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보가 필름이 되는 시대

송현민의 CULTURE CODE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5월 1일 12:00 오전

영상으로 음악을 접할 때, 우리는 다만 듣기만 해야 할까?

미장센 | 연극과 영화 등에서 연출가가 무대 위의 모든 시각적 요소를 배열하는 작업

베토벤 교향곡 전곡 실황이 담긴 블루레이 중 첫 번째 영상물을 재생한다. 옆에는 동갑내기 영화평론가가 있다. 각자의 직업 정신을 열심히 발휘해 음악평론가는 열심히 듣고, 영화평론가는 보이는 것에 집중하며 미장센에 눈길을 두었다. 그러던 중 영화평론가는 말했다.

“베토벤의 시대에는 영화는 물론 사진 기술도 없었을 텐데. 정말이지, 베토벤은 자신의 교향곡이 언젠가 영상에 담길 것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작곡한 것 같아.”

그의 말인즉, 베토벤의 음악에는 영화에 대한 감수성이 배어 있다는 것이다.

카메라의 시선과 관객의 귀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교향곡 전곡 실황 블루레이(RCO Live RCO14109). 이 영상에서는 1987년부터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객원 지휘를 맡고 있는 이반 피셰르가 지휘봉을 잡았다.

2013년 5월 11일에 연주한 베토벤의 교향곡 1·2번을 시작으로 3번 ‘에로이카’(2013년 5월 31일)를 첫 번째 블루레이에, 4번(2013년 5월 31일)과 5번(2013년 5월 11일), 6번 ‘전원’(2014년 1월 9~10일)을 두 번째 블루레이에, 7번(2014년 1월 9~10일)과 8번, 그리고 9번 ‘합창’(2014년 2월 20~21일)을 세 번째 블루레이에 담았다. 이 모든 연주는 당연히 콘세르트헤바우에서 이뤄졌다.

대화하는 내내 음악평론가는 공연장을 ‘음악회장’이라 했고, 영화평론가는 영화(영상)를 위한 ‘세트’라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베토벤, 피셰르,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보다는 ‘공연 영상’에 대해 말하는 시간이 길었다. 말하자면, 스펙터클의 이미지-라이브. 마셜 맥클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처럼 영화평론가와 음악평론가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이 영상과 베토벤 교향곡을 어떻게 엮어내 ‘메시지화’하는지 논했다.

현재 클래식 음악계에는 음반 못지않게 많은 영상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것을 소비하는 세대를 간단히 나눠보면 ‘책-읽기’로 일찍이 클래식 음악을 수용한 세대가 있었다. 다음 세대는 공연·음반으로 음악을 체득했고, 지금은 ‘영상-보기’로 클래식 음악을 수용하는 세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 중 오페라 마니아의 경우, 해외 오페라극장의 영상물을 통해 작품을 감상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우스갯소리지만, 언젠가 오페라 실연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오페라 마니아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한때 애호가들은 공연 영상물을 두고 공연의 부차적 산물이나 기록물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초보자에게는 영상이 실황보다 와 닿는 콘텐츠가 된다.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할지 확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공연장 안에서 무대의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고민할 때, 영상 속 카메라는 그 순간 중요한 것-인물이든, 소품과 장식이든-을 집중적으로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독자의 책 읽는 방식에 따라 편집 방법도 바뀌어왔듯, 오늘날 클래식 음악을 영상으로 보는 관객의 눈이 달라지면서 영상물을 제작하는 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예를 들어, 유튜브를 보면 1944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지휘하는 영상이 있는데, 초반부 카메라는 오직 슈트라우스만 비춘다. 그 앞에 빈 필하모닉이 연주를 하고 있는지조차 의문스러울 정도다. 한 방향으로 고정된 시선(카메라)에 의해 지휘자도 고정되어 있다. 카메라는 연주가 시작된 지 몇 분이 흐르고 나서야 전체 숏을 잡는다. 그제야 눈 앞에 오케스트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생산하는 영상물에는 두 개의 시선이 겹쳐 있다. 이 시선을 ‘해석’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지휘자의 ‘해석’과 영상감독의 ‘해석’이다. 이반 피셰르/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영상물에서 지휘자와 단원들은 무대의 연주자인 동시에 카메라 앞에 선 배우가 된다. 하지만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배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휘자가 악보 속 무생물의 음표를 소리의 입방체로 만들듯,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연주자들을 배우처럼 만드는 촬영과 편집이 있고, 지휘자가 스코어를 해석하듯, 영상감독의 성찰과 사유가 반영된 장면이 만들어진다. 말하자면 오늘날 생산되는 영상물은 두 개의 해석-지휘자와 영상감독-사이의 긴장을 통해 만들어지는 지각과 판단 사이의 대위법적 관계인 것이다.

지휘자의 해석과 영상감독의 해석

본격적으로 이반 피셰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영상물 이야기를 해보자. 영상의 주인공은 당연히 피셰르다. 하지만 피셰르가 있는 미장센을 연출하는 지휘자는 숨어 있다. 그는 이 영상물의 촬영부터 편집을 진두지휘하는 딕 카위스다.

그가 운영하는 ‘Castus’는 클래식 음악과 재즈의 영상을 제작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딕 카위스는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는 물론 네덜란드 클래식 라디오 채널인 AVRO, 네덜란드 공영방송 등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네덜란드 태생으로 연출가·프로듀서인 그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암스테르담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로테르담 음악원에서 작곡과 재즈를, 힐베르쉼 미디어 아카데미에서 영상 연출을 공부했다.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가 낸 말러 교향곡 전곡(RCO Live RCO 12102)도 그가 진두지휘했다.

그가 운영하는 폴리캐스트(www.polycast.nl)에 게시된 ‘The New Inhouse TV Studio’라는 영상을 보면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영상에는 오래된 코린트 양식 기둥에 첨단 HD 무인 카메라를 설치하는 과정, 음악에 맞춰 신이 바뀌는 동안 무대만큼 분주하게 돌아가는 영상통제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들이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실황에서 사용하는 카메라는 총 여섯 대. 콘세르트헤바우의 건축·공간적 생리를 파악한 뒤 결정한 개수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카메라는 무대와 관객을 구석구석 훑는다. 따라서 콘세르트헤바우에는 오케스트라 외에도 음악을 잘 아는 영상감독이 상주하는 셈이다. 오케스트라 상주 홀이 있다는 것도 부러운데, 동시에 홀의 공간성을 정확히 파악하는 영상감독이 있다는 건 두 번 부러운 일이다!

이반 피셰르는 2008년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교향곡 7번(Channel Classic CCSSA25207), 2010년 교향곡 4·6번(Channel Classic CCSSA30710)을 녹음한 바 있다. 이 음반을 듣다 딕 카위스가 연출한 영상물을 보면, ‘들리는 음악’과 ‘보이는 음악’ 사이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피셰르를 만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베토벤 교향곡 2번 3악장에서 크레셴도로 진행될 때, 카메라는 피셰르의 표정을 점점 클로즈업하는데, 이것은 이어질 포르테의 긴장감을 돋보이게 한다(33:55~34:09). 카메라 워킹도 교향곡과 악장마다 남다르다. 빠른 템포의 악장에서는 클로즈업과 같은 효과를 주지 않고, 프레임을 고정한 상태에서 빠르게 전환한다. 각 장면은 빠르게 서로를 밀어내며 음악의 긴박함을 연출한다. 특히 교향곡 4번 4악장의 화면은 팀파니 소리에 맞춰 빠르게 이동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부드러운 아티큘레이션으로 되어 있는 아다지오나 안단테 악장에선 카메라가 단원의 얼굴부터 피셰르의 얼굴을 부드러운 롱 테이크로 잇는다. 음악의 아티큘레이션이 영상 속에서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교향곡 9번 ‘합창’의 4악장에 들어서면, 지금까지 주인공 격이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네덜란드 라디오 합창단원에게 그 자리를 내어준다. 전체 숏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 악장에서 카메라는 합창단원의 표정을 일일이 담는다. 그리고 교향곡 1번부터 9번 3악장까지 부분 숏이 많았다면 4악장은 전체 숏이 많아진다. 더불어 피셰르의 두 팔이 짚는 폭도 엄청 넓어진다. 무엇보다 콘세르트헤바우라는 공간성, 무대 뒤에 설치한 오르간과 합창석 양옆에 앉은 관객도 영상의 일부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소프라노 미르토 파파타나슈·메조소프라노 베르나르다 핑크·테너 부르크하르트 프리츠·바리톤 제럴드 핀리의 위치다. 그들은 오케스트라 구석구석에 단원들처럼 위치하고 있다가 차례가 되면 일어나 노래를 부른다. 실연으로 접했다면 네 명의 솔리스트가 함께할 때 오케스트라 속에서 성악가들이 일군 소리의 사각형이 떠오르며 오케스트라와 묘한 레이어를 이루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베토벤 교향곡 9번 연주가 끝날 때까지, 영화평론가와 음악평론가는 음질과 화질, 보는 것과 듣는 것, 악보의 마디와 영상의 미장센에 대해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긴 시간 내내 우리가 앉아 있던 곳은 콘세르트헤바우, 그 가운데에는 베토벤이 있었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아울로스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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