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뒤카

완벽주의자의 완벽한 음악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3월 1일 12:00 오전

지난 두 달 동안 소개한 시벨리우스와 카를 닐센은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에 이어 역시 같은 해에 태어난 프랑스의 거장 폴 뒤카(1865~1935)를 소개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다. 관현악곡 ‘마법사의 제자’로 유명한 뒤카는 꼼꼼하고 지적인 작곡가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높은 수준의 잣대를 댄 완벽주의자인 탓에 생전에 출판한 작품은 13곡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전통적 형식에 새로운 음악을 담아내 고전주의자와 진보주의자 양쪽 진영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음악가와 평론가 사이에서

파리 태생의 뒤카는 여느 거장처럼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이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피아니스트였지만 뒤카가 다섯 살 때 동생을 낳고 사망했기에 영향을 받을 수 없었고, 이후 피아노 레슨을 받았지만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14세에 진로를 작곡으로 결정했는데 이렇듯 미덥지 못한 상황이 뒤카를 노력파로, 또 완벽주의자로 만드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그는 16세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해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평생 친구로 지낸 드뷔시는 이때 동급생으로 만났다. 뒤카는 학창 시절 많은 곡을 썼지만, 완벽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출판은 고사하고 연주하지도 않았다. 다행히 1883년 작곡한 관현악 ‘베를리힝엔의 괴츠’와 ‘리어 왕’의 악보가 1990년 초에 발견되어 1995년에 초연했다. 1888년에는 칸타타 ‘벨레다’로 로마 대상 2위를 수상했다. 하지만 그는 1등을 하지 못한 것에 크게 실망해 이듬해 음악원을 그만둔다. 그의 2위 수상작인 ‘벨레다’는 공모에 제출한 악보가 남아 있으며, 놀랍게도 음반으로 발매되어 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카는 작곡가로서 마음을 다잡고 1891년 관현악을 위한 서곡 ‘폴리왹트’를 작곡했다. 이 곡은 코르네유의 비극 ‘폴리왹트’를 음악화한 것으로, 뒤카의 첫 출판 작품이다. 이 곡은 친바그너적 성향을 띠는데,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드뷔시가 탈바그너를 내걸고 프랑스 음악의 회복을 선언한 것과 대비된다.

생전에 평론가로서도 유명했던 뒤카가 평론 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즈음인 1892년이다. 말러가 코번트 가든에서 지휘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리뷰가 주간 리뷰지에 실린 후 미네르바·예술시평·예술신문·음악통신 등에 기고했다.


▲ 당시 예술가들과 함께 한 폴 뒤카(사진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Ernest Bloch

교향곡 C장조의 탄생

다음 작품은 5년 뒤인 1896년에 완성한 교향곡 C장조다. 이 곡은 작곡가로서 뒤카의 명성을 드높였다. 폴 뒤카 연구가인 어빙 슈베르케는 이 곡에 대해 “고전 형식에서 모더니즘을 화려하게 표현했다. 어떠한 프랑스 작곡가도 이렇게 위대한 교향곡을 작곡하지 못했다”며 극찬했다. 하지만 초연은 그리 좋은 평을 얻지 못했다. 훗날 초연에 바이올린 연주자로 참여한 데지레 에밀 잉겔브레히트는 “일부 연주자들이 이 곡을 싫어했다”고 말했는데, 일부러 연주를 잘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세 악장으로 구성되어 프랑크의 교향곡 D장조를 연상시키지만, 베토벤의 고전적인 특성과 드뷔시의 환상적인 화성이 결합된 그만의 독창적 음색이 잘 드러나 있다.

뒤카의 대표작 관현악을 위한 스케르초 ‘마법사의 제자’는 바로 다음 해인 1897년에 완성했다. 동명의 괴테의 시를 앙리 블라즈가 번역한 글을 바탕으로 만든 음악으로, 악보에 글이 병기되어 있을 정도로 줄거리를 충실히 따른 프로그램 음악이다. 사실 이 경쾌한 작품이 극히 진지한 뒤카를 대표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 곡이 뒤카의 다른 모든 작품을 가렸고, 괴테의 시도 어느 정도 가렸다는 ‘계간음악’의 평은 일리가 있다.

이 곡이 특히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월트 디즈니사가 1940년에 이 음악을 배경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 큰 인기를 끌면서부터다. 1999년 속편으로 제작한 ‘판타지아 2000’에도 ‘마법사의 제자’가 유일하게 다시 수록되었다. 하지만 2011년 그로브 음악사전은 계간음악이 그랬듯이 “판타지아가 뒤카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방해한다”며 비판했다.

뒤카는 이 곡이 희극적이라는 점에서 ‘교향시’ 대신 ‘스케르초’라는 무게감이 적은 부제를 달았다. 하지만 그가 사용한 작곡 기법은 결코 가볍지 않다. 구조가 탄탄할 뿐 아니라, 드뷔시의 영향을 받은 환상적 화음이 마법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형식과 내용의 조화에서 뒤카의 천부적 재능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드뷔시는 이 곡에 감탄해 자신의 발레곡 ‘유희’(1912)의 첫 부분을 ‘마법사의 제자’의 인용 수준으로 유사하게 만들었다.

피아노 소나타 E♭단조

20세기가 되어 뒤카가 처음 출판한 작품은 피아노 소나타 E♭단조(1899~1900)다. 네 악장으로 40분 정도의 거대한 규모와 교향곡에 필적하는 엄격한 고전적 구성, 뛰어난 기교 등 뒤카의 모든 완벽함으로 치장되어 있다. 그는 존경해 마지않던 생상스에게 이 최고의 작품을 헌정했다.

뒤카가 소나타 작곡을 결심하게 된 것은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를 연구하면서부터다.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스케일과 격동하는 1악장과 4악장, 순수하고 심플한 2악장의 선율, 3악장의 푸가 등의 특징이 뒤카의 소나타에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평론가 에드워드 록스파이저는 “베토벤을 프랑크의 마인드로 해석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이 밖에도 슈베르케는 “베르사유 궁전의 영광스러운 계단의 위엄에 비견된다. 이 장르의 어떤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다”며 극찬했고, 평론가 피에르 랍은 이 곡의 초연을 두고 “프랑스 음악사의 중대한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오늘날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

교향곡 C장조와 ‘마법사의 제자’가 관현악곡으로서 쌍을 이룬다면, ‘피아노 소나타’와 쌍을 이루는 피아노곡으로 ‘라모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간주곡, 그리고 종곡’(1899~1902)이 있다. 뒤카는 생상스와 함께 라모의 음악을 발굴하고 편집하는 일을 한 적이 있었기에 라모에 대해 누구보다 애정이 많았다. 이 곡은 라모의 ‘르 라르동’(Le lardon)과 11개의 변주, 그리고 간주곡과 종곡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작품으로, 고전 형식에 새로운 음악을 담아내는 뒤카의 마법 같은 능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오페라 ‘아리안과 푸른 수염’

뒤카는 오페라 작업을 여럿 진행했지만, 세 번째 시도인 ‘아리안과 푸른 수염’(1907)만이 유일한 완성작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 오페라 역사에 길이 남을 이 걸작에 대해 메시앙은 “위대한 오페라이자 매우 놀라운 작품”이라고 평했다.

원작자 모리스 메테를렝크는 이 작품의 오페라를 의뢰한 그리그로부터 거절당하자, 1899년 뒤카에게 의뢰했다. 뒤카는 자신의 친구 드뷔시가 메테를렝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오페라로 작곡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곧바로 수락했다. 그리고 약 7년의 작업 기간을 거쳐 1907년 완성했다.


▲ 뒤카의 오페라 ‘아리안과 푸른 수염’ 장면 ⓒOpera-lyon

뒤카는 ‘아리안과 푸른 수염’이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와 비견되기를 바랐다. 드뷔시와 친구였을 뿐 아니라, 모두 메테를렝크의 대본을 사용해 비슷한 시기에 작곡했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안과 푸른 수염’에서 멜리장드가 등장할 때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에서 멜리장드의 주제 세 마디를 인용한 것도 그러한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1907년 5월 파리에서 초연했을 때 뜻밖에도 R. 슈트라우스의 ‘살로메’와 비교되었다. 비슷한 시기 파리에서 연주된 데다, 여주인공이 극을 이끌어가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결국 자극적인 ‘살로메’의 인기에 ‘아리안과 푸른 수염’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들이 높이 칭송하고, 토머스 비첨이 “우리 시대 최고의 서정적 드라마 중 하나”라고 극찬했지만, 1937년 비첨의 코번트 가든 공연 이후 이 오페라는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1940년대 후반 뉴욕에서 토스카니니가 3년 동안이나 관현악 모음곡을 연주했음에도 오페라 무대로 부활을 이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고, 2011년 리세우 극장 공연이 영상물로 발매되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곡은 푸른 수염의 다섯 아내들이 수년간 갇혀 있다 아리안의 도움으로 구출됨에도 푸른 수염의 곁을 떠나지 않는, 비이성적이고 섬뜩한 결말을 맺는다. 하지만 온갖 구속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심지어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현재에 안주하려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발레음악 ‘요정’

무대 작품으로서 ‘아리안과 푸른 수염’과 쌍을 이루는 곡이 있는데, 1912년 작곡한 발레음악 ‘요정’이다. 뒤카의 마지막 대작인 이 곡은 낭만 시대의 화음과 인상주의의 관현악 기법이 완숙한 조화를 이룬다. 본래 20분 분량의 단일곡이었는데, 공연 시작 후 들어오는 관객이 자리를 찾느라 소란스러워 조용히 시작하는 첫 부분을 들을 수 없을 것을 우려해 초연 직전에 2분 길이의 팡파르가 추가되었다.

이 곡은 본래 러시아 발레단의 디아길레프가 의뢰한 작품이지만, 그는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지 않았다. 뒤카가 요정 역으로 추천한 나탈리아 트루하노바가 실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고, 타국에서도 공연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트루하노바는 새로운 멤버와 함께 직접 제작해 작곡한 해에 샤틀레 극장에서 초연했다.

뒤카는 본 편에 ‘춤의 시’라는 독창적 부제를 붙였다. 그런데 드뷔시도 1년 후 작곡한 ‘유희’에 같은 부제를 붙였다. ‘유희’가 ‘마법사의 제자’로부터도 영향을 받은 것을 보면, 이 곡을 뒤카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이후 뒤카는 여러 작품을 진행했지만 출판한 작품은 드뷔시의 죽음을 추모하는 피아노곡 ‘멀리서 들려오는 목신의 탄식’(1920) 등 소품 세 곡과 시인 피에르 드 롱사르 탄생 400주년을 기념한 가곡 ‘사랑’(1924)이 전부다. 동년배인 시벨리우스가 교향시 ‘타피올라’(1926) 이후 작은 피아노곡과 오르간곡 두 곡을 쓴 것이 전부라는 사실과 닮았다.


▲ 뒤카의 음악적인 고향, 파리 풍경

그가 이렇게 작곡을 뒤로하고 몰두한 분야는 교육이었다. 1910년 2년간 파리 음악원의 관현악 교수로 있었으며, 1927년 샤를-마리 비도르의 후임으로 파리 음악원의 작곡 교수가 되자 그 직을 유지했다.

뒤카는 이곳에서 차베스·뒤뤼플레·메시앙·퐁스·로드리고·셴싱하이 등 뛰어난 작곡가를 길러냈다.

그는 제자들에게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음악을 써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고 당부했으며, 특히 “작은 새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그들은 거장이다”라고 말해 메시앙에게 큰 영감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메시앙의 출세작 전주곡집(1928~1929)이 출판될 수 있었던 것도 뒤카 덕분이다. 하지만 뒤카는 교수직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1935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직전에 남은 악보를 모두 폐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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