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순간이 있다. 기쁘고 감동적이고, 때론 어려웠던 세월. 그 모든 계절을 보내온 그녀를 다시 만날 시간이다.
한없이 길게 이어진 추위의 끝, 그리고 마침내 만난 봄. 소프라노 홍혜경과의 만남도 그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해부터 기다려온 만남이기에 진심 어린 반가움이 더 컸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그녀의 입국 소식을 듣고는 한달음에 연세대학교로 향했다.
2014/2015 시즌, 홍혜경에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들의 축하와 응원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1984년 ‘티토왕의 자비’ 세르빌리아 역으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해 한결같이 빛난 그녀에게 ‘메트 오페라 데뷔 30주년’이라는 타이틀은 한국뿐 아니라 뉴욕에서도 큰 이슈 중 하나였다. 비슷한 시기에 이름을 알린 성악가 중 현재진행형으로 메트 무대에 오르는 여성 성악가는 홍혜경이 유일하거니와, 특유의 건강한 목소리로 무대마다 신선한 감동을 안겨주는 비결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기도 했다.
리리코 레제로 소프라노로 출발한 그녀는 1980년대에 ‘라 보엠’의 미미, ‘사랑의 묘약’의 아디나, ‘리골레토’의 질다로 찬사를 받으며 커리어를 쌓았고 1990년대 중반 이후 ‘투란도트’의 류,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부인까지 영역을 확장하며 정통 리리코 소프라노로 인정받아왔다. 350회가 넘는 무대에서 40개 이상의 배역을 소화해온 홍혜경이 오늘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자신의 목소리에 맞는 작품을 택하고, 목소리가 무르익어 배역과 한 몸을 이룰 때까지 기다렸기 때문이다. 2004년에야 택한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가 현재 그녀를 대표하는 배역이 된 것만 보아도 홍혜경의 시간은 분명 여느 가수와 다르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 보엠’의 미미나 ‘투란도트’의 류도 그렇거니와 특히 마농이나 줄리엣은 극 중 10대 소녀임에도, 홍혜경은 50대의 열정과 끊임없는 관리를 통해 흔들리지 않는 신선한 목소리를 선보이며 해외 극장 관계자와 평단, 관객 모두에게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다.
한국 관객에겐 ‘홍혜경=메트 오페라 전속 가수’라는 인식이 많다. 실제로 메트를 비롯해 대부분의 해외 오페라극장은 매 시즌 레퍼토리별로 주역 가수와 계약을 맺는다. 그녀도 매번 메트 오페라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입장인 것은 물론이다. 매일의 무대가 시험대이자 평가 대상인 지난 세월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테다. 그 시간들 속에서 홍혜경은 더욱 ‘수양(discipline)’에 집중했고, 진정한 디바로서 귀감이 되어왔다.
‘메트의 디바’ 홍혜경의 오페라를 국내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제6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참가작인 무악오페라의 ‘피가로의 결혼’(5월 8일~10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이 바로 그것이다. 백작부인 역을 맡은 홍혜경이 국내 오페라 무대에 서는 건 10년 만이다. 이번 공연은 지난 시즌 그녀와 함께 메트에서 ‘카르멘’을 작업한 폴라 윌리엄스가 연출을 맡아 여성 연출가 특유의 섬세한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그간 ‘피가로의 결혼’을 통해 느낀 여인의 인생을 관객과 함께 공감하고 싶다는 소프라노 홍혜경의 목소리를 전한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은 대중적인 작품이지만, 오페라 가수로선 결코 쉽지 않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10년 만에 서는 국내 오페라 무대의 작품으로 ‘피가로의 결혼’을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피가로의 결혼’은 모차르트의 훌륭한 오페라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는 작품이에요. 한때 오페라에선 노래만 잘하면 된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오페라의 드라마적 요소와 음악이 조화를 이뤄야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미국 오페라 시장에서도 점점 더 연기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요. 매년 지휘자 제임스 러바인은 메트 오페라에서 드라마적 요소가 강한 모차르트의 작품 한두 개를 무대에 꼭 올리곤 하죠. 저 역시 모차르트 오페라를 통해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어요. 희극을 연기하는 것이 오페라세리아처럼 슬프고 비극적인 내용을 연기하는 것보다 힘듭니다. 오페라부파의 장을 연 ‘피가로의 결혼’은 정말 많은 공부가 필요해요. 이 작품은 연극에 더 가깝기에 음악뿐 아니라 드라마에 중점을 두고 연기하는 가수들이 끊임없이 공부해야 자연스러운 오페라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모든 캐릭터가 제 역할을 잘해내야 하는 작품이라 호흡이 정말 중요하죠. 모차르트의 작품은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오페라의 극적 요소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입장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메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 바르바리나, 수잔나를 거쳐 백작부인까지 모든 역을 연기했습니다. 세 캐릭터 사이에 시간의 변화가 느껴지지만, 무엇보다 백작부인 역은 인생의 흐름을 특별하게 바라보게 하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백작부인을 통해 한 여인의 인생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 전에는 순수한 사랑을 찾는 로지나였고, 결국 사랑을 찾아 결혼했지만 결혼하는 하녀의 초야권을 주장하는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죠. 하지만 백작부인 스스로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를 용서하고 한 단계 성장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다시 순수한 여인으로 돌아가는 백작부인은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아온 매력적인 캐릭터죠. 복잡한 관계와 갈등이 있지만 결국 서로 용서하고 사랑을 되찾아 성장하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또 해피엔딩이어서 좋고요.
지금까지 서온 ‘피가로의 결혼’ 무대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덕션을 꼽는다면요.
이 작품은 인물의 관계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특히 많은 앙상블 연습이 필요해요.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공연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공연 이틀 전에 도착해 의상을 피팅하고, 무대 동선을 확인하고, 그다음 날 지휘자를 만나 음악을 맞추고 바로 무대에 선 스릴 넘치는 공연이었어요. 그런데도 정말 호흡이 잘 맞았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콘셉트가 뚜렷하고 각자의 아이디어가 잘 통해서, 마치 호흡이 잘 맞는 테니스 선수 같은 프로덕션이었다고 할까요. 제겐 정말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존중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성악가이자 교육자로서 주위 사람들과 소통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제 자신이 ‘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성대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 몸을 건강하게 돌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건강한 삶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기에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해요. 더불어 목소리만 좋다고 훌륭한 오페라 가수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많은 요소를 조화롭게 아우를 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죠. 캐릭터에 몰입해 몸동작 하나하나는 물론 연기와 대사, 노래가 모두 완벽해야 하고, 또 모든 출연진이 함께 호흡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 ‘객석’과의 인터뷰에서 “수십 년을 메트 무대에 설 수 있는 힘은 ‘수양(discipline)’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수양’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저는 노래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항상 ‘신께서 왜 내게 이러한 재능을 주셨을까’ 되묻곤 합니다. 제가 받은 재능을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아끼고 다듬어서 잘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능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제 삶의 철학이죠. 성대는 무척 민감한 부분이고, 그래서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사람을 그동안 많이 봐왔어요. 목을 상하게 하는 젊은 성악가를 보면 안타깝고 무척 슬펐죠. 한번 소리를 잃으면 다시 찾기 어려우니까요. 늘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모든 상황에 더욱 주의하게 됩니다. 이젠 학생들에게 목소리를 아끼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어요. 무대에서는 소리를 사용하는 법만 가르치기 때문에, 목소리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걸 가르쳐주는 사람이 많지 않거든요.
오페라와 콘서트 무대에 꾸준히 서왔습니다. 무대의 조건이나 가수의 컨디션이 완전히 다르게 적용되는 각각의 무대 중 어느 쪽을 선호하는지 궁금합니다.
오페라 무대를 더 좋아해요. 콘서트는 짧은 시간에 명곡을 부르면 끝나지만 오페라는 오랜 시간 작업해야 하죠. 오페라에서 맡은 캐릭터를 처음부터 끝까지 연구하면서 발전시키는게 재미있어요. 또 오페라 무대에선 홍혜경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제겐 무척 즐거운 일입니다.
예전엔 여가 시간에 수영과 스키를 즐기고, 영화 관람도 자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엔 어떤가요.
공연과 가르치는 일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생각해보니 수영은 안 한 지 오래됐네요. 요즘은 여가 시간을 주로 제 강아지 루시와 함께 보내요. 하루 종일 키스하면서 뛰어다니는 열정 넘치는 강아지예요. 한국에 올 때도 데려오고 싶지만 비행기를 엄청 무서워해서 같이 다니진 못해요. 노래하는 사람에게 알레르기는 정말 위험해서 대체로 동물을 키우는 일이 쉽지는 않아요. 저 역시 여러 알레르기가 있지만, 다행히 강아지 알레르기는 없답니다.
음악가는 예술의 본질 그 자체를 추구하는 동시에, 예술로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죠. 오늘의 세계에서 음악가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탁월한 연주와 노래는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도구가 될 수 있어요. 언어를 초월해 음악은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해주죠. 힘들고 우울한 마음도 음악으로 치유할 수 있어요. 매일 반복되는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공연을 통해 아름다운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 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과 돈을 들여 공연장을 찾는 관객에게 최선을 다해 음악으로 좋은 선물을 할 때 저도 행복을 느껴요. 하지만 저 역시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에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관객들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인터뷰 말미, 홍혜경에게 반갑고 놀라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2016년 여름, 그동안 단 한 번도 서지 않은,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 무대에 오른다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처음 데뷔한 이후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무조건적 요청을 받았을 때나, 몇 해 전 메트가 그녀에게 러브콜을 보냈을 때도 거절한 작품이 ‘나비 부인’이다. 그럼에도 과거 여러 인터뷰들을 통해 목소리가 적합해지면 언젠가 나비 부인 역을 맡고 싶다고 밝힌 그녀의 바람에 가까워진 것이기에, 이제 홍혜경이 우리에게 보여줄 새로운 계절을 기다리고 기대해본다.
사진 심규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