

윤이상 서거 20주년과 더불어 올해를 기념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故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타계한 지 1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통영국제음악제의 오랜 후원자였던 고인은 생전에 금호문화재단 이사장·예술의전당 이사장·한국메세나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문화 예술계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손열음(피아노), 권혁주·김재영(바이올린), 이한나(비올라), 김민지·이정란(첼로)이 현악 3중주 B♭장조, 말러 피아노 4중주 A단조, 드보르자크 피아노 5중주 A장조를 연주한다.(4월 4일)

세계로 뻗어가는 TFO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TFO)가 해외 무대에 진출한다. TFO는 2009년 알렉산더 리브라이히 예술감독이 취임 선포식에서 한 약속의 결과로, 페스티벌 출범 10년 만에 탄생한 오케스트라다. TIMF앙상블과 폴란드 방송교향악단·크레메라타 발티카·오사카 필하모닉·NDR 심포니·멜버른 심포니·시드니 심포니 등 각국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이 모여 통영국제음악제에 힘을 실었다.

TFO는 4월 5일 폐막 공연에서 크리스토프 포펜 지휘로 윤이상의 대표 작품인 ‘예악’을 연주한다. 또한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가 협연하는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소프라노 카롤리나 울리히가 협연하는 말러 교향곡 4번 ‘천상의 삶’을 선보인다. 이들은 공연을 마친 후 일본(7일)과 홍콩(9일)으로 건너가 통영의 아름다움을 널리 전한다. 이번 투어 공연이 TFO뿐만 아니라 통영국제음악제를 세계무대에 아로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윤이상 서거 20주년

다시 보는 통영국제음악제

초기의 통영국제음악제는 무엇보다 예술가로서 윤이상을, 또 그의 ‘작품’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생애의 절반을 독일에서 보내고, 발표한 작품의 전부가 독일에서 쓰였기에 한국 작곡가임에도 독일인의 시각에서 그의 작품 세계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당시 ‘동베를린 사건’을 위시한 정치적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그의 예술혼을, 그가 죽기 직전까지 그리워했던 통영에서 되살리기 위한 오랜 움직임은 음악제를 발족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7년에 태어나 40세에 유학길에 오른 윤이상은 유럽에서 작곡한 1958년부터의 작품만을 자신의 작품 목록으로 인정했다. 그는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1969년까지 22곡을, 1981년까지 35곡을 완성했고, 삶의 마지막 14년 동안 60곡을 발표했다. 윤이상의 전체 작품 중 절반 이상이 내적 성찰과 자각으로 성숙한 시기에 창작된 것이다. 1993년 12월 ‘객석’ 커버스토리에서 음악학자 노동은은 윤이상의 예술이 고국의 땅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윤이상의 음악은 서양의 횡적인 화성음악과 달리, 어떤 중심음과 그 음을 장식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음들을 ‘음통일체’로서 다발적으로 움직이는 음악이다. 이는 한반도 민족전통음악의 원리에 뿌리를 두고 현대 서양음악기법으로 표현한 원리이다. (중략) 그는 ‘바리’ ‘광주여 영원히’ ‘나의 땅, 나의 조국’ 등 서양문화권 작품의 제목으로 고국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작품 안에서 한반도 민족음악의 미학적 원리는 제한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한 예술가로서 깊이를 가져다주는 후반기 삶이 서양에서 전개되었고, 전반기 삶이 한반도 전체 민족의 삶과 함께 하지 않았던 결과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그를 ‘찾아야’ 할 이유가 된다.

통영국제음악제는 1999년 ‘윤이상 가곡의 밤’과 2000·2001년의 ‘통영현대음악제’를 모태로 한다. 통영현대음악제의 개막식은 창원시향(지휘 김도기)이 맡아 윤이상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전설 ‘신라’와 교향곡 4번 ‘어둠 속에서 노래하다’를 각각 한국 초연했다. 2002년 제1회 통영국제음악제는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와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 브라이트 성의 비파 협주곡 ‘난징! 난징!’ 등 역사적 사건을 의미 있게 다룬 대곡(大曲)을 다양하게 소개했다. 무엇보다 통영 시민들이 주축이 된 ‘황금파도’ 지원단이 무대 위 악기를 옮기는 일명 ‘세팅 맨’ 역할까지 도맡아 하며 축제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2005년 봄 시즌 축제에 아카데미(7월)와 콩쿠르(11월)를 더해 다음 세대의 ‘윤이상’을 육성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했고, 2006년 음악제에서는 자체 기획 창작물인 음악 ‘로즈’(작곡 최우정)를 선보여 ‘창작’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발을 내딛었다. 2010년에는 ‘윤이상’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음악제’로서 본질에 집중하기 위해 주제를 ‘음악+’라고 정하고 기획의 폭을 넓혔다. 이후 알렉산더 리브라이히가 예술감독으로 취임했고(2011년), 70인 규모의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TFO)가 설립되었으며(2012년), 총 520억 원이 투입된 통영국제음악당이 개관했다.(2013년)

윤이상의 서거 2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통영국제음악제가 ‘여정’을 준비하는 지금, 축제 초기의 다짐을 다시 한 번 되새길 때다. 무엇보다 윤이상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지, 통영 시민들은 주체적으로 페스티벌을 즐기고 있는지, 현대음악제로서 정통성과 기능은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해외 유명 연주자들을 모셔오는 데에만 급급하지는 않은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나의 귀향에 결부하여 나는 아무런 욕심도 기대도 없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나의 동포가 나를 똑바로 이해하고 받아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가 20년 전이나 15년 전만 일찍이 고국에 자유로 갈 수 있었더라도 나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작곡을 가르치고 외국과의 교류나 남북 간의 음악 교류, 그 밖에 나의 오랜 소망은 남도창을 현대화시키는 작업이다. 기악곡들의 새로운 발굴은 더욱 풍부한 가능성과 음악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 따르는 악기 개량도 필요하다. 그러나 나의 희망은 극소수만이 나에게 가능할 것이다. 나는 귀국하면 고국의 흙을 만지게 된다. 그때 흙에 가까이 입을 대고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충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1994년 8월 ‘객석’ 윤이상 특별기고 ‘내가 알고 또 모르는 많은 벗들에게-나의 음악제 개최를 앞두고’에서 발췌)

사진 통영국제음악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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