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러 버르토크

COMPOSER OF THE MONTH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7월 1일 12:00 오전

농민음악을 예술음악으로!

1881헝가리 너지센트미클로시 출생

1899부다페스트 음악원 입학

1903교향시 ‘코슈트’ 완성

1908바이올린 협주곡 1번 완성

1928랩소디 1번 작곡

1931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44개의 2중주 작곡

1936현과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작곡

1938‘콘트라스트’ 작곡

1939‘미크로코스모스’ 완성

1940미국 뉴욕으로 이주

1944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작곡

1945사망

작곡가로서 자국의 고유한 음악에 관심을 갖고 고전음악과 접목을 시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헝가리의 벨러 버르토크는 이런 작업을 현대적으로 수행한 작곡가로 많은 작품과 글을 통해 뛰어난 성과를 이룩했다.

병약한 우등생

벨러 버르토크(1881~1945)는 너지센트미클로시(현재 루마니아의 슨니콜라우마레)에서 농업학교 교장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는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음악교육은 피아노 선생인 어머니가 5살 생일 선물로 첫 레슨을 하며 시작됐다. 아버지는 피아노와 첼로를 연주하고 작곡도 했지만, 버르토크가 7세 때 세상을 떠나 아들에게 그다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후 어머니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13세 때 포조니(현재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 정착하며 비로소 버르토크는 안정적으로 음악공부를 할 수 있었다. 수시로 이사를 한 데다 몸이 허약해 병치레가 잦은 탓에 동년배보다 진도가 많이 늦었지만, 두뇌가 명석했던 어린 버르토크는 학습 속도가 빨라 최고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빈에서 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 약속도 받았다.

하지만 버르토크의 최종 선택은 빈이 아닌 부다페스트 음악원이었다. 이유는 포조니에서 알게 된 에른스트 폰 도흐나니 때문이었다. 4년 연상의 도흐나니는 이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촉망받던 음악가로, 버르토크는 그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그는 빈으로 갈 예정이던 버르토크에게 헝가리 음악에 대한 관심을 않도록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공부하도록 권유했고, 버르토크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버르토크는 자연스럽게 민족주의 음악가의 길로 들어섰다.

 


▲ 버르토크가 다녔던 부다페스트 음악원

작곡에 눈을 뜨다

18세에 부다페스트 음악원에 입학한 버르토크의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음악원의 피아노 스승이었던 이스트반 토만과 강한 신뢰와 친분을 유지했지만, 자신의 작품에 비판적이었던 작곡 스승 한스 폰 쾨슬러와는 좋은 관계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음악원 입학 전보다 오히려 작품 수가 줄었다. 그런 그가 다시금 작곡에 열의를 갖게 된 것은 1902년 부다페스트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듣고서였다.

“나는 침체 상태로부터 깨어났다. 마침내 내 앞에 놓인 길을 보았으며, 다시 작곡하기 시작했다.”

버르토크는 헝가리의 음악을 작곡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듬해 교향시 ‘코슈트’(1903)를 완성했다. 이 곡은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위해 싸운 헝가리의 영웅을 음악화한 것으로, 유럽 전역에서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이후 유럽 음악계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904년 부다페스트 초연 당시 오스트리아인 트럼펫 연주자가 자국의 국가를 희화화한 것에 대한 항의로 연주를 거부했지만 결국은 연주를 마쳤던 해프닝도 있었다.

버르토크는 1907년부터 1934년까지 토만의 뒤를 이어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피아노 교수로 재직했다. 큰 열의를 가지고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제자들도 그런 그를 매우 존경했다. 그런데 작곡은 가르치지 않았다. 작곡을 가르치면 자신의 음악 세계가 악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작곡 교수 제의가 있을 때마다 고민 없이 거절했다.

버르토크는 쇤베르크가 조직한 사적 음악 연주 협회에도 참석했다. 그는 신빈악파가 주도하던 진보적 음악계에도 큰 관심이 있었으며, 바이올린 소나타 1번(1921)에서 12음 기법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조성을 음악의 자연이라고 생각한 버르토크는 자신이 모더니즘 음악가로 인식되기를 원치 않았다. 자신의 작품들이 무조성이나 복조성으로 오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악보에 굳이 조성을 표기할 정도로 조성에 집착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그가 현대적인 작곡기법에 능통했다는 것을 충분히 말해준다.

또한, 버르토크는 드뷔시의 음악에서 민속음악적 특징을 발견해 관심을 두었으며, 드뷔시의 화음과 음색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전통을 중시하는 성향으로 자연스럽게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에도 호의를 보였다. 바흐와 베토벤에서 형식적 모델을 찾았는데, 그럼에도 자신의 음악을 신고전이라는 말로 설명하지 않았다.

버르토크의 음악 형식을 살펴보면, 전체를 황금비 혹은 그 역으로 나누어 클라이맥스에 이른다는 에르뇌 렌드버이의 연구는 잘 알려져 있다. A-B-A 같은 대칭적인 아치구조도 버르토크의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형식이다. 특정 음을 기준으로 하는 거울면 대칭도 즐겨 사용했다.

이렇게 버르토크는 동시대의 여러 작곡가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지탱해줄 자신만의 개성적인 형식적 토대를 마련했다. 여기에 민속음악을 음악적 내용으로써 채워 넣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부다페스트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연주가 될지 확신할 수 없는 작곡을 자주 등한시했으며, 대신 민속음악 연구에 더욱 매진했다.

민속음악 연구가이자 비교음악의 개척자

버르토크는 당시 헝가리의 공용어이자 상급 사회에서 필수적인 독일어 사용을 거부할 정도로 열렬한 민족주의자가 됐다. 독일인이 자신의 음악 뿌리를 바흐에게서 찾는다면, 헝가리인은 농민의 민요에서 찾아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헝가리 음악가로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헝가리 농민음악 연구에서 찾을 정도였다. 이러한 활동에 졸탄 코다이라는 훌륭한 동료가 있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큰 힘이 됐다.

 


▲ 버르토크와 가까운 친구였던 졸탄 코다이 ©Hugarian Museum

버르토크는 헝가리 농민음악의 근원을 밝힌다는 목적으로 1905년부터 헝가리 농민음악을 수집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곧 주변의 민속음악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돼 그 범위를 점차 확대했다. 버르토크가 수집한 민속음악은 헝가리 2800여개, 루마니아 3500여개, 슬로바키아 3000여개를 비롯해 터키·우크라이나·세르비아·불가리아·러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아랍민족 등 약 1만3000여개의 선율을 대부분 직접 방문해 수집했다. 여행이 어려우면 이미 정리된 자료를 얻었다. 이들을 비교 분석한 결과, 집시 음악이 헝가리 음악의 기원이며 농민음악은 집시 음악이 저급하게 변형된 것이라는 리스트의 견해가 틀렸다는 것을 밝혀냈다. 버르토크는 자신이 수집한 선율과 편곡 작품, 연구 결과 등을 출판했으며, 필요한 경우 자비를 들여가며 작업을 진행했다. 이런 연구 활동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지속했으며, 오늘날 버르토크는 민속음악 연구의 선구자이자 비교음악학 분야의 개척자로 인정받고 있다.

버르토크는 자신의 음악에 헝가리 농민음악과 타국의 민속음악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선율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리듬·선법·음계 등 음악적 요소를 현대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전자는 교육과 같은 특수한 목적을 위해 쉽게 작곡된 음악이나 선율의 직접적인 인용이 의도된 작품들에서 주로 나타난다. ‘어린이를 위하여’(1908~1909) ‘미크로코스모스’(1926~1939)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44개의 2중주(1931) 등이 대표적인 교육음악으로 발췌돼 콘서트에서도 연주된다.

바이올리니스트의 반주자

20대 초 버르토크의 피아노 실력은 헝가리에서 비슷한 세대 중에는 따라올 자가 없었으며, 도흐나니에 필적하는 유일한 연주자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1905년 루빈스타인 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문과 작곡 부문 모두 입상하지 못하자 크게 실망했다. 이듬해 버르토크는 바이올린의 신동으로 불렸던 페렌츠 폰 베체이의 반주자로 나섰는데, 이것은 사실상 피아노 독주자로서 커리어를 보류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최고의 연주 실력과 뛰어난 초견 능력을 갖춘 버르토크는 곧 많은 연주자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특히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았으며, 자연스럽게 바이올린 작품을 많이 작곡했다. 슈테피 게예르의 반주자로 활동하는 동안에는 헝가리 농민음악을 응용한 바이올린 협주곡 1번(1907~1908)을 선보였고, 1920년대에 예이 드어라니의 반주자로 활동했을 때에는 표현주의적인 두 개의 바이올린 소나타(1921~1922)가 그녀에 의해 연주됐다.

1920년대 말에 만난 요제프 시게티는 랩소디 1번(1928)을 위촉했으며, 이후에도 버르토크에게 여러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베니 굿맨이 위촉한 ‘콘트라스트’(1938)와 세르게이 쿠세비츠키가 위촉한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43)은 모두 시게티가 도운 결과였다.

20세기 중반에 많은 음악가를 후원하고 작곡가에게 작품을 위촉한 지휘자 파울 자허도 버르토크를 피해가지 않았다. 그 답으로 형식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현과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1936)과 현을 위한 디베르티멘토(1939)가 탄생했다.

뉴욕의 헝가리인

 


▲ 버르토크와 그의 아들 페테르

헝가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한 대가로서 트리아농 조약에 의해 국토의 무려 71%, 인구의 60%를 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체코슬로바키아에 양도해야 했다. 그래서 부다페스트를 제외한 버르토크가 살던 지역 대부분은 현재 헝가리에 있지 않다. 약소국으로 전락한 헝가리는 영토 회복을 제1의 외교적 목표로 삼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파시스트의 편에 섰다.

버르토크는 이러한 상황에 크게 반발했다. 1933년 2월 이후 독일에서 연주하지 않았고, 1937년에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작품이 방송되는 것을 금지했다. 오스트리아 공연권 협회에서 탈퇴해 런던 지부에 가입하고, 출판사도 독일의 유니버설에서 영국의 부지 앤 혹스로 옮겼다. 이런 모습은 조국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져 비난을 받았다.

헝가리를 떠나서 살 수 없다고 생각했던 버르토크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40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예상치 못한 생계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주회는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했고, 작품은 거의 연주되지 못했다. 커티스 음악원에서 작곡 교수 제의를 받았지만, 작곡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신념을 꺾지 않았다. 다행히 1941년 3월부터 이듬해 말까지 컬럼비아 대학의 초빙교수가 돼 당분간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 등 민속음악 연구에만 매달렸고 작곡은 거의 하지 않았다. 사실상 연주 기회를 얻기 힘든 상황에서 현실적인 판단이었을 수도 있다.

버르토크는 1942년 4월부터 다시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계약이 끝난 1943년부터는 수입마저 끊겼다. 이에 여러 지인과 제자들이 버르토크를 돕기 위해 나섰다. 그 결과 미국 작곡가 저술가 출판업자 협회(ASCAP)가 버르토크의 치료비를 부담하기로 했으며, 쿠세비츠키의 위촉도 얻었다. 그리고 예후디 메뉴인도 그에게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1944)를 위촉했다.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건강이 좋아지는 듯했지만, 그의 운명을 돌이키지는 못했다.

결국 비올라 협주곡이 미완으로 남겨졌다. 버르토크의 제자인 티보르 셀리가 1949년 이 곡을 완성했으며, 오늘날 광범위하게 연주된다. 하지만 셀리가 버르토크의 스케치 일부를 변형하고 누락했다는 점에서 논란이 있었다. 이에 1992년 비올리스트 처버 에르델리가 비슷한 시기에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참고해 새롭게 완성했으며, 음악계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버르토크의 아들인 페테르가 저작권을 허락하지 않자, 저작권 인정 기간이 비교적 짧은 뉴질랜드에서 2002년에 2001년 개정판을 출판하고 음반을 발매했다. 페테르도 1995년에 줄리아드 교수인 폴 노이바워와 함께 초고를 재검토해 새로운 판본을 만들었다. 하지만 학자들은 에르델이 판본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편이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EBS FM ‘클래식 드라이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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