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기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6월 1일 12:00 오전

북구의 숲을 돌아보다

백혜선 협연, 김대진/수원시향의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곡 연주·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시리즈1

5월 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예술의전당은 2010년부터 한 작곡가의 음악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그레이트 컴포저 시리즈(Great Composer Series)’를 선보였다. ‘더 그레이트 3비 시리즈(The Great 3B Series)’의 일환으로 베토벤(2010년)·브람스(2011년)·바흐(2012년)를 탐구했으며 2014년에는 차이콥스키를, 2014년부터 2016년까지는 3년에 걸쳐 브루크너를 조명한다. 올해는 시벨리우스 탄생 150주년을 맞아 김대진이 지휘하는 수원시향과 함께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곡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연주한다.

작곡가의 기념해를 챙기는 수원시향의 움직임은 지난해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수원시향은 지난해에 탄생 150주년을 맞은 R. 슈트라우스 곡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며, 국내에서 소홀할 뻔한 슈트라우스의 생일상을 푸짐하게 차린 악단으로 호평을 받았다. 올해 시벨리우스 프로젝트는 총 6회로 진행하는데, 이번 공연에선 시벨리우스 ‘크리스티안 2세 모음곡’ 중 녹턴, 백혜선 협연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시벨리우스 교향곡 3번을 선보였다.

백혜선의 ‘황제’는 온화하고 나긋나긋했다. 다소 소극적인 접근이라 느껴질 만큼 프레이징을 단번에 몰아치는 강렬함은 부족했지만, 무언가 절제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밖으로 뿜기보다는 안으로 깊어지려는 연주였는데, 어루만지듯 부드러운 타건은 2악장에서 정밀한 톤 컬러를 만들었다. 3악장에 들어서자 격동적인 힘이 솟았지만, 오케스트라와의 밀착도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크리스티안 2세 모음곡’은 1898년 시벨리우스 친구인 스웨덴 작가 아돌프 파울이 쓴 ‘크리스티안 2세’ 역사극의 부수음악(극에서 반주로 사용한 음악)이다. 곡은 5악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1악장 녹턴의 선율은 사랑스럽고 서정적이다. 수원시향 현악군의 음형에서 찬란한 색채감이 묻어 나왔다. 현악군의 강한 호소력에 비해 관악군의 밀도가 상대적으로 미약했는데, 클라리넷의 서주를 따르는 호른은 도입부부터 불안정했다. 하지만 현의 진한 울림 덕분에 전체적 흐름은 그윽하게 음미할 수 있었다.

1904년, 청각에 이상을 느낀 시벨리우스는 정체성을 찾기 위해 헬싱키 북쪽 근교에 위치한 야르벤파로 이주했다. 부인 아이노 예르네펠트의 이름을 본떠 ‘아이놀라’라고 명명한 집, 그곳에서 교향곡 3번이 탄생했다. 수원시향의 목관은 북구의 대기를 연상시키듯 서늘했고, 현의 울림은 향긋한 숲 내음을 품었다. 차분함 속에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됐다. 시벨리우스 본질에 접근하려는 모습이었고, 음악적 흐름은 마지막까지 기복 없이 진행됐다.

이로써 수원시향의 시벨리우스 여정이 시작됐다. 이번에 수원시향은 시벨리우스의 큰 그림을 그려냈다. 이어질 다섯 번의 연주에서는 세세한 움직임까지 담아내리라 확신한다. 장혜선

 

생명력의 원천

음악극 ‘말러매니아’

5월 8~9일

의정부예술의전당 대극장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한 작품은 요소가 많아도 산만하지 않다. 연출진과 퍼포머 모두 작품의 목적에 동의하고, 서로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면 무대 위 장치와 행위는 이유를 지닌다. 음악·미술·무용 등 여러 장르가 오브제, 조명, 이미지와 몸짓 등 다양한 질감과 결합해도 어수선한 느낌 없이 하나의 정서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면, 모든 요소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제14회 의정부음악극축제의 개막 공연으로 펼쳐진 음악극 ‘말러매니아’는 눈이 바쁜 공연이었다. 객석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에는, 속이 보이는 구조물을 배치했고 오케스트라가 들어앉았다. 구조물의 겉면에는 이따금 말러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물결 영상을 비췄다. 왼쪽에는, 말러가 실제로 작업했던 공간인 오두막과 호수를 재현했다. 비교적 큰 크기의 오두막은 해체와 결합을 수없이 반복했고, ‘물’은 여러 장면에서 상징화되었다. 중앙 뒤편은 이중 구조로 위와 아래가 구분되어 출연진의 동선을 입체화하고, 뒤의 벽면에는 무대 위 상황을 순간순간 포착한 사진과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영상을 비췄다. 젊은 알마와 나이 든 알마가 한 무대에 공존하며 말러 삶의 조각을 잇고, 메조소프라노·바리톤과 배우·무용수가 시대적 변화와 개인의 감정을 다채롭게 그려나갔다.

‘말러매니아’는 연출가 니콜라 휨펠, 무대디자이너 올리버 프로스케 부부가 1998년 설립한 독일 극단 니코 앤 더 네비게이터스의 작품이다. 휨펠은 이번 공연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모든 출연자는 작품의 작가이자 연출이다”라고 말했다. “창작은 언제나 ‘즉흥’이라는 방법론을 지닌다. 모든 작품은 빈방에서 시작된다. 나는 출연자들에게 구체적이면서 모순적인 임무를 부여한다. 만약 행복이 주제라면, 장례식에 대해 이야기하며 운동을 해보라고 하는 식이다. 출연자들이 움직임과 감정에 의문을 갖고 새로운 경험을 하면 입체적인 캐릭터가 완성된다.”라는 그녀의 말은 작품 속 모든 개체가 생동감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마지막 곡으로 ‘대지의 노래’ 중 ‘고별’이 메조소프라노와 바리톤의 음색으로 찬란하게 울려 퍼졌다. 말러가 일생 동안 느낀 감정의 덩어리가 한데 뒤섞여 흩어졌다. 연주를 맡은 팀프 앙상블은 섬세한 떨림으로 울림을 만들었다. 작품이 끝난 뒤, 온통 어질러진 무대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울컥함이 남았다. 김호경

그곳에 ‘사랑’이 있었네

연극 ‘푸르른 날에’

4월 29일~5월 31일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2011년 5월 첫 무대에 오른 창작극 ‘푸르른 날에’는 그동안 대한민국 연극대상 작품상, 연출상, 올해의 연극 베스트에 선정되면서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2015년에는 특히 초연부터 이 작품과 함께 해온 원년 배우들이 선 마지막 무대로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냈다.

아름다운 남산 자락에서 5년 동안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연극 ‘푸르른 날에’는 ‘명랑하게 과장된 통속극’이라는 이 연극의 정의처럼 해학과 웃음 속에 깊은 아픔을 드러내며 관객을 몰입시켰다. 더욱 정교해진 배우들의 연기와 디테일한 연출, 그리고 역사극이 흔히 전하는 교훈 대신 역사 속 인물들이 겪은 삶에 초점을 맞춰 우리 곁에 더 가까이 다가왔다. 5·18이라는 정치적 혼란 속에 푸른 청춘이던 그들, 그리고 그 항쟁에 휘말려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 비극적인 남녀가 30년이 지나고 다시 만난 애틋한 재회는 우리 삶을 어찌할 수 없게 하는 거대한 운명이 얼마나 가혹한지 새삼 깨닫게 한다.

이날 무대에서 보여준 유머와 위트 있는 대사, 19명의 배우들이 보여준 열정, 땀 그리고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사람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완벽한 호흡은 이들의 마지막 피날레 무대를 더욱 빛나게 했다. 이 작품은 극장의 공간성을 염두에 둔 무대 디자인, 조명, 디테일한 의상과 소품, 적재적소의 음악과 음향 모두 훌륭하지만, 가장 큰 미덕은 1980년의 이야기가 바로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 코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은 사실감이었다. 사실과 비사실의 조합으로 이루어낸 다중적 시간은 그 역사적인 날이 그들만의 날이 아닌 우리의 날이었음을 실감케 했다.

무대는 과거와 현재, 광주와 보성, 서울을 잇는 시·공간 속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한 인생이 소용돌이치는 과정을 한눈에 보여준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선택 때문에 겪어야 했던 상처와 후회, 죄책감이 주인공 민호가 살아내야 할 진짜 ‘인생’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인생은 때로는 슬픔과 아픔, 상처로 가득한 것. 푸른 5월이 이토록 아름다운 건 황량했던 겨울을 이겨낸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긴 기다림 끝에 과거와 현재의 내가 화해하고 뜨겁게 끌어안는 모습은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5월의 광주’로 상처받은 그들은 연민이 아닌 공감해야 할 우리의 역사이며 우리 안에 ‘사랑’이 존재하는 한 어떤 거대한 상처도 단 한 번뿐인 인생 자체를 매몰시킬 수는 없다고 말이다. 국지연

진짜 공장에서 만난 그들

양손프로젝트 ‘여직공’

5월 1~10일

인디아트홀 공

공연장으로 향하기 전, 지도 어플로 위치를 검색한다. 지도의 화살표는 양평동의 어느 한 곳을 가리킨다. 지하철역을 나와 어둡고 긴 골목 초입에 들어서자, 멀리 기다란 굴뚝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에 살면서 공장 굴뚝을 본 것이 언제던가… 기억을 더듬으며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 앞에 다다랐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에 지었다는 건물의 1층은 현재 진행형인 공장, 그리고 2층이 공연장이다. 공장에서 만나는 여직공의 이야기라… 공장처럼 보이는 무대가 아닌 ‘리얼한’ 공장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인 셈이다. 덕분에 작품과 배우뿐 아니라 관객 모두에게 가장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공간 그 자체였다.

양손프로젝트는 유진오의 소설 ‘여직공’을 각색해 올해 첫 신작으로 내놓았다.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이 작품은 미국에 수출할 비단실을 뽑기 위해 일하는 일본 공장 여직공들의 이야기로 기존 멤버인 손상규·양종욱 외에 배우 허지원과 무용가이자 배우로 활동 중인 김주희가 동참했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주인공인 19세 소녀 옥순이가 일하는 방직공장 여직공들은 공장의 부품 취급을 당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행여 깎일 품삯을 걱정하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 와중에 옥순이는 일본인 공장 감독으로부터 금일봉을 받는다. 하지만 이는 공장의 부당한 노동 조건을 바꾸려 모의하는 여직공들의 동태를 알아내야 하는 조건부 미끼가 되어 결국 그녀를 고통과 자멸로 이끈다.

작품의 시대성이나 서사 면에서는 양손프로젝트가 지난해 산울림소극장에 올린 ‘김동인 단편선-마음의 오류’(중 특히 ‘감자’), 그리고 ‘착취, 억압받는 여성’이라는 키워드 면에서는 연출가 박지혜가 판소리만들기 ‘자’와 함께 작업한 ‘판소리 단편선-추물/살인’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간 서사극의 문법을 선명하게 가져가면서, 텍스트를 공감각적으로 발화시켜온 양손프로젝트가 이번 작업에서는 무엇보다 몸의 언어에 힘을 주어 비유와 상징, 반복의 방법론을 구사했는데 이것이 몇몇 지점에서 상당히 효과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공연의 시작과 끝, 배우들이 취하던 무용수의 발레 동작은 여직공들이 실을 뽑고 감는 모습으로 서서히 바뀐다. 제한된 공간에서 ‘젊은 여성’ ‘반복적 행위’라는 공통된 속성을 가졌음에도 전혀 다른 세계에 몸담고 있는 이들의 몸짓은 왈츠풍 음악과 어우러져 역설적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던져주었다. 다만, 양손프로젝트의 기존 배우들과 이번 작품을 위해 새로 참여한 배우들 사이에서 느낀 텍스트의 발화 방식 차이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장르를 불문하고 적은 인원이 전면에 나설수록 각기 다른 개성과 한 호흡 사이의 균형이 극 전체의 밀도를 좌우하니 말이다. 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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