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스트로의 지휘봉, 왜 달라지는 건가요?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7월 1일 12:00 오전

마에스트로의 지휘봉, 왜 달라지는 건가요?
시작할 때 들었다가 도중에 내려놓고, 또 각각의 생김새는 왜 다른 건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스물세 살 공대생입니다. 제겐 소개팅으로 올해 초부터 사귀게 된 사랑스러운 여자친구가 있어요. 클래식 음악 감상을 즐기는 그녀를 따라 지난봄 내내 클래식 공연장에 다녔습니다. 이름도 다 외우기 힘든 오케스트라의 공연에서 제 눈을 사로잡은 건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였습니다. 곡 제목은 잘 모르지만, 잔잔하게 또 힘차게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빨려들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공연을 보면서 궁금한 게 생겼어요. 지휘자는 무조건 지휘봉을 들고 연주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더라고요. 어느 순간 지휘봉을 내려놓기도 하고, 아예 처음부터 맨손으로 지휘를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앞자리에 앉아 유심히 보니 지휘봉의 길이도 조금씩 다른 것 같고요.
대체 지휘자는 지휘봉을 왜, 어떻게 쓰는 건가요?
이현호(서울시 도봉구 창동)

A 이현호 독자님. 여자친구와 함께 새로운 취미생활을 시작하셨군요. 예리한 눈썰미까지 지니셨으니 머지않아 클래식 음악 마니아에 합류하실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듭니다! 알고 봐도, 더 알고 싶은 것이 바로 지휘자의 세계죠. 우선 ‘지휘봉’을 중심으로 독자님의 궁금증을 해결해드리겠습니다.
독자님의 말처럼 서로 엇비슷해 보이는 지휘봉도 가까이에서 유심히 보면 길이와 색깔, 굵기와 모양이 천차만별이고, 한 지휘자도 때에 따라 다른 지휘봉을 사용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지휘봉을 쓰기 시작한 것은 불과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이뤄진 일입니다. 과거엔 작곡가들이 지휘를 겸하는 일이 많았는데요, 그땐 종이 두루마리를 손에 쥐고 흔들거나, 발을 구르고, 지팡이로 바닥을 내려치기도 했다네요.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바이올린 활로 사인을 보내는 것도 지휘봉과 비슷한 기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지휘봉은 기본적으로 가늘고 긴 막대와 손잡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통용되는 지휘봉은 평균 길이 30cm 내외, 무게 5~10g 안팎이지만, 기호와 필요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지휘봉이 지휘자의 손에 쥐여지곤 합니다.
나무를 가늘고 길게 깎아, 흰색으로 칠하고, 끝을 코르크로 만든 손잡이와 붙인다.
이 간단하고도 손쉬운 방법(?) 때문인지, 과거 지휘봉 제작은 바이올린 제작자들이 부업 수준으로 여겨졌습니다. 요즘엔 지휘봉을 전문으로 만드는 업체나 브랜드가 존재하지만, 다른 악기 제작 범위와 비교하면 매우 적은 수준이죠.
오늘날 지휘봉에 쓰이는 재료도 다양한데요. 케인(cane)이라 불리는 막대 부분은 장미나무·단풍나무 같은 나무 외에도 흔히 파이버글라스(유리섬유)·카본(탄소섬유)·플라스틱 등 다양합니다. 색상은 눈에 잘 띄는 흰색이 일반적이지만, 나무 본연의 색을 살린 것도 있습니다.
핸들(handle), 즉 손잡이 부분은 몸체와 동일한 재료 외에도 코르크나 알루미늄 등이 사용됩니다. 재료와 완성도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인데, 평균 1만~3만 원 선에서 판매되는 편입니다. 비싼 지휘봉은 15만 원을 훌쩍 넘는 것도 있습니다. 한 번 잡은 지휘봉을 10년 넘게 사용하기도 하지만, 새것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금방 부러지는 경우도 있다네요. 하지만 공연 도중 지휘봉이 부러지는 것보다 더 공포스러운 일은 끝이 뾰족한 지휘봉을 손에서 놓쳐 누군가의 악기에 꽂히는 일이 아닐까요. 상상만해도 끔찍하죠?
자신에게 꼭 맞는 지휘봉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은지라, 해외를 오가면서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했을 때 무조건 ‘사재기’를 안 할 수 없다는 어느 지휘자의 고백(?)은 직업을 불문하고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올해 초 발간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담집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를 보면 ‘유진 오르먼디의 지휘봉’에 얽힌 일화가 짧게 소개되어 있는데요. 오자와 세이지는 유진 오르먼디와의 친분으로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에서 객원 지휘를 하던 당시, 오르먼디의 사무실 책상 서랍에서 몰래 슬쩍했던 지휘봉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잠깐 두 사람의 대화를 옮겨보겠습니다.

오자와 한번은 오르먼디 씨가 애용하는 지휘봉을 나한테 하나 줬는데 그게 얼마나 좋던지. 당시 난 돈이 별로 없으니까 지휘봉을 주문 제작한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 사무실 책상 서랍을 열어봤더니 그거하고 똑같은 지휘봉이 죽 놓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쯤 없어져도 모르겠지 하고 세 개를 슬쩍했거든.

무라카미 훔치고 싶어질 만큼 쓰기 편한 지휘봉이었던 겁니까?

오자와 네, 그거 참 괜찮았어요. 낚싯대 있잖아요? 그걸 짧게 줄여서 끝에 코르크를 붙인 것 같은 식이라, 착착 잘 휘어요. 특별 주문품. 오르먼디 씨가 나중에 어디서 같은 걸 주문할 수 있는지 가르쳐줬죠.

 


▲ 정명훈의 지휘봉

기성품이나 특별 주문 제작 외에, 값을 매길 수 없는 지휘봉을 사용하는 지휘자들도 있습니다. 직접 만들어 쓰는 경우인데요. 잘 알려져 있듯, 서울시향 예술감독 정명훈은 10여 년 전부터 프랑스 프로방스에 있는 자택에 심은 올리브 나무나 아몬드 나뭇가지를 사포로만 다듬어 지휘봉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무게나 밸런스, 손잡이 모양까지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어 직접 만들어 쓰는데, 산책할 때면 지휘봉으로 사용할 곧게 뻗은 나뭇가지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군요. 서울시향 부지휘자 최수열이 최근 사용하는 지휘봉은 물푸레나무로 만든 것인데, 전원생활을 하는 장인이 장터에서 사온 나무를 손수 깎아 선물한 것이라네요.
팔의 연장선으로 기능하는 지휘봉은 개인의 신체 조건뿐 아니라, 어떤 장르와 작품을 연주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연주자들에게 명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대개 느린 악장이나 박자감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경우 지휘봉을 쓰지 않기도 합니다.
멜로디 위주거나, 보다 섬세한 표현이 필요한 악구라면 뾰족한 지휘봉을 내려놓고, 보다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열 손가락을 드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죠. 멀리 있는 연주자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기능을 생각하면, 적은 연주자로 편성된 연주에선 지휘봉을 굳이 쓰지 않아도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적은 연주자 수’는 늘 상대적이고 작품에 따라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늘 달라지죠. 여기서 잠시 지휘자 최수열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 학생 시절부터 현재까지, 최수열의 지휘봉들

“현대음악 작품의 경우, 초기부터 맨손으로 자주 지휘하는데 익숙해져서, 지휘봉을 안 쓰는 게 편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정말 치밀한 변박이 눈에 띄는 작품이라면 명료함을 위해 지휘봉을 듭니다. 이에 대한 연주자들의 의견을 듣기도 하죠. 그립감이 가벼운 지휘봉을 모차르트 할 때 쓰다가도, 문득 말러에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다 어떤 작품이든 그립감 자체가 불편해질 때도 있습니다. 결국 음을 이끌어내는 ‘손맛’의 차이 아닐까요?”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듯, 똑같은 취향도 없다는 이야기네요. 결국 지휘봉의 선택은 ‘적당한 길이와 탄성의 막대+잘 맞는 손잡이’라는 기본 구성 외에 지휘봉은 완벽하게 지휘자의 취향이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이현호 독자님. 아예 지휘봉을 쓰지 않는 지휘자들도 있다는 거 알고 계시나요? 레오폴드 스토콥스키·피에르 불레즈·유리 테미르카노프·쿠르트 마주어 같은 지휘자들인데요.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맨손 지휘를 즐기지만 경우에 따라 10cm 정도 크기의 이쑤시개 같은 지휘봉을 꺼내들기도 한답니다. 다니엘 하딩은 몇 년 사이, 맨손으로 지휘하는 무대가 많아졌죠. 요즘엔 왼손으로 지휘봉을 잡는 지휘자도 늘고 있다네요.
합창 지휘자의 경우 대개 맨손 지휘인 경우가 많습니다. 한 음절에 여러 음이 붙는 경우가 빈번한 성악곡은 어느 음절을 어느 음에 어떻게 붙이는지에 따라 다르게 들리죠. 때문에 상당수 지휘자들이 지휘봉보다 손가락을 움직이며 섬세한 음절 표현을 연주자에게 전달하는 편입니다.
지휘봉에 대한 취향과 선택이 어떠하든, 결국 지휘에서 중요한 것은 지휘봉 그 자체보다는 정확한 박자와 템포 그리고 셈여림을 지시하는 오른손, 큐를 주고 셈여림과 프레이즈를 보완하는 왼손, 그리고 무엇보다 눈(빛)일 겁니다. 각각 움직이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명확히 보이게끔 하는 것이 탁월한 지휘자의 능력이겠죠?

취재에 도움 주신 분들
김명엽(서울시합창단 상임지휘자)·최수열(서울시향 부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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