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소폰은 오늘날 재즈를 상징하는 대표적 악기임에도 실상 재즈 안에서 이 악기의 정착은 더디게 진행됐다. 1846년 벨기에의 악기 제작자 아돌프 삭스가 만든 이 신생 악기에 대한 외면은 유럽의 고전음악이나 미국의 흑인음악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목관악기임에도 금관악기처럼 화려하고 우렁찬 소리를 내고 싶었던 아돌프 삭스의 괴팍한 의도는 색소폰을 위한 작품을 쓴 드뷔시·빌라 로부스·글라주노프·미요 등 몇몇 작곡가의 실험에도 불구하고 교향악단에서는 물론 초창기 재즈 밴드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목관악기의 소리가 필요하면, 클라리넷을 연주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뉴올리언스에서 재즈가 탄생했을 때 재즈밴드들은 트럼펫·트롬본·클라리넷으로 짜인 3관 편성을 주로 사용했다. 다시 말해 초기 재즈에서도 색소폰은 없었으며, 목관의 자리에는 역시 클라리넷이 사용된 것이다.
‘왕따’거나 대용품이거나
초기 재즈에서 클라리넷은 늘 트럼펫을 보좌하는 조연이었다. 그 점에 불만이 있던 탁월한 즉흥연주자 시드니 베쳇이 클라리넷 대신 소프라노 색소폰을 연주하자(그는 이 악기로 트럼펫으로부터 음악의 주도권을 빼앗으려 했다) 결국 ‘왕따’가 되어 1920년대 내내 유럽을 정처 없이 배회한 것은 어쩌면 색소폰이 처한 현실 그 자체였다.
동시에 색소폰이 처음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곳이 고적대·군악대 같은 브라스밴드였다는 사실은 이 악기가 처한 경계적 위치를 말해준다. 고적대는 음색을 보다 다채롭게 만들기 위해 다수의 금관악기 속에서 클라리넷과 플루트 같은 목관악기를 보조적으로 사용했다. 특히 클라리넷보다는 신생 목관악기인 색소폰이 화려한 금관 사운드 속에서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브라스밴드들은 알아챘다. 색소폰은 퍼레이드·서커스·축제 음악 등에 주로 사용됐고, 그들로부터 직접적 영향을 받은 재즈밴드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시드니 베쳇의 유배에서 볼 수 있듯이 색소폰을 수용한 재즈밴드는 극소수였다. 1920년 아프리카계 가수가 부른 최초의 히트곡 ‘Crazy Blues’를 발표한 매이미 스미스는 뉴올리언스 재즈밴드에 저음의 목관악기인 테너색소폰을 더한 독특한 밴드를 운용했다. 미주리 주 출신으로 이전에는 첼로를 공부했던 당시 열일곱 살 소년 콜먼 호킨스(1904~1969)는 1921년 매이미 스미스의 밴드에 들어왔다. 그리고 2년 뒤 이 소년은 색소폰의 용도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있던 플레처 헨더슨의 밴드로 자리를 옮긴다.
플레처 헨더슨 밴드에서 테너색소폰의 용도는 튜바의 대용품이었다. 그러니까 고적대에서 튜바 혹은 수자폰이 행진 박자를 저음을 통해 맞춰주던 것처럼 플레처 헨더슨 밴드에서 콜먼은 색소폰으로 저음과 리듬을 ‘찍어’주었고, 심지어 자신의 솔로도 스타카토로 연주했다.
‘비상’하는 테너색소폰, 재즈계에 ‘비상’을 걸다
테너색소폰이 이러한 용도에서 해방되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인 1924년부터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해부터 플레처 헨더슨은 튜바를 포함한 금관 다섯 대에 목관 석 대를 사용함으로써 금관과 목관을 균등하게 대칭시키는 최초의 빅밴드 사운드를 추구한 것이다. 이를 통해 석 대의 ‘색소폰 중창단’은 비로소 멜로디를 노래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그해 이 밴드에 가입한 불세출의 천재 루이 암스트롱(1901~1971)이었다. 시카고를 거쳐 뉴욕에 들어온 이 뉴올리언스의 혁명가는 남부 특유의 스윙과 즉흥 선율을 플레처 헨더슨 밴드에게 명확히 이식시켰고, 그의 즉흥연주는 콜먼을 비롯한 밴드 단원 전부를 빠르게 변모시켰다.
당시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의 최첨단이었다. 플레처 헨더슨 오케스트라 이후 자신의 소편성 스튜디오 밴드(핫 파이브·핫 세븐)를 4년 동안 이끈 그는 1930년부터 밴드의 규모를 확장하면서 당시 최신 브로드웨이 히트곡을 자신의 레퍼토리로 삼았다. 이는 연주자 자신의 오리지널 작품이나 뉴올리언스의 전통적 레퍼토리를 연주하던 재즈밴드의 관습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1930년 자니 그린 작곡의 ‘Body And Soul’이 브로드웨이에서 발표하자마자 루이는 유려한 즉흥연주를 통해 이 곡을 완벽한 재즈로 변모시켰다(음반①).
루이 암스트롱이 전국의 스타로 떠오를 무렵 콜먼 호킨스는 뛰어난 음악성에도 불구하고 밴드 경영에서 무능했던 플레처 헨더슨 밑에서 10년간 악전고투했다. 설상가상 대공황의 여파로 헨더슨 오케스트라가 더욱 침체되자 그는 1934년 미국을 떠나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유럽으로 향했다. 하지만 콜먼의 영향력은 그때부터 부각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스윙 붐이 일자 빅밴드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뛰어난 테너색소폰 연주자를 찾아 나섰다. 그들의 우상은 한결같이 ‘호크’(콜먼 호킨스)였다. 모두가 콜먼처럼 강하고 거친 음색으로 빠르게 연주해 호크가 없는 무주공산의 주인이 되려고 했다. 하지만 5년 만인 1939년 콜먼이 한 마리의 매가 되어 미국에 다시 내려왔을 때, 그가 발표한 음반은 뜻밖에도 오로지 테너색소폰의 느린 즉흥연주로 3분을 가득 채운 ‘Body And Soul’이었다(음반②). 물론 그의 라이벌 추 베리는 1년 앞서 이와 유사한 템포의 서주로 같은 곡을 녹음했지만, 아무런 템포 변화 없이 느린 발라드로 이 곡을 완주한 것은 호크가 최초였다. ‘Body And Soul’’은 재즈 발라드의 전범이 되었고, 동시에 테너색소폰은 마치 바로크 시대의 통주저음이던 첼로가 하이든과 보케리니에 의해 환골탈태했던 것과 같은 비상(飛上)을 이 곡을 통해 완성했다. 이 즉흥연주의 멜로디를 채보해 가수 에디 제퍼슨은 새로운 가사를 붙였고, 맨해튼 트랜스퍼도 부른 이 노래는 호크에게 바치는 찬가로 남아 있다.
당연히 ‘Body And Soul’은 모든 테너 색소포니스트의 레퍼토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 곡의 근본적 혁신을 발견한 것은 존 콜트레인이다. 1960년 당시 그의 관심을 반영하듯 콜트레인은 이 곡의 코드 진행을 가능한 한 단순화하고 반복적인 리프를 깔아 모드(Mode) 재즈에 가까운 형태로 변모시켰다(음반③). 이러한 아이디어는 덱스터 고든에게 이어졌고, 그 역시 미국 복귀를 알린 1976년 녹음에서 단순한 리프를 바탕으로 장대한 즉흥연주를 이어갔다(음반④). 가수 커트 엘링은 덱스터의 즉흥연주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이 색소폰의 거장에게 새로운 헌사를 바쳤다. 재즈의 기대주 에스페란자 스폴딩도 2008년 ‘Body And Soul’’을 위한 신선한 리프를 만들어 베이스와 보컬 모두에서 그녀의 천부적 재능을 과시했다.
이 달의 추천 재즈음반
Vol. 6: St. Louis Blues
Columbia CK 46996|연주 시간 3분 18초|1930년 녹음|루이 암스트롱(트럼펫·보컬)+레스 하이트(알토·바리톤 색소폰·지휘)/세바스찬 뉴코튼 클럽 오케스트라
Body And Soul
RCA Victor 09026-68515-2|연주 시간 3분 1초|1939년 녹음|콜먼 호킨스(테너색소폰)와 그의 오케스트라
Coltrane’s Sound
Atlantic 8122-73754-2|연주 시간 5분 38초|1960년 녹음|존 콜트레인(테너색소폰)+매코이 타이너(피아노)/스티브 데이비스(베이스)/엘빈 존스(드럼)
Homecoming: Live at the Village Vanguard
Columbia C2K 46824|연주 시간 13분 10초|1976년 녹음|덱스터 고든(테너색소폰)+로니 매슈스(피아노)/스태퍼드 제임스(베이스)/루이스 헤이스(드럼)
글 황덕호
KBS 1FM ‘재즈 수첩’을 16년 동안 진행하고 있다. ‘평론가’보다는 ‘애호가’가 되기 위해 오늘도 쓰고, 듣고, 틀고,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