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리듬이 있다. 고로 존재한다
재즈 음반을 열심히 사 모으기 시작했던 1990년대 초의 일이다. 국내에 번역된 재즈 서적도 별로 없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재즈에 관한 글이라고 읽을 수 있는 것은 수입 LP의 뒷면 혹은 CD 부클릿 안에 쓰여 있는 영문으로 된 해설문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뭐라도 조금 알고 싶어 사전을 옆에 놓고 그 글들을 꾸역꾸역 읽던 때였다.
그 시절 내 마음을 사로잡은 테너색소폰 주자(물론 지금도 나는 그를 한 손에 꼽히는 주자로 간직하고 있다) 가운데 덱스터 고든이 있었다. 그의 음반이라면 나는 가리지 않고 돈이 허락하는 대로 구입했다. 그런데 그의 한 음반에 실린 해설문 중 그가 연주한 ‘Second Balcony Jump’가 ‘리듬 체인지(rhythm change)’ 곡이라고 쓰인 문장이 있었다. 음질이 썩 좋지 않은 실황 음반임에도 나는 해설문이 지적하는 ‘리듬의 변화’가 알고 싶어 10분이 넘는 긴 연주를 찬찬히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그럼에도 그 ‘리듬의 변화’는 내 귀에는 가물거리기만 했다. 리듬이 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재즈 스탠더드 넘버들의 선조
그 후에도 ‘리듬 체인지’를 여기저기서 만났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그 리듬의 변화를 들을 수가 없었다. 박자가 변하는 것도, 빠르기가 변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 곡은 ‘리듬 체인지’일까. 아둔하게도 한참 뒤에 그 이유를 알았다. 여기서의 ‘리듬 체인지’는 내가 생각했던 ‘장단의 변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정답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리듬 체인지’라고 소개된 대부분의 곡은 조지 거슈윈의 ‘I Got Rhythm’을 언급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난 그것을 정확히 눈치채지 못했다. 다시 말해 ‘리듬 체인지’는 장단의 변화가 아니라 ‘I Got Rhythm’의 코드 진행(change)을 바탕으로 만든 새로운 곡들을 부르는 재즈 동네의 관용어였던 것이다.
A-A-B-A 형식의 16마디로 구성된 ‘I Got Rhythm’은 자신의 화성 진행을 토대로 수많은 멜로디의 다른 곡들을 낳았다. 듀크 엘링턴의 ‘Cotton Tail’,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의 ‘Anthropology’ ‘Shaw ‘Nuff’, 디지의 ‘Dizzy Atmosphere’, 파커의 ‘Chasing the Bird’ ‘Constellation’ ‘Kim’ ‘Moose the Mooch’ ‘Red Cross’ ‘Steeplechase’, 셀로니어스 멍크의 ‘Rhythm-a-Ning’, 버드 파월의 ‘Celia’, 소니 스팃의 ‘The Eternal Triangle’, 마일스 데이비스의 ‘The Theme’ ‘The Serpent’s Tooth’, 케니 도럼의 ‘Straight Ahead’, 소니 롤린스의 ‘Oleo’를 비롯하여 수많은 재즈 스탠더드 넘버들은 사실 ‘I Got Rhythm’을 토대로 탄생했던 ‘리듬 체인지’ 곡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와 그의 형인 아이라 거슈윈이 만든 이 곡은 재즈 역사학자 테드 지오이아의 표현대로 재즈 스탠더드 넘버들의 선조다. 이 곡을 처음 등장시킨 거슈윈 형제의 뮤지컬 ‘Girl Crazy’는 ‘But Not for Me’ ‘Embraceable You’와 같은 명곡을 탄생시켰지만 재즈 연주자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곡은, 심지어 거슈윈의 모든 곡을 통틀어 재즈 연주자들에 의해 가장 많이 선택된 곡은 분명히 ‘I Got Rhythm’이었다.
재즈 언어의 진미
이 곡을 소재로 한 수많은 재즈 연주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슈윈 형제가 의도했던 이 곡의 본모습을 음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엘라 피츠제럴드가 20세기 초 미국 대중음악 고전들의 표본을 8년(1956~1964)에 걸쳐 녹음한 ‘송북 시리즈’ 중 거슈윈 형제 편에 담긴 이 노래는 서창(敍唱, verse)을 온전히 살린 구성과 뛰어난 오케스트라 편곡, 두말할 나위 없는 엘라의 탁월한 가창으로(심지어 여덟 마디의 스캣마저 등장한다) ‘스탠더드의 스탠더드’로 꼽히기에 충분하다(음반①).
엘라가 1959년에 ‘I Got Rhythm’의 원래 모습을 보기 드물게 복원했다는 것은 이미 이 곡이 탄생한 직후부터 재즈 연주자들의 즉흥연주 소재로 빈번히 쓰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1938년 카네기홀에서 베니 굿맨 쿼텟이 이 곡을 잼세션 형식으로 연주한 것은 이 곡에 대한 당시 재즈 연주자들의 접근 방법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메트로놈 올스타스(1942년)·디키 웰스(1943년)·에스콰이어 올스타스·캔자스시티 식스(이상 1944년), 테너 색소포니스트 돈 바이어스와 베이시스트 슬램 스튜어트의 이중주(1945년), 장고 라인하르트(1949년)의 녹음은 모두 빠른 템포에 화려한 연주자들의 솔로가 경쟁하듯이 줄을 이어 등장하는 녹음들이었다. 어느덧 원곡의 멜로디는 사라졌으며, 오로지 곡의 코드 진행만이 남아 ‘리듬 체인지’가 되어 즉흥연주의 길을 인도해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수많은 ‘리듬 체인지’의 잼세션 가운데서 1946년 재즈 앳 더 필하모닉 콘서트는 가장 뜨거운 독주자들의 경연장이었다. 훗날 이 녹음은 상업성을 고려해 찰리 파커의 음반으로 발매되었지만(음반②) 실상 리더가 없는 잼세션이었다는 점은 파커가 존경했던 색소폰의 두 거장 콜먼 호킨스와 레스터 영이 참여했다는 점에서도 확연하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계급장 떼고’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펼친다.
특히 이미 디키 웰스·캔자스시티 식스의 앞선 녹음에 참여했던 레스터 영의 결기는 대단했다. 테너색소포니스트로는 소리가 너무 작고 여리다는 세간의 비판을 불식시키려는 듯, 혹은 호크와 버드에게 절대 질 수 없다는 듯, 후반부에 가서 거칠게 몰아붙이는 그의 솔로는 방대한 녹음 속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한 대목을 만들어냈다.
즉흥 솔로의 긴 행렬로 이어진 ‘I Got Rhythm’의 추세는 역시 재즈의 인상주의자 빌 에번스를 통해 새로운 대안이 제시되었다. 그것도 밸브 트롬보니스트로 널리 알려진 밥 브루크마이어와의 깜짝 놀랄 피아노 이중주로(리듬 섹션에는 모던재즈 쿼텟의 퍼시 히스와 코니 케이가 함께했다) 말이다. 상대적으로 이완된 템포 속에서 순간마다 서로의 즉흥연주에 반응하는, 보다 적극적인 ‘인터플레이’의 개념을 그들은 명확히 들려주었다(음반③).
하지만 ‘리듬 체인지’라는 재즈 언어의 진미는 찰리 파커의 후계자이자 이 곡을 통해 명곡 ‘The Eternal Triangle’을 만든 소니 스팃에 의해 구현되었다. 전반부에서는 테너를, 후반부에서는 알토색소폰을 들고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그의 솔로는 비밥이야말로 초인들의 재즈임을 증명하려는 듯 숨 가쁜 체인지의 장애물을 넘고 또 넘는다(음반④).
‘리듬 체인지’라는 누구나 아는 길을 이토록 극적으로 돌파한 자는 소니 스팃 말고는 아무도 없다.
글 황덕호
KBS 1FM ‘재즈 수첩’을 16년 동안 진행하고 있다. ‘평론가’보다는 ‘애호가’가 되기 위해 오늘도 쓰고, 듣고, 틀고, 강의한다
이 달의 추천 재즈음반
엘라 피츠제럴드 ‘George and Ira Gershwin Songbook’
Verve 539 759-2|연주 시간 3분 11초|1959년 3월 18일 녹음|엘라 피츠제럴드(보컬)/넬슨 리들(편곡·지휘)
찰리 파커 ‘1946 Jazz at the Philharmonic Concert’
Verve 314 513 756-2|연주 시간 12분 57초|1946
년 4월 22일 녹음|벅 클레이턴(트럼펫)/찰리 파커·윌리 스미스(알토색소폰)/콜먼 호킨스·레스터 영(테너색소폰)/켄 커시(피아노)/어빙 애시비(기타)/빌리 해드넛(베이스)/버디 리치(드럼)
밥 브루크마이어와 빌 에번스 ‘The Ivory Hunters’
United Artists-Blue Note CDP 7243 8 27324 2 6|연주 시간 8분 30초|1959년 3월 12일 녹음|밥 브루크마이어·빌 에번스(피아노)/퍼시 히스(베이스)/코니 케이(드럼)
소니 스팃 ‘Endgame Brilliance’
Muse-32 Jazz 32009|연주 시간 9분 42초|1972년 2월 8일 녹음|소니 스팃(알토·테너색소폰)/배리 해리스(피아노)/샘 존스(베이스)/앨런 도슨(드럼)