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천

즐거운 청춘의 나날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5월 4일 12:00 오전

세계적인 콩쿠르 우승 후 주목받는 연주자가 된 청년과의 유쾌한 인터뷰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클래식 음악 스타. 바이올린 명인 계보에 다가가는 그의 발걸음

몇 년 전 레이 천의 첫 음반을 들으며 ‘연주를 꽤 잘하는 젊은이가 또 한 사람 나타났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 그에 대한 기억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세계적 콩쿠르를 차례로 석권한 젊은이고 야멸찬 데뷔 음반을 냈다고 해서, 직업상 여러 재능 있는 예술가를 관찰하며 지내온 필자에게는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자신감 넘치는 비르투오소적 연주력은 물론, 영화배우 못지않은 외모에 디자이너 브랜드의 모델로 패션지 화보에 등장할 정도의 스타일, 주변에 전하는 긍정적 에너지와 따스한 인품까지 갖춘 청년이라는 긴 설명을 들으면서 ‘또 하나의 아이돌 스타가 등장했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필자의 무심함을 냉소주의라고 비난하기보다, 연주도 잘하고 외모도 훌륭하고 친절함까지 겸비한 젊은 클래식 음악 스타가 일상화된 음악계의 현실을 칭송하시라.

따뜻한 선율에 흐르는 건강한 에너지

아닌 게 아니라, 이쯤에서 우리는 21세기 신대륙형 아티스트에 대한 조금은 섣부른 정의를 내리고 넘어가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전통적으로 유대계 미국인 가운데 클래식 음악 비르투오소가 많았다면, 최근 이런 흐름은 아시아계로 이어지는 듯 보인다. 사실 인종의 용광로인 신대륙에서 교육받은 그들에게 유전자적 모국은 큰 의미가 없다. 낯선 사람들이 철저히 경쟁을 통해 등용되는 미국 사회에서 특정 분야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그 분야의 리더로 인정받으며, 이민자들은 경쟁에 최적화된 생활방식에 기꺼이 적응해간다. 대부분 줄리아드나 커티스 음악원 등 미국형 콘서바토리 출신인 그들에게 숙련된 기량은 기본이다. 그들이 하버드 같은 아이비리그 소속 학부에 별도 전공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다. 그들은 조깅과 피트니스를 통해 건강을 관리할 줄 알고 패션이나 쇼핑, 미식과 대중매체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 그들은 소통 능력도 뛰어나 복수의 SNS를 통해 팬들과 대면하며, 위트 있는 글 솜씨는 다양하고 풍성한 환경이 주는 덤이다. 무엇보다 그들 세대의 강점은 강력한 긍정 에너지와 도전 정신, 다원적 가치에 대한 코즈모폴리턴적 흡수력이다. ‘웹 2.0시대’의 비르투오소인 그들의 연주는 유럽 출신 비르투오소의 그것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복잡한 정서나 예민한 사운드 대신 건강하고 낙천적인 광채로 가득 차 있다.

신세기형 비르투오소의 장점이라면 무엇보다 사회와 어울리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인데, 국내 무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중국 출신 피아니스트 랑랑이 대표적 예다. 다만 랑랑이 미국에서 비르투오소적 면모보다는 대중 스타 같은 정치적 행보에 조금 더 비중을 두고 있다면, 레이 천은 앞으로 한동안은 연주 행보의 확장에 치중할 것으로 예상해본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와 메뉴인 콩쿠르 등 내로라하는 경연에서 우승함으로써, 세르게이 하차투리안 같은 유럽형 비르투오소에게 뒤지지 않을 성적표도 받은 그다. 하지만 그 역시 8세 때 나가노 동계 올림픽에서의 연주와 2012년 노벨상 시상식 연주를 일생의 무대로 꼽는 것을 보면, 음악 만들기 못지않게 메가 이벤트 참여와 영웅주의 사회적 행보에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새 시대를 이끌 신대륙 아티스트의 특징을 형성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만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에런 로샌드를 사사, 현재까지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는 레이 천은 바로 이러한 21세기 신대륙형 영 아티스트의 장점을 극대화해 지니고 있는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다. 차후에 대만계 출신으로 미국인이 사랑하는 연주자인 첼리스트 요요마처럼 소니 클래시컬 레이블을 통해 풍부한 카탈로그를 보유하게 되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모차르트의 정신’에 도전

레이 천이라는 연주자가 흥미로운 이름으로 불쑥 다가온 계기는 그가 2013년 크리스토프 에셴바흐와 녹음해 소니 클래시컬 레이블에서 내놓은 모차르트 음반이었다. 세 번째 음반으로 에셴바흐/슐레스비히 홀슈타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함께 ‘올 모차르트(All Mozart)’ 프로그램에 도전했다는 것은, 앞의 두 음반을 통해 ‘청년 비르투오소 레이 천’을 한껏 뽐내는 듯 보이던 흐름에 작은 반전을 일으킨다. 앞의 두 음반을 들은 사람이라면 그가 한동안은 화려한 기량을 담은 대협주곡이나 크로스오버에 가까운 동시대 레퍼토리를 선택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지점에서 이 젊은이는 고전 중의 고전이지만 의외로 제대로 해석해내기 어려운 천재의 영역으로 여겨온 모차르트의 세계에 도전한다. 그것도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로 알려진 대선배 에셴바흐를 파트너로 모시고 협연은 물론, 나아가 피아노가 주도적인 소나타까지 안배하는 겸손함을 보인다. 프로그램 노트에 붙인 제목 ‘모차르트의 정신(The Spirit of Mozart)’은 사실 수많은 연주자가 도전했지만 도달하기 어려웠던 목표이기도 한데, 다시 한 번 그의 도전 정신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지난해 호주의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레이 천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지 않았다면 외과의사가 되었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의 손끝이 야무지다는 것을 재미있게 표현한 것인데, 그의 연주를 듣노라면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침착하고 노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기교나 에너지를 과시하기는커녕 리듬이나 셈여림, 템포의 배분이나 프레이징의 처리가 마치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과학적이고 치밀하게 구성돼 안정감을 준다. 마치 젊은 시절 긴 팔로 바이올린을 여유롭게 갖고 놀며 ‘너무 쉬워’라고 말하는 듯했던 기돈 크레머를 연상시킨다고 할까. 이러한 면모는 그가 바이올린의 현을 그의 악기인 스트라디바리우스의 특성, 예컨대 지판의 고점과 현의 장력 등을 고려해 최상의 연주가 되도록 다소 까다롭게 선별해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도 나타난다. 그는 G현에 피터 인펠드 미디엄을, D현에 실버 도미넌트를, A현에 도미넌트 미디엄을, E현에 비전을 사용하며, 이를 연주를 위한 최적화된 세팅으로 고수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노력을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은 명기의 진가를 최대한 보여주려는 경의의 표현이자 대여받는 연주자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레이 천은 첫 내한 독주회에서 이틀에 걸쳐 다양한 레퍼토리로 바이올린 비르투오소의 미학을 보여주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게다가 내한 공연 이전에 마카오·광저우·항저우·상하이·베이징 등지에서 켄트 나가노/예테보리스 심포니케르와의 협주곡 퍼레이드가 예정돼 있다. 시기를 선정해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아시아 투어 기간에는 유사한 형식의 프로그램으로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협연 무대이든 독주회 무대든 항상 준비된 아티스트의 면모를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아직 음반과 매체를 통해서만 만난 그의 진면목은 다가올 내한 공연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를 만나기 전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이 있다면, 레이 천이라는 연주자가 앞으로 음악 팬들을 상당히 즐겁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겼다는 점이다. 과연 이 젊은이가 하이페츠(1901~1987)·오이스트라흐(1908~1974), 펄먼(1945~)·주커만(1948~), 벤게로프(1974~)·레핀(1971~) 등 현악 비르투오소의 계보를 잇는 신세대 거장으로 성장할까. 명멸하는 스타 연주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건 카덴차를 들려주는 믿음직한 아티스트로 우리 곁에 오래 남을까. 필자는 그 해답을 이번 내한 공연에서 찾아볼 예정이다.

음반 리뷰

첫 음반 ‘비르투오소’(2011)는 이른바 ‘레이 천의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음반 노트에도 담겨 있듯, 자신이 존경하는 작곡가들의 곡으로 이뤄져 있다. 심오함과 비르투오소적 기교를 선보일 수 있는 레퍼토리를 안배해 젊은 연주자의 데뷔 음반으로는 대담하게도 일종의 베스트 음반으로 신고식을 한 셈이다. 이 음반에서 그는 타르티니·바흐·비에니아프스키·프랑크 등 바이올리니스트가 흠모해 마지않는 대가들의 작품에 ‘그의 방식대로’ 경의를 표한다. 흔히 들어온 익숙한 해석이라기보다는 견고하면서 자존감 충만한 젊은 비르투오소의 탄생을 예고하는 레이 천 식의 해석으로 다가온다. 이 음반만으로 그의 표현을 규정하기에는 이르다. 하지만 초기 녹음이기에 10년, 20년 후 연주자의 해석의 변화가 궁금해진다.

레이 천은 두 번째 음반으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선택을 했다. 그에게 2008년 메뉴인 콩쿠르 우승을 거머쥐게 해준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과 2009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을 선사한 차이콥스키 협주곡은, 20대 초반의 청년을 세계 음악계에 표현할 수 있는 또 다른 이름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의 바이올린은 전반적으로 감정 과잉 없이 균형감 있고 명징한 해석을 펼치며, 지휘자인 대니얼 하딩의 이지적인 스타일도 이러한 면을 배가한다. 콩쿠르 이후 수많은 연주를 통해 다듬어온 곡인 만큼 고난도 기교를 깔끔하게 처리하면서도 프레이즈를 다루는 성숙한 여유가 돋보이는데, 그러한 절제미가 조금은 흐트러져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모차르트: 바이올린 콘체르토&바이올린 소나타’(2014)는 기획의 탁월함을 떠나 연주자가 협주곡에 스스로 만든 카덴차를 삽입한 점이 이채롭다. 이는 데뷔 음반에서 스스로를 ‘비르투오소’로 브랜딩한 것과 일관성이 있다. 본래 카덴차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직접 작곡해 자신을 내보이는 연주자의 영역이었다. 카덴차는 연주자가 실연자에서 창작자의 영역으로 전이되는 부분이며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가 각자의 버전을 만들어 한껏 기량을 뽐내는 도구로 사용했는데, 현대 연주자에게 카덴차는 유명한 선배의 버전을 악보대로 연주하는 것으로 굳어진 경향이 있다. 레이 천의 모차르트는 전반적으로 여유롭고 섬세하며, ‘모차르트의 정신’을 재현한다는 어려운 과업의 측면에서 합격점을 주고 싶다. 다이내믹과 색채감을 조련할 줄 아는 에셴바흐와의 협연으로 한층 차진 음반을 낳았다.

사진 마스트미디어·소니 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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