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COMPOSER OF THE MONTH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4월 1일 12:00 오전

러시안 로맨틱 마에스트로

1865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

1880 발라키레프의 권유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제자가 됨

1885 글린카상 수상

1889 파리 만국박람회 리스트 교향곡 2번 지휘

1896 러시아 심포니 콘서트에서 초연한

차이콥스키 ‘폭풍 서곡’ 지휘

1899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교수 임명

1928 혁명 후 파리로 이주

1936 71세로 사망

유명한 클래식 음악 작곡가 중에는 그들이 생존할 당시의 관점에서 아방가르드적 인물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대중에게 새롭고 낯선 것으로 충격을 주었다. 찬사를 받을 때도 있었지만, 심한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의 세상은 아방가르드만이 이끌어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것을 다듬고 발전시킨 주류의 거장들이 시대의 기둥으로 존경을 받았다. 지난달의 주인공 폴 뒤카가 그런 존재였으며, 지금 소개하는 글라주노프 역시 그러하다.

작곡가로서의 출발

시벨리우스·카를 닐센·폴 뒤카와 함께 탄생 150주년을 맞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1865~1936)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출판업자였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여서 안락한 음악 환경에서 자랐다. 9세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11세부터 작곡을 하면서 그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가 14세 때 아들을 자신의 스승인 발라키레프에게 소개했다. 발라키레프는 글라주노프를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소개했고,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그를 보자마자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는 글라주노프에 대해 “하루하루가 아니라, 말 그대로 매 시간 실력이 향상되고 있다”고 감탄했고, 1년 반 만에 레슨을 종료했다.

어린 시절의 일화 중 글라주노프의 또 다른 능력인 기억력에 관한 것이 있다. 그는 놀랍게도 한번 들은 것은 모두 기억했다. 글라주노프가 어릴 때, 세르게이 타네예프가 사적인 모임에서 자신의 교향곡을 피아노로 연주한 적이 있었다. 글라주노프는 세르게이 타네예프의 연주를 다른 방에서 듣고 있다가 한 지인의 손에 이끌려 나왔다. “이 소년도 새로운 교향곡을 썼답니다.” 그리고 세르게이 타네예프가 방금 연주한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연주했다! 이 놀라운 기억력은 평생 지속되었다. 보로딘이 미완으로 남긴 오페라 ‘이고르 왕자’의 서곡은 글라주노프가 보로딘의 딱 한 번의 피아노 시연을 기억해 복원한 것이다.

글라주노프는 불과 16세 때인 1882년, 발라키레프가 그의 교향곡 1번을 초연하면서 대외적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의 민속적 요소가 강한 이 곡은 차이콥스키로부터 격찬을 받았고, 평론가인 블라디미르 스타소프는 그를 ‘젊은 삼손’이라고 치켜세웠다.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이날을 ‘진정 대단한 사건’이라고 술회했다.

이 연주회에 중요한 인물이 참석했다. 목재사업가이자 자선사업가이며 음악 출판업자인 알렉산드르 벨랴예프였다. 글라주노프는 곧바로 림스키 코르사코프·아나톨리 리아도프·세르게이 타네예프 등이 멤버로 있던 ‘벨랴예프 서클’의 일원이 되었고, 벨랴예프는 글라주노프를 전폭적으로 후원했다. 1884년 리스트에게 글라주노프를 직접 소개하고 바이마르에서 글라주노프의 교향곡 1번을 연주하도록 주선했으며, 그해에 홀을 빌려 글라주노프의 연주회를 열어주었다. 다음 시즌에서도 글라주노프의 곡을 무대에 올릴 수 있도록 지원했다. 1885년에는 라이프치히에 있는 자신의 출판사 ‘M.P. Belaieff’에서 악보를 출판해주었고, 벨랴예프가 조직한 글린카상의 1885년 수상자로 글라주노프를 선정했다.


▲ 글라주노프가 리스트 교향곡 2번을 지휘한 파리 만국박람회

지휘자로서의 평가

글라주노프가 지휘자로 데뷔한 것은 이즈음인 1888년이다. 1889년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리스트의 추억을 기리는 교향곡 2번을 지휘했으며, 1896년에는 벨랴예프가 주최한 러시아 심포니 콘서트의 지휘자가 되었다. 차이콥스키의 학생 시절 작품인 ‘폭풍’을 초연하는 영예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지휘는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글라주노프 지휘의 피해자(?) 중에는 라흐마니노프가 있었다. 라흐마니노프의 부인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1897년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1번 초연이 혹평을 받은 이유는 글라주노프가 술에 취해 대충 지휘했기 때문이다! 정말 술에 취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리허설이 충분치 못했고, 작품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사실 글라주노프에게 술은 곧 삶을 의미했다. 글라주노프는 음악원에서 수업을 할 때 책상에 걸터앉아 몸을 수시로 기울였는데, 책상에 숨겨둔 술을 마시기 위해서였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금주령이 내려졌을 때는 표준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쇼스타코비치의 아버지를 찾아가 ‘목숨 걸고’ 술을 몰래 얻어 마시곤 했다.

국민악파에서 신고전주의로

1899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글라주노프의 음악은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국민악파의 향취는 점차 사라지고, 대신 차이콥스키의 세련된 낭만과 브람스의 형식미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러시아 국민악파와 서구파를 통합한 러시아 아카데미즘’이라 정리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향은 그다지 미래적이지는 못한데, 훗날 후배 작곡가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중 한 사람이 프로코피예프다. 훗날 그는 파리에서 프로코피예프의 ‘스키타이 모음곡’ 연주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초연 때 팀파니 가죽이 찢어질 정도로 시끌벅적한 곡이었다. 그런데 글라주노프는 3악장 연주 중 연주회장 밖으로 나갔다! 이 사건은 신세대의 등장과 구시대의 퇴장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을 더욱 주목받게 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이렇게 정리했다. 큰 소리가 청력에 좋지 않을 것 같아 나간 것뿐이라고.

그래서 글라주노프는 고집불통의 구시대적 인물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사실 이해할 때까지 노력하는 노력파이자 열린 인물이었다. 그는 바그너의 ‘발퀴레’를 이해할 때까지 반복해 들었으며, 열 번째가 되어서야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R.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도 같은 과정을 거쳤고, 이후 R. 슈트라우스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 글라주노프가 교수로 재직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혼란 속 평온

1905년 러시아에서는 황제의 강압적 독재 정치에 항거해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국민들은 군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살육당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학생 역시 시위에 참여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학생들이 시위할 권리를 옹호했고, 바로 해고되었다. 글라주노프도 그를 따라 사임했다. 하지만 12월에 오히려 글라주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글라주노프는 림스키 코르사코프를 음악원에 복귀시켰다.

글라주노프는 1930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원장을 역임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수많은 숙청이 자행되는 현장에서 놀랍게도 그는 끄떡없었고, 1922년에는 인민 예술가의 칭호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는 1928년 빈에서 열린 슈베르트 사망 100주년 기념행사와 관련해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참석하기 위해 떠난 뒤 귀국하지 않았다. 건강상의 이유였다(어쩌면 유럽에서는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많은 유명 인사가 서구로 망명하는 가운데 옛 소련은 단지 ‘건강이 좋지 않은’ 그를 숙청하지 않았고, 음악원은 인민 예술가의 귀환을 마냥 기다렸다.

글라주노프는 파리 근교에 정착해 유럽과 미국을 투어하는 등 바쁜 말년을 보냈다. 그리고 1929년에 64세의 나이로 뒤늦은 결혼도 했다. 부인은 1년 전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한 율리야 가브릴로바의 어머니였으며, 글라주노프는 율리야를 양녀로 삼았다. 1936년 유럽 땅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1972년 그의 유해가 레닌그라드 티흐빈 공동묘지로 이장되면서 다시 러시아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글라주노프와 후배들

글라주노프에 대한 이야기의 중요한 원천은 바로 쇼스타코비치의 구술집인 ‘증언’이다. 이 책에서 글라주노프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존경심이 여실히 드러난다. “나도 글라주노프의 제자라고 주장할 자격이 있다”, “글라주노프로부터 많은 핵심적인 것을 배웠다”라고 말하며 그와의 관계가 돈독했음을 계속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에게 존경받은 것은 아니었다. 스트라빈스키는 글라주노프의 교향곡, 특히 8번을 모델로 교향곡 E♭장조를 작곡할 정도로 글라주노프를 존경했다. 하지만 글라주노프는 스트라빈스키의 교향곡에 대해 “관현악이 너무 무겁다”고 말했고, ‘불꽃놀이’에 대해서는 “재능이 없다”, ‘페트루슈카’에 대해서는 “음악이 아니다” 등 매번 혹평했다. 이에 스트라빈스키에게 글라주노프는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스트라빈스키가 80세 생일을 기념해 옛 소련을 방문했을 때,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걸린 글라주노프의 사진을 보고 신경질적으로 “글라주노프!”라고 말했다고 하니, 트라우마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 글라주노프와 돈독한 관계였던 쇼스타코비치

러시아의 생상스

글라주노프는 풍부하면서도 투명한 사운드를 갖춘 관현악곡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영향을 받아 화려하고 색채감 넘치는 관현악을 구사했으며, 보로딘의 민족음악적 감각의 영향도 상당했다. 초기 곡인 ‘오리엔탈 랩소디’의 경우, 전체적으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셰에라자드’를 인용하고 있으며, 보로딘의 ‘폴로브치안 댄스’와 교향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의 변형된 단편이 끊임없이 들린다.

교향시 ‘숲’ ‘바다’ 봄’ 등에서는 유러피언 감성이 물씬 풍기지만, 점차 차이콥스키의 낭만적 표현과 브람스의 독일 고전주의의 영향이 짙어졌다. 대위법의 대가인 타네예프의 영향도 받아서 이론적으로 탄탄했다. 이쯤 되면 글라주노프를 러시아 클래식 음악의 완성이라고 봐도 과장이 아닐 듯싶다. 여기에 20세기 모더니즘을 거부하는 경향까지 더하면, ‘러시아의 생상스’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특히 아홉 개의 교향곡은 기념비적 결과물이다. 교향곡 4번까지는 국민악파의 영향권에 있지만, 5번에서는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며, 교향곡 6번부터는 독일적인 절대음악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곡은 교향곡 2번이다. 음악 전반에 감지되는 젊은이의 당돌한 도발 때문이다. 특히 1악장의 감상적 2주제는 교향곡 3번과 교향곡 4번, ‘오리엔탈 랩소디’, ‘사계’ 중 ‘봄’에도 변형된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그만큼 글라주노프에게도 애착이 가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9번은 1악장 스케치만 남겨졌다. 이후 26년이나 더 살았지만 이 곡을 완성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9번 징크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래도 글라주노프의 가장 유명한 곡은 바로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글라주노프의 고도의 작곡 기술이 녹아든 완벽한 작품으로, 러시아 최고의 낭만 협주곡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라주노프는 이 곡을 쓰기 위해 직접 바이올린을 배울 정도로 상당한 노력을 쏟았다.

글라주노프의 작품 중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발레곡이다. 글라주노프의 발레곡은 단 세 곡뿐이지만, ‘라이몬다’는 오늘날에도 연주되는 레퍼토리다. ‘사계’는 오늘날 그다지 발레로 공연되지는 않지만, 글라주노프의 가장 많이 녹음된 곡 중 하나다. 다양한 악상과 풍부한 관현악 사운드로 커다란 매력을 지닌 곡이다.

이외에도 일곱 개의 현악 4중주를 비롯한 실내악과 성악곡과 합창곡, 피아노곡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작곡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오페라는 한 곡도 남기지 않았다.

글라주노프가 사석에서 보로딘의 오페라 ‘이고르 왕자’의 3막이 사실은 자신이 작품이라고 폭로(!)했다고 하니, 글라주노프의 오페라가 궁금하다면 보로딘의 이 곡을 들어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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